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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115 vote 0 2007.06.19 (15:30:27)

“더러운 오연호들”
시민기자도 기자냐고?’

어제까지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라고 말하던 사람이.. 오늘은 “시민기자 노 기자는 상근기자도 아닌 주제에 나서지 좀 마소. 기사 품질 문제는 귀족기자에 특권기자인 우리가 어련히 알아서 하겠소? 에헴!” 이러신다.  

‘마이너 언론’이라는 표현도 쓰더라. 오마이가 원래는 마이너 언론이었는데 이제 청와대로 부터 초청도 받고.. 조중동과 동급으로 올라섰으니 메이저로 대접해 달라.. 뭐 이런 뉘앙스로 들렸다.

더럽다. 사회생활 해보신 분은 알겠지만.. 어느 분야라도 그렇더라. 밑에 있을 때 열심히 아부하던 사람이 조금이라도 윗자리에 올라서면 아랫사람을 더 집요하게 갈구는 법이다. 오연호 인간.. 많이 컸다. ‘모든 시민은 기자’ 운운하며 아부할 때 알아봤다. 오연호의 주장에 호응하여 참여정부가 특별히 오마이를 언론대접 해주니.. 원하는걸 얻었으니.. 이제 네티즌에게 아부할 이유가 없어졌다. 눈알 부라리고 위세 부린다. 대통령께 대놓고 훈계도 한다. 참여정부 아니었으면 언론행세도 못했을 것들이 저렇게 배신을 때린다.

오연호.. 그의 원래 꿈은 조중동의 위상을 얻는 것이었다. 메이저 언론이 되는 것이었다. 영향력 면에서는 조중동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그는 목표를 달성한 것이다. 인간 오연호.. 그의 꿈은 거기까지. 원래 그 수준의 인간이었다.

언론 [言論] [명사]

1 개인이 말이나 글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하는 일. 또는 그 말이나 글.
2 매체를 통하여 어떤 사실을 밝혀 알리거나 어떤 문제에 대하여 여론을 형성하는 활동.

나는 이렇게 안다. 그러나 조중동이 말하는 ‘언론의 자유’에 대통령의 발언할 자유는 포함되지 않는다. 그들 입장에서 ‘개인이 말이나 글로 자기의 생각을 발표할 자유’는 언론의 자유가 아니다.

사주의 국민 등쳐먹을 자유, 기자의 왜곡해놓고 책임 안질 자유. 국회의원의 면책특권 비슷한 기자들만의 특권.. 이게 조중동이 주장하는 언론의 자유다. 이렇게도 악랄하게 국민을 속이고 있다.

무엇이 언론인가? 내가 이렇게 쓰는 것이 언론이다. 오마이가 이를 부정한다면 나는 오마이를 언론으로 보지 않겠다. 종이로 찍어야만 언론인가? 얼마전까지만 해도 방송기자는 기자 취급도 안했다. 방송이 언론대접 받은건 최근이다. 인터넷 언론을 언론취급 해준건 참여정부다. 도와주니까 배신한다. 왜 거기서 한발짝 더 나아가서 모든 자생적 언론을 언론대접 해주려들지 않는가?

모든 국민이 기자인데 기자실이 왜 별도로 있어야 하나? 사람 위에 사람 없고 기자 위에 기자 없다. 모든 네티즌이 언론인이다. 언론의 자유에는 당연히 대통령의 표현의 자유도 포함된다. 나의 글쓸 자유도 포함된다. 저자거리에서 술 먹고 떠들 자유도 포함된다. 여론의 형성에 기여하는 모든 행위가 언론이다.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이 사회로부터 받아들여 지는 때가 진정 이 나라의 민주화가 완성되는 때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연호는 나와 생각이 다르다. 광화문에 간판 건 언론사, 보도 완장 찬 기자만 언론인이며.. 언론의 자유는 국회의원의 면책특권 비슷한 기자들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한다. 언론 축에도 못 들던 오마이가 눈물겹게 얻어낸 그 특권이 그에게는 너무나 소중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금 밖에 밀려나 있는 우리를 차갑게 외면한다. 참으로 교만하다. 나는 그들을 적으로 본다.

세상 이치가 원래 그렇다. 군대를 가도 갓 일병 단 넘이 가장 심하게 신참을 갈군다. 사회 어느 분야든 다 그렇더라. 간신히 막차 얻어타고 턱걸이로 겨우 들어간 사람이 가장 심하게 금 밖으로 밀려난 사람을 괄시하더라. 가장 호되게 신고식 치른 넘이 가장 심하게 텃세 부리더라.

강준만, 진중권, 오연호들.. 당신네들도 아스팔트 위에 섰던 한 때의 좋은 시절이 있기는 있었을 것이다. 그해 여름 당신네들이 아스팔트에 섰을 때 어디 법대로 화염병 던졌느냐? 아스팔트 위의 마음을 잃은 자는 이미 우리의 적이다.

왜 법과 싸우려 들지 않느냐? 법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더냐? 마그나카르타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법은 투쟁의 성과물이라는 사실을 너희가 정녕 모르느냐? 선진국 사람들은 피 흘리며 싸워서 법을 만든 기억을 잊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법이란 중국에서 들여오거나 혹은 서구에서 베껴오는 것으로만 안다. 그렇지 않다. 법은 투쟁으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피로 쓰여지지 않은 법은 진정한 법이 아니다.

빌어먹을! 이 나라에 이렇게도 인재가 없다. 글 깨나 읽었다는 자들 중에 대통령 말 한 마디를 알아듣는 말귀를 가진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기본적으로 대화가 안 된다. 대화가.. 젠장 니들이 전여옥이냐?  

오연호 따위를 비판해서 무슨 실익이 있겠는가? 오연호나 씹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하다. 기실 누구를 비판하는 것은 그 인간이 미워서가 아니다. 새로 길을 열어가기 위해서다.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저쪽 길에 답이 없으니 이쪽에서 새로운 길을 열어가자는 거다.

오연호 부류는 언론개혁에 관심없다. 그는 진짜가 아니다. ‘언론의 자유’와 ‘언론기자의 자유’를 구분 못하는 사이비다. 강준만 2가 된지 오래다. 하기사 내가 강준만 따위 덜된 인간을 나무랄 이유도 없다. 얼떨결에 호랑이 등에 올라탔다가 후회하는 자에게 무슨 기대를 하겠는가?

문제는 희망이다.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가자는 것. 무릇 한 무리의 지도자가 되었거든 자신이 스스로 찾아낸 새 길을 일러주든가 아니면 지도자의 위치에서 내려와야 한다. 기어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못찾았거든 ‘죄송합니다’ 하는 사과 한 마디 남기고 조용하게 퇴장해야 한다. 그 무대에서.

희망이 문제다. 일제 치하에서도 그랬다.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3.1의 영웅 33인 중 한용운, 양전백, 양한묵 세 사람을 제외하고 30인이 배반했다. 배반확률이 90프로다. 탄핵 때 울부짖은 우리당 창당멤버 40여명 중 배반할 확률 역시 90프로다. 세상에 이렇게도 인간이 없다. 인간이! 그 무대에서 네 사람 건지면 정상이고 다섯 사람 넘게 건지면 대박이다.

왜 그들은 변절했는가? 희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세는 날로 악화되었다. 일제의 힘은 점차 강해진다. 일본이 만주로 중국으로 침략해 가니 조선사람 멋모르고 부화뇌동한다. 일제에 저항할 생각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왜군따라 만주로 중국으로 밀고가서 만주사람, 중국사람 등쳐먹으려 한다.

빌어먹을! 독립 희망 대신에 새로운 희망이 생겨나버린 것이다. 아주 고약하고 나쁜 희망이.. 변절의 희망이.. 3.1의 날에 만세를 부르던 그때만 해도 저항하는 일 외에 달리 대안이 없었다. 투쟁은 외길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생각이 달라졌다. 중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다고? 조선사람 왜놈 뒤에 살짝 묻어가서 중국사람 착취하세. 중국에서 노다지가 터졌다네. 골드러시가 일어났다네. 초등학교 교사하던 시골총각 박정희 선생 혈서로 자원하여 중국행 장도에 오르네. 독립희망 멀어지고 나쁜 희망 피어오르네.

강준만, 진중권, 오연호.. 조중동 박멸희망 멀어지고 적대적 의존으로 공생하며 한 통속으로 즐기는 사악한 희망이 솔솔 피어오르네. 변희재가 잽싸게 배우네.

‘대중지성’이라는 제목을 건 경향신문 특집기사 한 구절이 참고할 만 하다.


### 대중이 지식을 생산하는 주체로 떠오르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이 어른거리는 풍경을 배경으로 나타난 새로운 현상, 즉 ‘대중지성’의 탄생이다.(중략)

시골 장터에서 열린 황소 몸무게 알아 맞히기 퀴즈에서 아무도 답을 맞히지 못했지만, 퀴즈에 참가한 사람들이 적어낸 몸무게를 합쳐서 나누어 보니 맞더라고 한다. 신영복 교수는 “단 한사람도 맞히지 못했지만, 여러 사람의 판단이 모이니까 정확한 몸무게를 맞힐 수 있었다. 언론도 얼핏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대중의 지혜를 모아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중은 잘 안다”고 말했다.(중략)

강준만 전북대 교수의 의견은 다르다. “대중의 지혜는 사실 하나마나 한 소리다. 확률적으로 대중은 늘 지혜롭게 돼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 자체의 힘(머리 수 파워) 때문에 대중의 선택은 정당화되고 지혜가 되게끔 돼 있다. 대중은 이미 ‘지혜’라는 답을 내장하고 있는 개념이다. 예컨대, 대중이 선거에서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망정 그걸 무슨 수로 꾸짖을 것이며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문화평론가 김헌식씨도 “대중지성이 기존에 나온 사실을 적시하고 수정하고 지혜를 모을 수는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한가지 주제에 매달려 중요한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기존의 지식인이고 전통적 지식인”이라고 말했다.[경향신문] ###


강준만 수준이 이렇다. 그의 발언에는 ‘함부로 날뛰는 군중을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이 묻어난다. 그 이면에 ‘지식인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한다’는 본질은 살짝 감추고서 말이다. 야비하게도 말이다.

오늘날 지식인이 대중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거기에 대중노선의 파쇼화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왜 통제하지 못하는가’를 그들은 정면으로 직시하지 않는다.

지식인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식인이 끝끝내 외면하고자 하는 진실이다.

‘왜 지식인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가?’ 이걸 정면으로 질문해야 한다. 그러나 경향신문 특집기사에 그러한 본질의 물음은 없다. 기사를 장황하게 써놨으나 다 뜬구름 잡는 소리일 뿐 ‘대중지성’ 그림자도 못 밟는다.

왜 지식인이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가? 간단하다. 칼로 싸우던 시대에서 총으로 싸우는 시대로 룰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세상이 확 바뀐 것이다.

중세의 봉건제도는 기사계급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기사가 되려면 첫째 말을 탈 수 있어야 한다. 그 이전에 말이 있어야 한다. 조선시대의 군졸들도 기병으로 지원하려면 자기 소유의 말 두 마리를 몰고가야 했다. 갑옷도 있어야 하고 창과 방패도 있어야 한다. 돈 키호테에 산초 판사처럼 부려먹을 종자도 한 사람 데리고 있어야 한다. 결국 돈이 있어야만 기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뿐이랴. 제대로 된 기사가 되려면 적어도 3년 이상은 엄격하게 훈련을 받아야 한다. 말을 타고 칼을 쓰는 것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논산 훈련소에서 일주일만 훈련하면 K2 소총 정도는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다. 칼 쓰는 중세의 기사가 소총 든 현대의 병사들을 통제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리다.  

강준만이 ‘지식인이 대중을 통제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토로하는 것은 중세의 기사가 생뚱맞게 현대에 나타나서 ‘소총 든 병사를 당해낼 수 없다’는 좌절감을 토로하는 것과 같다.

계급제도의 발생과정을 이해해야 한다. 야금기술의 보급이 고대 시민계급을 만들었고, 갤리선의 등장이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를 연출했고, 등자의 발명이 중세의 기사 계급을 낳았으며, 총기의 등장이 근대 부르조아시대를 열었고, 인쇄술의 보급이 계몽주의로 발전했으며, 삼각돛의 발명으로 인한 범선의 등장이 원양항해 시대를 열었고, 증기기관의 발명으로 인한 기선의 등장이 국제무역에 기반한 작금의 자본주의 질서를 열었다.

이면을 들추어보라! 모든 변혁의 기저에는 반드시 과학적 혁신이 자리하고 있다. 물적 토대에 기반한 혁신이 없이 새로움은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본질인 과학적 혁신을 논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인은 뜬구름을 잡는다. 설사 과학적 혁신을 논한다 해도 지식인이 그 상황을 주도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그들은 변절한다. 구한말 구식교육을 받은 유림이 사서삼경 하며 제 아무리 아는게 많아도 개화시대를 주도할 수 없듯이 그것은 원래 불가능한 것이다.

왜 강준만, 진중권, 오연호 부류는 좌절하는가? 왜 그들은 아스팔트 위에서의 투쟁은 여기까지.. 언론의 자유는 메이저 기자들만 혜택받는 여기까지(오마이는 턱걸이로 포함. 데일리 서프는 당연히 배제).. 하며 대중이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금을 긋는가? 왜 그들은 진도 나가려는 대중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려 드는가? 어제까지만도 본인 스스로 대중의 일원으로 행세하던 자들이 그새 태도를 바꿔서 말이다.

정답은 나와있다. 야금기술이 보급되었으나 정작 지도자는 야금기술을 모른다. 갤리선이 등장했으나 지도자는 한 번도 해전을 치뤄본 경험이 없다. 등자는 발명되었으나 정작 대장은 말을 탈 줄도 모른다. 소총은 발명되었으나 소대장은 20발 사격에 0발을 명중시킨다.(필자 군생활 때 이런 간부 있었소.) 인쇄술은 보급되었으나 정작 지도자는 까막눈이라서 라틴어 성경이나 달달외어 암송할 수 있을 뿐 구텐베르크가 독일어로 인쇄한 책을 읽을 줄도 쓸줄도 모른다.

말을 탈줄도 모르는 징기스칸이 말 한다. ‘대중이 선거에서 아주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망정 그걸 무슨 수로 꾸짖을 것이며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하기사 말은 맞는 말이다. 미쳤지! 말도 못 타는 멍청이 기병대장 말을 누가 듣겠는가? 강준만이 대중을 꾸짖어 바로잡을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배를 몰 줄 모르는 어리석은 선장은 말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 한가지 주제에 매달려 중요한 지식을 만들어내는 것은 결국 기존의 지식인이고 전통적 지식인’

그들은 신문명을 이해하지 못한다. 노무현과 토론한 인간들 중에 노무현 대통령 만큼 노트북을, 인터넷을 능숙하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없다는데 비극의 원인이 있다. 이것이 본질이다.

노무현 방식은 노무현이나 되니까 하는 거지.. 김근태 등신이나 정동영 등신이 대통령에 당선 된다면 어차피 못하는 거고.. 누가 대통령에 당선되든 6개월 후면 전자정부니 국정브리핑이니 뭐니 다 폐지될 것이고.. 다시 옛날 방식으로 되돌아가고 말텐데 그딴거 골아프게 왜 하냐 뭐 이런 생각이다.  

사실이지 대중이 어리석은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역사의 경험칙으로 보면 무수히 그런 일이 있었다. 소총이 등장했어도 검사의 칼은 여전히 중요했다.

예컨대 뒤마의 삼총사.. 달따냥과 세 친구는 칼을 위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삼총사’가 아니라 ‘삼검사’여야 한다. 제목이 삼총사인 이유는 그들이 머스킷 총으로 무장한 ‘총사대’ 소속이기 때문이다. 총을 다루므로 총사다. 그러나 여전히 총보다 칼이 빠르다. 적이 눈앞에 있는데 언제 화약넣고 총구멍 쑤시고 부싯돌 켜고 하겠는가?

라이플 총이 발명되면서 단숨에 역전되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사무라이의 칼에서 머스킷 총을 거쳐 라이플 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다. 과도기에는 항상 강준만, 진중권, 오연호, 김석수 부류가 헛소리를 늘어놓곤 했다. 역사이래 늘 그래왔다.

‘안티조선 우리모두’ 대문에 걸려있던..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을 기억하시는지.. 90프로는 넓은 문으로 간다. 총의 시대가 열렸지만 그들은 여전히 총을 능숙하게 다루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미 칼쓰기에 인이 박혀 있는데 어찌 낯설은 라이플 총에 적응을 하겠는가?   

지금은 우리가 조중동과 싸우고 있지만.. 머잖아 조중동과 싸울 이유도 없이 그들이 스스로 자폭하는 시대가 온다. 컴퓨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지금의 10대 들이 20대, 30대가 되면 언론계에 상전벽해가 일어난다.

우리가 나서지 않아도 때가 되면 조중동은 절로 소탕된다. 라이플이 등장하자 사무라이의 칼이 순식간에 사라졌듯이. 그러나 그래도 우리는 싸워야 한다. 왜? 장차 도래할 새로운 시대에 대비하여 새로운 신뢰의 구심점을 지금 형성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머지 않은 미래에.. 대세는 인터넷으로 가고 조중동이 몰락하는 시대에.. 우리의 젊은 후배들이 길을 잃고 우왕좌왕 하지 않도록 우리가 광야에 씨앗을 뿌려두어야 한다. 후배들이 의지할만한 든든한 구심점을 지금 마련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투쟁해야 하는 진짜 이유다.

어차피 저들은 신뢰를 잃었다. 친미친일에 빠진 조중동은 진작에 신뢰를 잃었고 수구세력과의 적대적 의존을 꾀하는 강단의 먹물들도 신뢰를 잃었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사회로부터 충분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싸움은 계속되어야 한다. 우리 스스로 우리 내부에 든든한 신뢰의 축을, 이심전심의 축을 형성할 때 까지. 우리가 저 더러운 궁물족들 처럼 우왕좌왕 하지 않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과시하고.. 국민 모두가 그 사실을 납득할 때 까지.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대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는 시대는 멀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구자는 있어야 하고 선각자도 있어야 한다. 서프라이즈가 그 역할을 해내야 한다. 우리가 2500년 전 그리이스 한 귀퉁이 도시국가에서 일어난 민주주의의 성공사례를 학습하듯이 훗날 지구촌 인류 모두가 한국에서 일어난 성공모델을 학습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훗날 그 모델이 만들어진다면 그 모델은 지금 서프에서 일어난 패턴을 발전시킨 형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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