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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3473 vote 0 2007.03.17 (00:49:14)

글쓰기의 전략

‘얄팍한 주제, 상투적인 소재, 말초적인 자극은 조선일보로’

인터넷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일이다. 전문가들이 일찌감치 선언했다. ‘텍스트의 시대는 가고 이미지의 시대가 왔다’고. 인터넷 시대에는 젊은이의 감성에 맞게 말초적인 자극을 주는 짧은 글이 유행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원고지 10매 분량인 조중동의 짧은 칼럼은 인터넷 시대에 맞지 않다. 오히려 장문이 분석적인 글이 인기를 끈다. 초창기 딴지일보의 ‘디벼주마’ 시리즈가 인기를 끌었듯이.

‘글쓰기의 전략’이라는 책이 서점가의 베스터 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개념어 사전’이라는 책도 있다더라. 인터넷 시대를 맞아 블로그와 까페 등이 유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는 일반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다. 인터넷 시대에도 텍스트는 건재하다. 오히려 진화하고 있다. 소설의 독자는 확실히 줄었을 수 있겠으나 블로그로, 까페로, 칼럼으로 텍스트의 총량은 늘어났다.   

정보의 질의 차별화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종이신문 시대에는 언론이 공급하는 정보를 독자들이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수 밖에 없었다. 공산주의 사회처럼 정보의 배급제가 정착되었던 것이다.

이제는 달라졌다. 배급제에서 시장경제로,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바뀌었다. 인터넷은 거대한 정보의 시장이다. 독자들은 자신이 원하는 글을 골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자 글의 수준이 높아졌다.

물론 말초적인 자극을 주는 짧은 글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조중동을 보라! 오늘도 노탓하는 악플로 가득하다. 딴나라 사이트를 보라! 말초적인 감성을 자극하는 수준이하의 짧은 글로 도배되어 있다.

자동 분리수거가 정착되었다. 정보의 질의 차별화로 인하여 글쓰기 훈련을 받지 못한 50대 이상 노년층이 조중동으로, 딴나라로, 수구 사이트로 몰려가서 그 사이트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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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박학다식한 사람도 아니다. 재미있는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다. 잘 다듬어진 미문을 쓰는 사람도 아니다. 이 분야의 전공자도 아니다. 직업적으로 쓰는 사람도 아니다.

어떤 주제든 던져주면 그 문제에 관하여 쓸 수는 있다. 자판기와도 같다. 그 구녕으로 좋은 상품이 나오는건 아니지만 500원 동전을 넣으면 커피든 율무차든 일단 한 잔은 나와주는 것이다.

좋은 글은 아니라도 어떤 주제에 대해서든 말할 수는 있다. 하루에 열 편을 쓰라면 쓸 수도 있다. 오타가 많아서 그렇지 원고지 20매 정도는 30분에 쓸 수 있다. 서프라이즈에 쓰는 정도의 분량을 하루에 대 여섯편 쓴 적도 있다.

가벼운 주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심오한 주제일 수록 쉽게 쓴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나는 일정한 기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기법은 수학문제를 푸는 것과 비슷해서 장문의 글일수록 오히려 쓰기 쉽다는 거다.

세계 7대 수학 난제를 풀려면 흑판을 100개는 채워야 하지 않을까. 문제의 난이도와 문제풀이의 길이는 비례한다. 길게 써야 쉽다. 왜냐하면 의견을 개진하는 글이 아니라 정답을 풀어내는 글을 쓰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서 글쓰기는 어떤 정해진 공식에 대입하여 기술적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는 보통의 글재주있다는 사람들이 쓰는 방법과는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잘 쓴 글이 아니라도 알아둘 필요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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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 구라칼럼은 원고지 10매 안팎의 글이다. 정부의 정책을 비꼬는 글이거나 혹은 선진(?) 외국의 예를 들어 한국을 비난하며 자아비판 하는 글이거나 자기 의견을 내어 무언가 주장하는 글이다.

이건 쉽다. 일방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면 된다. 즉 긴 글이 아니다. 청개구리처럼 정부의 입장을 반대로 뒤집어서 전매특허의 염장지르기 초식, 말꼬리잡기 초식을 구사하면 된다.

오마이뉴스 고태진 칼럼은 더욱 쉽다. 이 분의 글도 틀이 정해져 있다. 먼저 모두에 신문이나 방송에 보도된 사건의 전말을 간략히 소개한다. 다음 정부의 입장을 예시해 놓고 밑줄 그어가며 말꼬리 잡는다.

정부의 입장을 나열한 다음 그 한 마디 한 마디를 좌파의 강령에 맞게 뒤집어 나타낸다. 이건 단순한 노가다 작업이다. 사용하는 연장이 다를 뿐 고태진 칼럼도 자판기 칼럼이다.

고태진 칼럼의 분량이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으며 항상 일정한 것은 이 분이 쓰는 연장의 길이가 항상 일정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나의 기법이긴 하지만 진부한 거다. 인터넷 시대에 맞지 않다.

나의 글은 풀어내는 글이다. 머리 속에 공식을 띄워놓고 쓰는 글이기 때문에 문제가 다 풀릴 때 까지 길게 쓸 수 밖에 없다. 그림을 그리되 구도-스케치-세부묘사-색입히기의 전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어쨌든 나는 내가 개발한 방법을 쓰고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은 인터넷 양식에 맞게 고안된 것이다. 필자의 글이 모든 사람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글은 아니다. 구미에 맞는 사람만 읽어야 한다.

영화라도 장르가 있다. 코미디가 있는가 하면 스릴러도 있고 에로도 있고 액션도 있고 멜로도 있다. 장르에 대한 기호가 다른 사람은 평론하지 말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필자의 글이 납득되지 않는 사람은 읽지 말아야 한다.

조중동에 길들여진, 좌파의 도그마에 길들여진 외세의존의 사대주의자가 내 글을 읽으면 건강을 해친다. 그런 사람을 엿먹이기 위한 장치를 곳곳에 심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불편해 할 단어를 취사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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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기법은 구조분석이다. 구조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단계가 있으므로구조분석을 시도하면 일정한 분량 이상 길어질 수 밖에 없다. 구조분석의 기법에 대해서는 내용이 방대하므로 여기서 다 이야기 할 수 없고.

글쓰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는 글쓰기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영화든 소설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좋은 작품은 문외한이 보아도 졸리지 않는다. 역으로 졸리면 좋지 않은 작품이라는 증거.

리듬이 있고, 패턴이 있고, 반복이 있고, 파격이 있고, 고저가 있고, 강약이 있고, 장단이 있으면.. 인간은 본능적으로 긴장하게 되어 있다. 고저와 강약과 장단과 파격과 반복으로 인간을 긴장시킬 수 있다.  

그 기본은 대칭이다. 어떤 글이든 ‘산은 높고 물은 깊다’ 하는 대칭구조가 있으면 긴장하게 마련이다. 특히 운문이 그러하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에서 ‘오백년 도읍지’의 정(靜)과 ‘필마로 돌아드는’ 동(動)이 교차한다.

산수화에서 산과 물은 정과 동의 조화다. 사군자의 난초그림과 같다. 잎은 굳세지만 부드럽게 휘어져 있다. 강(剛)과 유(柔)의 대칭과 평형이다. 강한듯 유하고 유한듯 강한 것이 선비의 자세다. 하나의 난초 잎새에 다 있다.

이것이 긴장감을 유발하는 테크닉이다. 인간이 긴장하는 것은 기계적 매커니즘을 따른다. 인간의 감성은 기계적으로 반응한다. 평화로운 들판에 나비 한 마리가 날아오르면 누구라도 그 나비를 쳐다보게 되어 있다.

강아지풀을 흔들면 고양이는 털을 빳빳이 세우고 달려들게 되어 있다. 원래 그렇게 되어 있다. 테크닉에 의존해도 안 되지만 이런 기계적인 테크닉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는 일단 알아두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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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초등학교의 미술수업은 미술학원에서 가르치는 요령을 가르치지 않는다. 초중등학교 미술교과서에는 단지 대가의 작품이 실려있을 뿐 그리기의 기법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기법을 가르친다고 한다. 나는 기법을 가르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둔재라도 미술학원에서 두어달만 배우면 제법 그럴듯 하게 그릴 수 있다. 그리는 요령을 알면 사물을 관찰하는 요령을 알게 된다.

단지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제대로 보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견(見)이 아니라 관(觀)을 터특하게 된다. 나는 모든 어린이들이 기본적인 미술수업을 받아야 한다고 믿는다. 기교를 배워야 한다.

그림을 그릴 줄 모르면 사물이 존재하는 바탕에 대해서 모르게 된다. 우리가 무수한 착시현상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대가의 작품을 백 번 보느니 한 번 베껴그리는 것만 못하다.

고흐나 고갱도 남의 그림을 무수히 베껴 그렸다고 한다. 사진을 복사하듯 베껴 그린 경우도 많다. 모든 위대한 창작은 모방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무언가를 학습한다는 것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다.

앎이 곧 모방일진대 모방을 모르고 창의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불성립이다. 그것은 있을 수가 없다. 천 번을 모방해야 겨우 한 번 창의할 수 있다. 모방만으로 창의할 수 없지만 모방을 거치지 않고는 더욱 창의할 수 없다.

그림도 그렇지만 글쓰기에서도 요령과 테크닉을 익혀야 한다. 아무튼 요령과 기법을 알려주지 않고 무작정 그리게 하는 것은 결코 창의적인 미술교육이 아니다. 그건 아무 의미없는 바보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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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는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나는 오늘..’로 시작되는 일기를 쓴다. 무조건 일기의 첫 머리에다 ‘나는 오늘’이라고 써놓는다. 기법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한 기법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고대 이집트 벽화의 인물상은 한결같이 몸은 정면인데 얼굴은 측면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의 그림 일기를 그릴 때는 반드시 하늘에 태양을 그리고 손을 그릴 때는 꼭 손가락 다섯 개를 그린다.

요령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백프로 틀에 맞춘-기계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그 틀 속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러므로 테크닉을 가르쳐야 비로소 잘못된 테크닉에서 벗어난다.

글을 예쁘게 쓰는 것은 잘 쓰는 것이 아니다. 창의적으로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이다. 창의적으로 쓴다는 것은 그 틀을 파괴하는 것이다. ‘이상’처럼 문법을 무시하고 ‘사라마구’처럼 문법을 파괴하는 것이다.

문법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것을 비틀어야 한다. 오마이뉴스 고태진 칼럼에 숨어 있는 붕어빵틀을 파괴해야 한다. 글쓰기는 틀에 맞추어 쓰는 것이며 틀을 파괴해 버릇해야 틀의 존재를 알아챌 수 있다.

어쨌든 소설가는 전체 이야기의 뼈대를 미리 만들어놓고 쓴다. 화가는 미리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해놓고 그린다. 나는 구조분석의 틀을 머리 속에 띄워놓고 쓴다. 틀이 있다. 기존의 틀을 파괴해야 자기만의 틀을 얻을 수 있다.

하여간 필자의 이야기는 논술전략이 아니다. 논술공부 하려는 초딩들에게 내 글은 유해하다. 그러니 초딩은 읽지 말라. 논술 하려면 조중동 칼럼이나 쳐 읽고 빌어먹을 이문열 삼국지나 쳐 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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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격이다. 격이 있어야 한다. 그 전에 격을 찾아야 한다. 그에 앞서 격을 파괴해야 한다. 자기도 모르게 격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단계에서는 요령을 학습해야 한다.

그것이 스타일이다. 문체다. 문법이다. 예컨대 다른 나라의 칼럼들은 그렇지 않은데 유독 한국과 일본의 종이신문 칼럼들만 항상 주소와 숫자 따위를 글의 모두에 쓴다. 사건의 개요를 간략히 설명하는 것이다.

‘보도에 의하면 몇월 며칠 누가 어느 장소에서 누군가를 만나 뭔가를 했다고 하는데 어쩌구 저쩌구...’ 이렇게 쓰면 잠 온다. 조중동 칼럼 식으로 쓰면 안 된다. 그게 논술은 될지 몰라도 글은 안 된다.

최악의 글쓰기인 한국신문의 사설과 칼럼.. 그 최악의 글쓰기를 기본으로 논술을 가르치고 있으니.. 아마 대학의 논술심사도 그 조중동 기준에 맞추어 하지 않을까.. 논술이 사람 버려 놓는다.

나는 의도적으로 다르게 쓴다. 글 머리에는 글의 주제와 다른 어떤 사건을 쓴다. 3월 14일 글에서 ‘조지 말로리’의 ‘산이 거기에 있으니까 산에 오른다’는 이야기를 쓴 것과 같다.

이건 내가 전달하려고 하는 메시지와 직접 관련이 없다. 딴나라 민생쇼 비판과 무관한 내용이다. 엉뚱한 내용을 글 머리에 올려서 첫 1분 동안에 호기심을 자극하고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고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이렇게 한다. 14살 때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보고 이 방법을 터득했다. 참고로 말하면 리더스 다이제스트는 백인우월주의-보수적인 기독교 사상을 전파하는 재수없는 잡지다.

이야기가 길어졌으므로 이쯤 해 두고.. 글쓰기에 있어서 필자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 원칙을 말하면-물론 이건 필자 개인의 생각일 뿐이다. 글쓰기에 교과서는 없다고 본다.

● 같은 단어의 반복을 피하는 방법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글쓰기의 기본은 같은 표현을 두 번 연속해서 쓰지 않는 것이다. 예컨대 개도 좋고 고양이도 좋다로 ‘좋다’를 반복하면 안 된다. 개도 좋고 고양이도 괜찮고 당나귀도 멋있고 토끼도 귀엾고.. 의도적으로 다른 표현을 쓴다.

● 단정적인 표현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그런 것 같다’거나 ‘아마 그럴 것이다’ 하는 식으로 애매하게 쓰지 않는다. 절대로, 반드시, 분명히.. 의도적으로 단호한 표현을 쓴다.

● 대칭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산은 높고 물은 깊다는 식의.. 이건 앞에서 이야기 한 거고.. 근데 대칭구조도 여러 가지라.. 이 부분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단행본 한 권은 써야 할 것이다.  

● 리듬감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끼리끼리 밀어주고 당겨주고 유유상종 배맞추고 눈맞추고 진드기붙고 껌붙고 붙어먹고 등쳐먹고.. 4.4조 혹은 3.4조의 시조체나 판소리체로 쓴다.

● 독자에게 말을 거는 방법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보라! 왜? 천만에! 과연 그럴까? 분명히 말한다. 웃기고 있네. 초딩은 가라!’

● 한 문단 안에 기승전결을 넣기.. 필자의 글은 아래한글 B5기준으로 3행씩 끊어져 있다. 2행씩 끊는 경우도 있다. 그 안에 기승전결이 있다. 억지로 3행을 맞추다 보니 중언부언 되는 수도. 심해져서 악벽이 되었다.  

● 짧은 문장을 쓰는 방법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의도적으로 단문으로 만든다. 늘어지는 글은 질색이다. 종이로 된 단행본이면 장문이 유리할지도..

● 쉬운 우리말로 긴장을 유발하기.. 되도록이면 한자투의 전문용어보다 쉬운 우리말로 바꾸어 쓰는 것이 좋다.

● 신조어로 긴장을 유발하기.. 언어에도 유행이 있다. 예컨대 요즘 유행하는 진정성이라는 말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말이다. 가끔 전문가들이나 쓰는 잘 알려지지 않은-생소한 용어를 한 단어 던져주는 것도 긴장을 유발하는 방법이다.

● 자문자답하기.. 왜? 왜인가? 무엇인가? 등등 질문과 그 질문에 호응하는 답변의 주고받음은 긴장을 유발한다.

● 비유하는 방법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모든 사건에는 일정한 구조의 닮은 꼴이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그 패턴을 터득하면 비유할 수 있게 된다. 이건 상당히 훈련해서 내공을 쌓아야 한다.

● 점입가경법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어떤 시비를 걸 때는 일부러 사소한 부분을 물고 늘어진다. 처음부터 바로 본질을 치는 것이 아니라 사소한 부분을 가지고 변죽을 올리다가 차츰 중심부로 진입해 들어간다. 이건 딴나라 인간들도 잘 쓰는 방법인데 대통령의 말투가 어떻다 하는건 지극히 사소한 부분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강조하는 권위주의라는 본질과 닿아있다. 조중동의 친일행각을 과거에 저지른 사소한 실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천만의 말씀. 본질과 닿아있다. 사소한 가닥을 잡은 것 처럼 보이는데 고구마줄기에 고구마 끌려오듯 왕건이가 딸려온다. 이 경우 의도적으로 변방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 문장의 순서를 바꾸는 방법으로 긴장을 유발하기.. 의도적으로 문법을 파괴하는 방법이 문법의 존재를 드러내어 오히려 글의 존재감을 높인다. 즉 글의 속에 숨은 글의 뼉다구를 드러내는 것이다. 예컨대 주어를 생략하는 방법도. 반대로 이처럼 술어를 생략하기도.  

여러 가지를 이야기 했지만 본질은 긴장이다. 독자를 긴장시키는 글이 잘 쓴 글이다. 지루하게만 하지 않으면 기본은 된다. 모두가 이에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필자의 스타일은 그렇다.

가벼운 우스개로 지루하지 않게 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심오한 주제로도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이 진짜다. 조중동식 비꼬기로 지루하지 않게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비꼴 수 있을 뿐 대안은 줄 수 없다.

비꼬기, 야유하기, 풍자하기, 말꼬리 잡기, 상대방이 쓴 말을 반대로 뒤집어서 되돌려주기, 얄팍한 주제, 상투적인 소재, 말초적인 웃음.. 조중동의 썩은 글이 늘 쓰는 수법이다. 이걸로 풍자할 수 있을 뿐 희망은 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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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열거한 방법을 모두 마스터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그건 아니다. 절대로 생각의 총량이 많지 않으면 안 된다.

영화를 보건, TV드라마를 보건, 만화를 보건, 소설을 읽건 한 편을 다 뗀 다음에 그 줄거리를 누군가에게 혹은 자기 자신에게 백번 쯤 반복하여 이야기 해 주는 방법을 썼다. 나중에는 그 전체과정을 암기할 정도가 되었다.

이야기하다 보면 작가의 숨겨진 의도가 드러난다. 영화를 볼 때 혹은 소설을 읽을 때는 몰랐던 부분이 내가 그 이야기의 줄거리를 타인에게 이야기해 줄 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글쓰기 훈련이다. 글 이전에 생각하기 훈련이다. 글은 그 고인 생각을 퍼내는 것에 불과하다. 생각이 먼저고 글은 나중이다. 생각이 쌓이고 쌓여서 둑이 넘치듯 터져나오지 않으면 쓸 수 없다.

모든 것은 커다란 의심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음에 큰 의혹이라는 씨앗을 심어두면 그 씨앗이 점점 자라서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글이라는 열매로 영글어가는 것이다.

반항심이 있어야 한다. 세상을 향한 싸움걸기의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세상 전부를 향해 원초적으로 크게 대립각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쌓인 것을 낱낱이 풀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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