“황진이의 한계”
‘이수만과 박진영 - 너희가 한류를 아느냐?’
불량관객인 필자.. 한 동안 영화를
보지 않았더랬는데.. 이번에 ‘황진이’는 워낙 기대를 하지 않고 보아서 그런지.. 뭐 기대한 것 보다는 나았지만.. 참 눈물겹다. 눈물겨워.
2007년 이 시대에 웬 60년대식 순애보란 말이냐.
너무나 순수하고 수줍고 소박한 영화..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 온 북한
미녀응원단 같은 소담스런 영화... 이런 착한(?) 영화에 필자의 신랄한 평론이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러므로 평론할 수 없다. 홍석중이
불쌍해서.
이 글은 ‘황진이’에 대한 영화평이 아니어야 한다. 필자가 늘 하던 이야기를 이참에 다시 한번 재확인 하자는 것이다.
연기 못하기로 소문난 CF전문 연기자 송혜교의 연기야 워낙 기대를 안했으니 걍 넘어가기로 하고.. 허우대만으로도 밥값은 한다는
유지태 역시 뭐 그렇다치고.. 그나마 고증이 약간 나아졌다는 데 점수를 줄 만 하다. 물론 아직도 멀었지만. 돈을 쓴 흔적이 이곳저곳에 보인다.
그래서 티켓값이 아깝지는 않더라.
‘사극은 망한다’는 충무로 징크스가 있다. ‘왕의 남자’가 이 공식을 깼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
한데.. 물론 왕의 남자도 고증이 엉터리지만.. 고증이 안될 때 나타나는 어색함을 깨는 특별한 초식을 왕의 남자는 구사하고 있다.
예컨대 사극 속의 등장인물이 길거리에 뻘쭘하게 서서 국사를 논한다든가.. 나라의 대신들이 시끌벅적한 종로 네거리에서 구종별배
앞세우고 벽제소리도 요란하게 ‘쉬이~ 물럿거라. 대감마님 행차시다’.. 바퀴 달린 사인교에 높이올라 요란뻑적지근하게 행차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아니라.. 정승 판서가 이상한 산속 오솔길로만 혼자 걸어다닌다든가.(전신주 안나오는 장면 잡으려면 대한민국 다 뒤져도 오솔길 밖에
없으니. 어쩌겠나. 벼슬아치가 저마다 구종별배에 길잡이까지 거느리고 행차하시려면 엑스트라 비용만 해도 장난이 아닐텐데.)
당시의
육조거리나 의정부나 비변사의 집무실 풍경이나 금군삼청에 병졸들 교대하며 군호소리 하는 수작이나 선술집이나 기생집 풍속이나 많기도 많았던
궁중연회장면이나 이런 것을 전혀 고증을 못하니 대신들이 거느리는 하인 한 명이 없이 길모퉁이에 서서 국가대사를 논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는
거다.
제발 우리 이러지 말자. 육조거리, 종로시전, 의정부, 비변사, 객사, 금군삼청 다 복원하자. 세트라도 제대로 짓자.
쪽팔려서 사극을 못보겠다.
더 쪽팔린 이야기.. 시청앞 덕수궁 수문장 교대식..(경복궁에도 있더라) 고무장화 신은 병졸 보고..
외국인도 있는데.. 챙피해 죽는줄 알았다. 아직도 검정색 고무장화에 흰 페인트로 줄 그은 신발 신고 거기에 그러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왕의 남자는 엉터리이기는 하지만.. 궁중의 화려한 연회 장면이라든가 뭐 이것저것 상당히 밀도있게 채워넣었다. 고증이
잘못될 때 나타나는 어색함을 작가가 임의로 지어낸 엉터리 고증으로 교묘하게 물타기 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심지어는 궁중에서 중국의 경극도
공연했다. 그게 말이나 되나. 황당황당황당~. 그래도 배짱좋게 밀어붙여서 사극 특유의 어색한 느낌을 제거하는데 성공.
하여간
황진이는 여러 면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드라마 황진이가 연예인 황진이 혹은 예술가 황진이를 보여준데 비해.. 영화 황진이는 근대적
계몽주의 지식인 황진이를 새롭게 해석하여 보여주는데 성공한 것이다.
문제는 영화의 황진이가 실존인물 황진이가 가진 카리스마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는 데 있다. 내가 아는 황진이는 ‘자유인 황진이’다. 그가 남긴 십수편의 한시와 시조에 잘 드러나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홍석중의
황진이는 전혀 자유인 황진이가 아니었다. 다면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전형적인 캐릭터.. 결정적으로 카리스마가 없었다. 카리스마는 원래 인물의
이중성에서 나오는 법인데.
초반 도입부.. 놈이가 황진이를 곁에 두기 위해 비열한 공작을 벌인다. 거기까지는 딱 김기덕의 ‘나쁜
남자’다. 김기덕이 ‘나쁜 남자’를 끝까지 밀어붙이는데 비해 홍석중은 그러지 못한다. 기둥서방 놈이는 나쁜남자질도 제대로 못하고 도주한다.
도주한 이유는 사나이 체면에 쪽 팔려서다. 그 장면에서 영화는 사실상 끝났다. 그 이후로는 뜬금없는 순애보.. 송혜교와 유지태의 가을동화 시즌
2.
슬픈건 놈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줄기차게 황진이 주변을 맴돈다는 설정이다. 이 설정은 다른 나라에는 없고 유독 한국에만 있는
기묘한 이야기 관습이다. 한국소설 특유의 진부한 습관. 땅이 넓은 중국이나 미국이나 유럽이나 일본을 무대로 한다면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설정이다.
슬프게도 심청은 중국 명나라의 황후가 되어야만 하는 작은 나라 조선의 숙명.. 중국 외에 나라가 있어야 말이지 젠장..
그렇다고 동쪽으로 가서 왜국의 왕비가 될 수는 없지 않는가 말이다.
또 찌질한 한국영화, 한국소설, 한국만화의 관습 중 하나는
주인공과 악역이 어린 시절부터 아는 사이인데 죽을때 까지 한 동네에서 아웅다웅하다가 한데 뒤엉켜 같이 죽는다는 거다. 놈이는 결국 송도를 떠나지
못했고 황진이 역시 송도를 떠나지 못한다. 그 답답함이라니. 찌질하게도 말이다. 왜 맴도냐 맴돌길.. 초딩이냐? 젠장! 궁뎅이를 발로 한 대
차주고 싶다. 훌쩍 뛰어넘어란 말이다. 너는 자유인이란 말이다. 이 세상에 인간이 가지 못할 곳이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작가가
상상력이 그렇게 없는지.. 18세기의 화가 최북만 해도 중국으로 일본으로 산천유람하며 다 가봤다는데.. 놈이가 중국으로 건너 가서 인삼장사를
하든 담배장사를 하든 뭔가 무역이라도 해서 크게 성공해 왔어야 제법 이야기가 되지 않겠느냐 이거다.
워낙 땅덩이가 작은 나라니
무대의 스케일이 작아질 수 밖에 없다. 예컨대 홍콩의 주윤발이 쌍권총을 뽑아 총알을 수백발이나 따따따따 쏘아댈 때 한국의 투캅스에서 안성기와
박중훈은 순경이 쓰는 조그만 권총으로 겨우 서너발이나 따쿵따쿵 쏘아대니 딱총놀이 하자는 거냐 시방? 애들 소꿉장난이다. 한국에서는 뭐든 결국
이렇게 되고 마는 거다. 젠장!
결론적으로 필자가 노상 강조해 마지 않는.. 주유소 습격사건, 노랑머리 이후.. 박정우 작가의
여러 영화들.. 그리고 왕의 남자, 미녀는 괴로워들의 성공방정식이 이 영화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았다는 거.
하기사 모든 영화가
흥행한 상업영화를 지향할 이유는 없다. 흥행과 무관하게 볼만한 영화가 있다. 이 영화도 나름대로 애를 쓴 흔적은 보였다. 송혜교가 다 엎어먹긴
했지만 그래도 뭔가 보여주려는.. 끙끙대며 애를 쓰는.. 눈물겨운 거시기가 없잖아 있었다. 그래서 가련하다. 가련해!
어쨌든 필자가
10년 전 부터 노상 강조해 온.. 50년대 일본 사무라이 영화가 60년대 이탈리아로 건너가서 마카로니 웨스턴을 성공시켰듯이.. 또 80년대
홍콩의 코믹액션붐과도 이와 같은 ‘스타일의 성공’으로 가지 않으면 충무로의 시장규모라는 태생적 한계를 극복할 수 없다는 거다.
헐리우드도 마찬가지다. 최근 헐리우드의 반격은 정확히 말하면 인터넷에 대한 반격이다. 그들은 인터넷으로 다운받아 봐서는 재미없는,
반드시 극장에서 봐야만 영화적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이미지 위주의 가족영화로 대대적인 공습을 감행하고 있다. 헐리우드도 이제는 스타일에서
성공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어떤가? 주유소습격사건
이후 미녀는괴로워 까지 이어져온 흥행영화의 공식을 잊어먹었는지.. 스타일의 완성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 시대다. 할인 안해주면
내돈내고 극장가서 영화볼 관객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스타일로 승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눈을 떠야 한다. 눈을!
충무로도 이제는 눈을 떠라! 눈을 뜬다는 것은 스타일의 의미를 깨닫는다는 것이다.
8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은 왜 홍콩영화에
열광했는가? 간단하다. 투캅스의 안성기가 조그만 권총 들고 공장 구조물 뒤에 숨어 따콩따콩 하고 있을 때 주윤발은 구조물 뒤에 모습을 숨기지도
않고.. 그냥 떠억 버티고 서서.. 그냥 뚜벅뚜벅 걸어가서 ‘너 악당? 나 윤발’ 하면서 사정없이 쏘아대는 거다. 그냥 ‘무대뽀 정신’으로
X나게 쏘아대는 거다. 허벌나게 쏘아대는 거다. 열발이나 겨우 들어갈 탄창으로 백발을 쏘아대는 만행도 서슴지 않고 저지르는 거다. 그리고 입에
문 성냥개비 하나. 폼이란 폼은 다 잡는 거다.
무엇인가? 그것은 포즈다. 관객들은 멋진 포즈 하나 원한다. 그 포즈는 어떤
것인가? 예컨대 18세기 부르조아 처녀들의 취향을 반영한 우아한 포즈, 소녀들이 좋아하는 순정만화 취향의 로맨틱한 포즈가 있는가 하면.. 또
세기말 낭만주의 지식인들의 퇴폐적인 포즈.. 20세기 초반 명동과 무교동을 주름잡던 모던보이들의 댄디한 포즈 따위가 있을 수 있다. 문화의
본질은 포즈다. 이거 알아야 한다.
요즘 먹힌다는 서구 젊은이들의 ‘쿨한’ 포즈가 있는가 하면 월남전 아저씨들의 터프한 마초포즈도
있다. 브루스 윌리스가 ‘다이 하드’에서 잘 보여주고 있는 그거 말이다. 전후의 열패감을 반영한 일본 지식인 특유의 시니컬한 포즈도 있고 한국
지식인 특유의 진지한 포즈-의식과잉의-도 있을 수 있다.
엘레강스하고 판타스틱하다는 김봉남 포즈.. 그리고 김봉남을 압도하는..
그러나 경멸할 만한.. 디시인사이드 초딩들의 ‘간지난다(?)’는 포즈.. 간지? 그것은 아마 귀엽고 세련되고.. 그러면서 한 편으로 당당하고..
일본인 특유의 기호를 반영하여 앳되어 보이려 하는, 그러나 역시 어른들에게 혹은 여자친구에게 인정받으려는 열망을 숨기고 있는.. 찌질한 면을
부정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도리어 더 찌질함이 있는.. 그것이 이른바 ‘간지좔좔’ 운운하는 그것.. 말하자면 차태현 특유의 어벙하면서도
핸섬한(?).. 초딩스런 너무나 초딩스런.(초딩님께는 미안^^;)
한류라고 한다. 한류가 위기라는 사람도 있고.. 한류가 이래야
한다니 혹은 한류가 저래야 한다니 하는 이수만들 있고 박진영들 있다. 그 양반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대관절 한류가 뭔데? 니들이 한류를
알아?
결론부터 말하면.. 일본 소설의 시니컬함.. 중국 드라마의 허황됨.. 이 둘에 없는 것은? 유교주의에 기초한 한국인 특유의
진지함.. 가부장적인 한국인에게서 보여지는 책임감 과잉의.. 이것이 배용준의 자상함으로 나타난 것이 한류다.
진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지하지 않으면서 자상할 수는 없으니. 예컨대 일본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과 말을 하되 멀찍이 떨어져서 혹은 등을 돌리고 먼
산을 바라보며 이상한 포즈로 말한다. 그들의 언어에는 따스한 감정의 교류가 없다. 드라마 안에서 등장인물들 사이의 거리가 일본이 한국보다 더
멀다. 주인공들이 서로 이마를 맞대지 않는다. 참견하지 않겠다는 식이다. 폐를 끼치면 안 된다는 일본인 특유의 문화가 작용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중국 드라마도 그렇다. 클로즈업이 적고.. 남방국가라서 날씨가 더워서 그런지 몰라도 서로 살을 부비기 싫어하고, 어쩌다가
주인공들이 피부접촉이라도 할라치면 갑자기 쿵푸가 나와서 뜬금 소림사 분위기로 돌변하고.. 그러니 거기에 어찌 사랑스러움이나 애틋함이나 자상함이나
은근함이나 청초함이나 단아함이 자리할 수 있겠는가? 서로 3초간 째려보다가 결국은 쿵푸하고 마는 중국인들이라니. 고개 돌리며 ‘흥’ 하는
콧소리를 남발하고 만다.
하여간 오타쿠 아니면 하키코모리가 나오는 일본드라마나 왕후장상이 소림축구하는 중국드라마에서 은근함,
우아함, 청초함, 단아함, 생긋함, 자상함, 애틋함, 고상함, 사랑스러움, 짜릿함, 고고함, 당당함, 중후함 따위를 기대할 수는 없다. 결론은
포즈인데 포즈가 안 나와주신다.
아시아인들이 21세기에 어울리는 포즈, 이 시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포즈로.. -그러나 한
편으로 아시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국인의 포즈를 선택한 것이 한류의 본질이다. 어느 면에서 한국인이 더 다면적이고 입체적인 캐릭터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물의 입체적 성격에서 카리스마가 나온다. 상황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포즈다.
투캅스에서 안성기의 딱총놀이
포즈보다 영웅본색에서 주윤발의 성냥개비 포즈가 더 관객의 오금을 저리게 한다. 영화는 포즈로 승부해야 한다.
포즈는 스타일이
담보한다. 결정적으로 황진이의 포즈는 찌질함을 면하지 못한다. 놈이가 놀던 물 송도를 떠나 큰 물로 가지 못하고 황진이 주변을 맴도는 설정이
그렇다. 황진이 역시 좁디 좁은 송도 바닥을 떠나지 못한다.
한류에 류(流) 자가 붙었다는데 주의해야 한다. 유는 흐름이다.
흐름이란 뭐지? 관객이 따라하는 것이 흐름이다. 관객은 주인공의 포즈를 흉내낸다. 그런데 무엇을 흉내내지? 황진이에서 진이나 놈이의 어떤 포즈를
흉내내야 하지?
흉내낼 포즈를 영화가 제시해줘야 한다. 이소룡 영화를 본 청소년 관객들은 모두 쌍절곤을 휘두르며 이소룡을
흉내낸다. 주유소 습격사건은 그 포즈를 보여주는데 성공하고 있다. 왕의 남자에서 장생이 보여준 포즈도 멋있다. 하늘아래 땅 위에서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겠다는 광대의 포즈.. 그 얼마나 멋있냐 말이다.
황진이는 어떤가? 드라마 황진이는 그래도 포즈가 있다. ‘미쳐야
미친다’고 했다. 한 분야에 온전히 미쳐야지만 그 카리스마 있는 포즈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미 정상을 밟고 온 사람의 담백한 포즈..
드라마 황진이는 춤에 미쳤다. 예술에 미쳤다. 그러나 영화 황진이는? 놈이에게 ‘기둥서방을 하라’고 명령하는 장면에서 포즈가 한번 나오더니 이후
아무런 포즈도 나오지 않더라.
오히려 그 위선자 사또가 멋있게 나온다. 황진이가 사또를 두고 ‘기생년을 이렇게 어렵게 품는 사내가
어딨어?’ ‘당신이야 말로 위선자’라고 말로 선언은 했지만 실제로 그 사또가 더 폼이 나는데 어쩌겠는가? 사또가 더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결국 영화라는 것은.. 포스터에 걸만한 좋은 포즈 하나 건지기 위해 백분 동안 별짓 다 하는 거다. 그래서 포스터만 봐도 영화의
흥행여부를 70프로 이상 알아맞힐 수 있다. 매트릭스도 그렇다. 포스터에 내건 그 포즈 하나가 그 영화의 99퍼센트를 말하고
있다.
필자를 실망시킨 영화 황진이의 진짜 문제는.. 뭐 꼭 황진이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지만.. 권위주의 봉건질서를
타파하겠다는 황진이와 놈이가 결국은 봉건시대의 권위주의 시스템 안에서 하부구조로 작동하고 있더라는 거다.
잘난 선비들의 위선을
폭로하고 온갖 남자들을 발 밑에 두겠다는 황진이가 결국은 사또의 하수인이 되어서.. 딱딱한 선비문화의 이면에 여유로운 기생문화로 구색을
맞춰주면서.. 봉건질서의 하부구조로 작동하다니.. 결국 양반계급 중심 지배질서의 단점을 보완하는 구색맞추기로 동원되고 말았다.
그것이 기생의 운명적 한계다. 실존인물 황진이는 그 운명의 굴레를 극복했는데도 영화 황진이는 오히려 퇴보하여 그 굴레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황진이가 화담 서경덕 선생에게 배운게 뭐냐?
놈이의 저항 역시 마찬가지다. 관아 창고에서 쌀이나 터는
화적질로 뭘 어쩌자는 건가? 놈이가 봉건질서를 공격할수록 봉건질서는 더욱 완강한 방법으로 놈이를 조치한다. 결론적으로 양반의 사또질에는 상놈의
화적질로 응수하는 셈으로 되어 장군멍군으로 구색이 잘 맞는 환상의 2인조 된다.
놈이 역시 봉건질서의 하부구조로 편입되어 버린
것이다.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젖히지 못하고, 더 넓은 세계로 나아가지 못하고 말이다. 놈이가 인삼장사나 뭔가를 해서
중국에서 거금을 벌어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잘난척 하는 양반들이 만든 기성질서를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어 버렸다면?
영화의 수준은
높아졌을 것이다. 그래도 변혁의 이상 하나는 던져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놈이의 율도국(?)은 애초에 없었던 것이다. 놈이의 대안없는
민노당식 비판은 조중동의 억지부리기와 손발이 잘 맞는다. 민노당식 떼쓰기는 모순된 사회의 하부구조로 편입되어 지배질서와 공생한다.
기성질서를 밑바닥에서 부터 갈아엎지 못하고 가진 자의 얄팍한 동정을 구걸한다거나 자선사업 따위를 기대한다거나 따위 소극적 저항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세상을 바꾼 외침들.. 징기스칸은 날랜 기병을 데려와서 농업문명을 엎어버렸다. 알렉산더는 동서양 사이의 담을
허물어버렸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에서 세계의 로마로 바꿔버렸다. 앗틸라는 결국 고대문명을 통째로 끝장내 버렸다. 청교도들은 기어이
신대륙으로 가는 배를 탔다.
놈이는? 서부로 가지 못했다. 메이플라워호를 타지 않았다. 대륙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송도를 떠나 큰
물로 나가지 못했다. 울타리 안에서 벌어지는 제살깎아먹기식 저항은 의미가 없다. 결국 황진이와 놈이의 저항은 조용한 은자의 나라 조선에서 그나마
목소리 한번 내보는 양념역할에 불과한 것이다.
무엇인가? 결정적으로 변신이 없다. 황진이의 주제의식.. 춤꾼 황진이든 사또를
혼내주는 선비(?) 황진이든 좋다. 본질은 변신이다. 주유소에서 미녀는 괴로워까지.. 모든 성공한 드라마의 공식은 인간의 변신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인물의 이중성 - 다면적 캐릭터 - 인간의 변신 - 카리스마 - 멋진 포즈.. 이렇게 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어떤 계기로 어떻게 변신할 수 있느냐는 질문에 대답하기다. 황진이는 변신하지 못했다. 황진이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황진이
본인은 가만 있는데 운명적으로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그는 서녀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는데 서녀로 태어났고 기생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놈이 때문에
기생이 되었고.. 이후 모든 일들.. 철저하게 운명적으로 그에게 다가온 것이다.
물론 황진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것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를 가지고 주체성을 논한다면 오물 이문열이 그의 ‘선택’에서 말하는 ‘장씨부인의 선택’도 졸지에 페미니즘이 된다.
정확히 이문열 수준이었다. 황진이 수준은.. 쩝.. 너무나 순박하고 너무나 순수한 순애보라 할 이 영화를 비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쓰다보니 아주 심한 비판이 되어버렸다. 사실 황진이에 그 정도를 기대한 것은 아니다. 기대 안했으므로 나름대로 재미있게 잘 봤다. 감독도 배우도
고생했다.
사극은 망한다는 공식이 있다. 왕의 남자가 그걸 깼는데 황진이는 다시 퇴보해서 그 이전으로 돌아가 버렸다. 필자가 노상
강조하는.. ‘인물의 일대기를 만들면 반드시 망한다’.. -이거 여러번 말했을텐데-는 공식 역시 정확하게 적용되어 버렸다. 왜 무리하게 일대기를
만들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인물의 일대기 만들어서 안 망한 영화가 있나?
인물 일대기 만들면 백퍼센트 망한다. - 결국 일대기
만들어서 정확하게 망했다. 이러기 있나. 제발 일대기는 만들지 말아주세요. 영화감독님들! 제발 좀!
놈이가 기둥서방 되는 장면에서
영화는 끝났다. 그 이후는 생뚱맞게 덧칠한 60년대식 순애보. 홍도야 우지마라. 제갈량 죽은 이후의 후삼국지 읽는
느낌이었다.
각설하고.. 인물의 이중성 - 입체적 캐릭터 - 인간의 변신 - 카리스마 - 멋진 포즈.. 이렇게 가야
성공한다. 황진이에서는 유일하게 사또가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김성수 감독의 무사(武士)도 람불화 한 사람만 입체적인 캐릭터였다.. 그런데 꼭
악역이더라.
남자주인공이 30세 이하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이로 설정되면 망할 확률 70프로 이상.. 이건 새로 발견한 공식. 주인공이 세상물정을
모르는데 입체적인 캐릭터일 수야 없지. 관객탓 하지 말고 영화 잘 좀 만듭시다.
ps.. 그리고 또 생각난 것은.. 7인의 사무라이에서 농부출신의 잘 생긴 젊은 남자는 세상물정 모르는 철부지.. 전형적인 캐릭터.. 이러면 영화가 딱 죽지.. 그러나 그 영화에도 백윤식이 여럿 있더라. 그 백윤식들이 겉멋만 든 미남총각을 잘 가르쳐서 영화를 살리더라.
단선적인 철부지 박중훈이 다면적인 고수 백윤식의 가르침을 배워(안성기 고수는 카리스마가 약하다. 라디오스타에서 뭔가 한 초식을 보여주었으나 약하다 약해.) 변신에 성공하게 되며.. 결정적으로 그 변신의 과정에 민중(관객)의 참여가 있으면 영화는 대박. 모든 흥행영화는 이런 패턴을 가진다. 40대 고수가 20대 하수의 변신을 돕는 구조. 그리고 최근 한국영화에서 다면적인 캐릭터를 보여주는 사람은 백윤식 밖에 없다.
라디오스타도 그렇고 투캅스도 그렇고.. 고래사냥부터 쭉 그래왔다. 보통 세상 물정을 아는 입체적인 캐릭터 40대 왕초, 타짜, 고수 형님과 세상물정을 모르는 20대 철부지 단선적인 캐릭터가 나온다. 조연 역할의 40대가 영화를 살리고 주연 역할의 20대 미남자가 영화를 죽이지. 늘 똑같은 공식이 반복돼. 변신에 성공할 수 있어야 영화가 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