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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2397 vote 0 2007.03.03 (11:46:54)

김민웅류 미국노 퇴치하자.
촘스키와 부시의 짜고치는 고스톱에 말려들 것인가?

김태식 기자의 연합뉴스 기사를 전문인용한다. 원문보기는 클릭


범람하는 촘스키 저서..그의 '미국주의'(서울=연합) 김태식 기자  

언어학 근처에라도 가 본 이들에게 노엄 촘스키(Avram Noam Chomsky)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다. 컴퓨터 공학 연구자들에도 촘스키는 익숙한 이름이다. 미국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촘스키는 메시아와 같다.

1928년생인 그의 현 직책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언어학 교수. 이른바 변형생성문법 이론을 통해 20세기 언어학 혁명을 주도했다는 그가 컴퓨터 업계에도 저명하게 된 까닭은 그의 언어학 이론이 컴퓨터 공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이런 그가 지금껏 발표한 글이 얼마나 되는지 제대로 파악하는 이는 드물다. 그만큼 그는 다작(多作)으로 유명하다. 미국은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그의 책이나 논문이 도대체 어느 정도 번역돼 있는지 정확한 통계조차 힘든 형국이다. 그의 단독 저서만 해도 매년 서너권씩 국내 출판가에 선보인다. 촘스키 '붐'이라기 보다는 이쯤이면 차라리 촘스키 '공해'라 부를 만하다.

한국이 국제저작권협약에 가입하기 전, 국내 언어학계에는 그의 언어학 관계 저서 다수가 무단 번역 출판된 데다, 90년대 이후에는 이른바 사회평론성 글들이 줄줄이 소개되고 있다. 언어학과는 관계가 먼 이런 촘스키의 글은 미국, 특히 미국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한다.

이런 성향을 통해 국내 지식인 사회가 왜 끊임없이 '촘스키'를 호명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그의 미국 비판을 국내에서는 '반미주의'와 동일시하기 때문이며, 나아가 이런 이해가 국내 지식인 사회, 특히 진보좌파계열의 구미에 맞기 때문일 것임은 누구나 알 수 있다.

하지만 촘스키의 트레이드 마크인 '미국 비판'은 과연 '반미주의'일까? 반미 성향 국내 지식인 사회의 욕망과는 달리, 촘스키가 말하는 미국비판은 그의 강렬한 '미국 사랑'의 다른 표현이라고 볼 수는 없을까?

촘스키와 같은 노골적인 미국 비판 성향으로 인해 국내 지식인 사회에서 열렬히 호응하는 미국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에 대한 박정신 숭실대 교수의 예리한 비판은 촘스키를 이해하는 첩경이 될 수 있다.

박 교수는 커밍스가 한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미국을 비판한다기 보다는, 미국사회를 비판하기 위해 한국을 이용한다고 본다. 나아가 그의 미국사회 비판은 그의 미국 사랑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어쩌면 촘스키는 가장 전형적인 '미국주의자'일 수 있다.

촘스키의 미국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무엇보다 그렇게 증오하는 것처럼 보이는 미국 국적을 포기할 움직임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그 곡절이야 무엇이건 촘스키 저서가 2월을 지났을 뿐인 올들어서만 벌써 2권이나 선보였다. 무정부주의 역사를 다룬 평론집 '촘스키의 아나키즘'(해토 펴냄)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황금나침반 펴냄)는 그의 저서가 또 출간됐다.

지난해 6월 미국에서 영어 원전이 선보인 이 책에서 촘스키는 미국을 '파탄국가'(Failed State)라고 규정하면서 미국이 정의와 민주주의라는 허울을 무기로 세계의 폭력을 확대재생산한다고 비판한다.

이번 책은 그의 미국 사랑을 절절히 드러낸다. 미국 '국민'과 미국 '정부'를 분리하려 한다. 미국 정부의 폭력에 미국 국민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말에 얼마나 동의할 수 있을까? 그런 정부를 택한 것은 다름 아닌 미국 국민이 아닌가? 나아가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미국 국민에게 돌아가지 않을까? 그가 미국의 맨얼굴을 보이려 하는 것처럼, 이젠 촘스키의 맨얼굴도 보려는 노력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528쪽. 1만4천500원. taeshik@yna.co.kr


필자가 사이비 반미주의자인 미국노 김민웅을 위시하여 프레시안 쓰레기들을 혐오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전에 말한 바 있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미국통이다. 미국통은 미국을 판매하여 먹고 사는 자들이다. 미국에서 일용할 양식을 조달하는 자들, 미국을 비판함으로써 결국 미국의 이익에 기여하는 자들.

일부 중국인들은 한국인에 대해 잘못 알고 있다고 한다. 한국인들은 모두 애국심이 투철하며 일본제품은 절대로 쓰지 않고 일본만화, 일본영화는 절대로 보지 않고 검소한 생활을 하는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무엇인가? 일부 중국 칼럼니스트들이 중국에 애국주의를 전파하기 위해 한국인을 이용하고 있다. 한국인의 애국심을 배우자는 식이다. 그들은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에 대한 허상을 심어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진중권은 독일을 팔고, 홍세화는 파리를 팔고, 박노자는 스웨덴을 판다. 그들은 항상 무언가를 판매한다. 그것은 허상이라는 상품이다.

미국을 파는 자들.. 반미로 팔든 친미로 팔든 결국 미국에 기여할 뿐이다. 반미는 하나의 포지셔닝일 뿐이며 그것도 상품성이 높은.. 장사 좀 되는 포지셔닝에 불과하다. 속지 말자.

어거지 반미를 버려라. 어거지 친미를 버려라. 우리가 스스로 완성된다면 외국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 남을 탓하기 앞서 우리 스스로가 자기 내부에서 주체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민족주의다.

80년대 신문의 칼럼들은.. 일제는 마무리가 꼼꼼한데 한국상품은 마무리가 안되며 -특히 한국일보 장명수칼럼- 등등 독일인은 질서를 잘 지키는데, 미국인 어떤데, 프랑스는 어떤데.. 본받아야 하지 않겠는가로 정형화 되어 있었다.

요즘은 조중동이 워낙 반노질에 바빠서 그런지 80년대식 계몽주의 칼럼을 찾아보기 어렵다. 박노자 혼자 철지난 계몽운동을 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더라만.

제발 우리 이제 눈 좀 뜨고 살자. 한 해에 400만명이 해외로 나가는 시대가 아닌가. 아직도 우리가 본받아 학습해야 할 좋은 나라가 어딘가에 있다는 말인가? 유치한 학습본능에서 탈피하자. 좀 어른스러워지자.

촘스키는 미국의 이익을 위해 한국을 이용한다. 쿠바를 이용하고 베네수엘라를 이용하고 북한을 이용한다. 미국인들은 한편으로는 부시를 앞장세워 못된 짓을 하고 한편으로는 촘스키를 앞장세워 그것을 바로잡으며 패권을 유지해간다.

미국인들이 외곬으로 부시짓을 계속한다면 몰락한다. 이건 오히려 좋은 소식이다. 그러나 그들은 다음 선거에서는 민주당에 투표하여 오류를 시정할 것이다. 미국인들은 뻔뻔스럽게도.. 오른손으로 지은 죄를 왼손이 모른체 하며 반성하지도 않고 몰락하지도 않고 그 길로 계속 가는 것이다.

결국 그러한 미국의 일시적 오류를 이용하려한 쿠바와 베네수엘라와 북한만 미국에 역이용된다. 두 개의 미국이 있다. 촘스키의 미국과 부시의 미국이다. 촘스키와 부시가 짜고치는 고스톱에 북한과 쿠바가 말려든 거다.

쿠바나 베네수엘라, 북한이 사는 확실한 방법은 미국으로부터 무관심해지는 것이다. 반미를 해도 망하고 친미를 해도 망한다. 반미하면 미운정이 들어서 망하고 친미하면 종속되어서 망한다.

어떤 식으로든 미국과 관계를 맺는 즉 불행시작이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무리하게 이용하려 하다가는 결코 행복해질 수가 없다.

이건 윤리학이 아니라 물리학이다. 국제사회의 지렛대 역할을 하려들면 결국 자신이 가장 많은 하중을 부담하게 된다.

지금 세계는 미국과 미국 아닌 것으로 재편되고 있다. 미국아닌 것들이 맞은편의 미국을 통제하기 위하여 북한과 쿠바와 베네수엘라를 지렛대의 받침점으로 이용하고 있다. 그들은 이용되고 버려진다.

무엇인가? 세계라는 하나의 생태계가 있다. 미국의 패권이 그 생태계의 균형을 파괴하고 있다. 이에 세계는 북한과 쿠바와 베네수엘라를 소모품으로 희생시켜 미국을 통제하려 한다.

결국 세계에 의해 미국은 통제된다. 미국은 조만간 오류를 시정한다. 그리고 틈이 나면 또다시 오류를 저지른다. 이런 패턴은 반복된다. 100년 후에도 미국은 오른손으로 뺨을 치고 왼손으로 어루만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친미도 반미도 아니고 탈미다. 미국의 신세를 지려는 즉 불행해진다. 미국에 대들려는 즉 불행해진다. 자신이 가는 길의 기준점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서 찾으려는 즉 불행해진다.

왜 타인의 모습을 기준으로 하여 자기를 결정하는가? 왜 남이 세운 줄 뒤에 가서 서려하는가? 반미의 줄에 서든 친미의 줄에 서든 미성숙할 뿐이다. 그저께가 3.1절이다. 진정한 독립의 길은 아직도 멀다.

미국을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해줄 이유가 없다. 그들을 인간으로 상대할 가치가 없다. 등산가는 험한 산길도 오르고 평탄한 능선길도 오른다. 등산가가 올라야할 암벽이 높다해서 그 암벽을 비난하던가?

그렇지 않다. 미국은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는 암초에 불과하다. 우리가 미국을 상대함에 있어서 바른 태도는 그들을 무생물로 보는 것이다. 길바닥의 돌에 발부리가 걸려 넘어진들 그 돌을 비난할 이유는 없다. 조심해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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