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태와 왕초, 테레사와 사비나]
최인호의 ‘고래사냥’에서 병태와 왕초 콤비를 예로 들 수 있다. 병태가 평면적인 캐릭터라면 왕초는 보다 입체적인 캐릭터라 하겠다.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등장하는 병태와 엄석대의 관계도 비슷하다. 왕초라면 또래집단의 골목대장이 아닌가. 그런 점에서 엄석대는 왕초다.
문제는 고래사냥의 왕초가 입체적인 인물인데 비해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는 초반에 입체적 인물인듯 하더니 도로 평면적 인물로 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 평면적 인물 - 사회규범의 관점. 선과 악의 이분법적 구도
● 입체적 인물 - 문제해결의 관점. 선과 악으로 논할 수 없다.
평면적 성격과 입체적 성격을 대비시키는 구도는 많은 소설에 등장한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사와 사비나 역시 병태와 왕초의 관계라 하겠다.
한 인간의 내면에 테레사와 사비나는 공존하고 있다. 테레사는 사비나의 감추어진 일면이고 사비나는 테레사의 감추어진 속마음이다. 단지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어느 기준에 맞추어 일관성을 유지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테레사 모드로 살아가는 공무원도 있고 사비나 모드로 살아가는 모험가도 있다. 그 중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배척해야 한다고 여긴다면 유치한 거다.
최인호의 ‘겨울나그네’에서는 병태와 왕초의 구도가 뒤집어진다. 어리버리 한민우가 병태이고 멋쟁이 박현태가 왕초인데.. 이상하게 꼬여서 막판에 박현태는 멋대가리 없는 범생이로 퇴행하고 있다.
이문열의 일그러진 영웅이 문학적 실패이듯 겨울나그네도 실패다. 그 실패 한번 참혹하다. 멋쟁이에서 찌질이로 퇴행한다. 문학성을 잃고 가치를 잃고 평범한 멜로드라마가 되어버렸다. 최인호는 조로한 거다.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
러시아 출신의 유태계 프랑스인 ‘로맹 가리’ 영원한 에뜨랑제, 전쟁영웅으로 외교관으로 소설가로 모든 것을 얻었지만 끝내 주류 프랑스인이 되지는 못하였던 사람. 재미있는 사람이다.
에밀 아자르라는 가명으로 ‘자기앞의 생’을 써서 일생동안 한 번 밖에 받을 수 없다는 공쿠르상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는 그 방법으로 프랑스 문단을 엿먹인 것이다. 비주류다운 삶의 방식.
‘자기 앞의 생’에서 보여지는 모모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입체적인 캐릭터다. 왕초라면 거지대장인데 모모는 거지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딱 맞는 왕초 캐릭터다.
모모는 창녀의 아들이고 고아이고 좀도둑이지만 동시에 천사이기도 하다. 사회규범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는 끊임없이 일탈을 저지르는 문제아지만 14살 꼬마 모모의 눈으로 보면 그는 누구보다도 더 사회적인 인간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를 연상할 수 있다. 소설의 화자인 ‘나’가 병태라면 조르바는 왕초다. 왕초 중에서도 산전수전공중전 다 겪은 베테랑 왕초다. 조르바는 선과 악의 기준으로 논할 수 없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에밀 아자르의 14살 모모는 조르바의 어린시절과도 같다. 모모는 한편으로 화엄경의 선재동자를 연상시킬 수도 있다. 카잔차키스의 조르바가 붓다의 다른 모습이라면 모모는 어린 성자라 하겠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자기앞의 생’을 읽은 독자들이 이해할 수 없는 소감들을 발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영화관객들이 김기덕 감독을 오해하는 것과 유사하다.
김기덕의 영화는 쾌감을 준다. 그의 영화를 본 사람은 한바탕 크게 웃게 된다. 거기에 시원한 카타르시스가 있다. 그런데 많은 관객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불쌍한 모모를 동정하여 눈물을 흘린다면 잘못이다. 첫페이지부터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고 말 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분은 제대로 읽은 것이다.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없이도 살 수 있나요?”
“그렇단다”
모모는 열네살이다. 작가는 아이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하밀 할아버지의 것이다. 모모를 동정해서 안 된다. 모모와 하밀 할아버지는 같기 때문이다. 일면만을 보고 판단하지 말라! 그래서 입체적인 캐릭터 아니겠는가.
[성장소설의 공식]
고래사냥은 남자의 첫경험을 은유한다. 세상 모르는 철부지 병태가 세상을 좀 아는 왕초를 만나 ‘딱지’를 떼고 인생을 깨닫는다. 여름방학이라는 짧은 시간에 일어나는 이야기지만 구도에서는 성장소설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어린이에게 세상은 온통 금지된 것들 투성이다. 어른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되어 있다. 단 책임져야 한다. 그렇다. 바로 이 지점이 평면에서 입체로 비약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 병태 - (소년) 금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
● 왕초 - (어른)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
모모는 세상에 맞서는 자기 논리를 가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논리를 넘어선다. “네가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한다 -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에서 “네가 어떻게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한다 -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로 발전한다.
세상이 모모를 어떻게 대접하더라도 모모는 모모 자신의 가치기준을 들이대고 모모 자신의 길을 가는 것이다. 모모는 그렇게 어른이 되어간다. 성장소설은 그 관점을, 그 판단기준을 얻어가는 과정을 묘사한다.
[이상의 날개]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일 것 같소. 위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인 듯싶소.”
왜 이상은 19세기를 봉쇄하여 버리라고 했을까? 병태의 19세기에서 왕초의 20세기로 비약해 보기다. 근대주의의 19세기는 통째로 미성년자다. 위고든 도스토예프스키든.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상채기도 머지 않아 완치될 줄 믿소. 감정은 어떤 '포우즈'.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날개의 서문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어야 할것인가를 설명한다. 날개에는 두 명의 나가 등장한다. 하나는 객관화 된 병태의 나, 하나는 주관적인 왕초의 나다. 전자는 19세기의 나, 후자는 20세기의 나다.
이상의 날개의 묘미는 주관적인 작가 개인의 심리를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객관화 시켜서 이야기 한다는데 있다. 그래서 날개에는 화자와 숨은 화자가 있다.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 - 박제는 병태고 천재는 왕초다. 천재는 작가 자신이고 박제는 작중의 주인공 ‘나’다.
이상은 병태의 입을 빌어 바보인 척 하지만 ‘그 33번지라는 것이 구조가 흡사 유곽이라는 느낌이 없지 않다.’고 까발기고 있다. 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작가(숨은 화자)는 끊임없이 소설에 개입하고 있다.
에밀 아자르는 모모의 입을 빌어 인생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던지고 하밀 할아버지의 입을 빌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내어놓는다. 그 점에서 모모와 하밀 할아버지는 동일인이다.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 인생의 한 단면을 칼로 싹둑 잘라낸다. 잘라낸 부분으로 인생 그 전체를 설명한다. 그것은 어떤 포우즈,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 이르기까지 고도화 할 때 -관점의 이동- 병태는 왕초로 돌아온다.
‘여왕봉과 미망인’ - 남자는 여자에게 성가신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녀는 감기약 아스피린이 아닌 수면제 아다링을 주는 것이다. 그럴 때 감정의 포우즈는 부동자세로 고도화 된다.
그리고 ‘날자. 다시한번 날아보자꾸나.’ 미망인이고 싶은 아내를 성가시게 하지 않고 온전히 자유를 줄 때 비로소 나는 자유를 얻는다.
그것은 게임이다. 다 알면서도 모른척 하기 게임, 장지를 격한 저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다 알면서도 모른척 하기. 왕초이면서 병태인척 하기. 왜? 그것이 안해를 편하게 하니까. 역시 입체적인 캐릭터다.
[누가 조르바를 동정하는가?]
늙고 재산도 없고 아내도 없고 가족도 없는 가엾은 떠돌이 그리이스인 조르바를 동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는 카잔차키스가 발견한 붓다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깨달음이 있기 때문이다.
고아이고 창녀의 아들이고 좀도둑인 모모를 동정해서 안 된다. 왜나하면 모모는 성자이기 때문이다. 모모에게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조르바 혹은 모모는 ‘깨달음’ 혹은 ‘사랑’ 그 자체를 의인화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가장 낮은 곳에서.. 유태인 로자 아줌마와 아랍인 모모와 세네갈 권투챔피언 롤라 아줌마와 흑인과 창녀들과 그 거리의 경찰들 사이에서 그 모든 것을 구원하고 있다.
모모의 입체적인 여러 모습들은 ‘사랑’이라는 것의 여러 모습과 같다. 그러므로 모모를 동정한다는 것은 사랑 그 자체를 동정한다는 것과 같다.
조르바의 입체적인 여러 모습들은 깨달음이라는 것의 여러 모습과 같다. 조르바를 동정한다는 것은 붓다를 동정하는 것과 같다. 당혹스러울 뿐이다.
왜 모모는 입체적인 캐릭터이어야 하는가? 사랑은 본래 입체적이기 때문이다. 왜 조르바는 입체적인 캐릭터이어야 하는가? 깨달음은 본래 입체적이기 때문이다. 평면의 사랑, 평면의 깨달음이라면 온전하지 않다.
‘그런데 왜 모모 앞에 있는 생은 행복한가?’ ‘모모는 철부지’라는 김만준의 노래 가사처럼 모모는 행복하다. - 미하엘 엔데의 ‘모모’로 생각되기 쉬운데 실제로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을 소재로 삼았다고 한다. -
이 노래를 작사한 김만준은 ‘자기앞의 생’의 의미를 정확하게 읽었다. 모모는 한시도 불행하지 않았다. ‘인간은 사랑없이 살 수 없다’는 자기 논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온전히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한국문학의 실패.. 이문열, 최인호, 신경숙, 은희경, 박경리, 황석영, 조정래의 실패는 평면적인 캐릭터의 한계다.
한국문학.. 평면적인 성격, 평면적인 인물, 평면적인 결말. 선과 악의 뻔한 대립구도.. 거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입체적이라는 것은 한 인간의 내면에 여러 가지 모습들이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변할 수 있고 마침내 소통할 수 있는 것이다.
문학은 결국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다. 인간을 탐구했다면 그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보고서를 내놔야 한다. 그것은 평면에서 입체, 그리고 입체에서 미학으로의 비약이어야 한다.
● 평면적인 병태 - 사회규범의 관점에서 선과 악의 대립구도.
● 입체적인 왕초 - 문제해결의 관점에서 고수와 하수의 대결구도.
● 미학적인 모모 - 소통의 관점에서 새로운 가치기준의 제시.
인간을 탐구한다는 것은 결국 그 인간의 사랑을 탐구한다는 것이다. 사랑을 탐구한다는 것은 곧 욕망을 탐구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결코 평면의 구조를 하고있지 않다. 인간의 사랑은 결코 평면의 구조를 하고 있지 않다.
욕망이 평면이 아니므로 인격도 평면이 아니어야 한다. 사랑이 평면이 아니므로 소설이 제시하는 미학적 가치기준도 평면의 구조가 아니어야 한다. 그러므로 테레사와 사비나는 분리될 수 없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이들이 미국소설을 버리고 일본소설을 읽는 이유는 일본소설이 그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미국소설은? 썩었다. 미국인이 문학을 한다는 것은.. 성립되지 않는다.
일본소설 역시 문제가 있다. 최근 일본소설이나 드라마는 대개 오타쿠족, 장애인, 정신이상자, 소외된 자 등 각종 마이너리티와 사회의 주류질서 사이에서의 소통을 이야기하는 경향이 있다.
오타쿠족이나 정신이상자나 장애인이나 뭔가 눈에 보이는 물리적 결함이 있는 등장인물을 내세우지 않으면 이야기를 못하는 듯한.. 소통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 수준이 높은 점이 있지만.. 그래도 유치하다.
소통을 이야기한다는 구실로 사회와 단절하고 고립된 채 은둔하는 마이너리티를 ‘세상밖으로’ 끌어내는 그런 작위적인 설정이 유치하다.
소통하려 한다는 것은 역으로 단절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절되어 있으므로 남의 일에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다. 개입하지 않으므로 울지 않는다. 그래서 일본소설은 쿨하다. 그것이 일본소설이 한국독자를 흡인하는 이유다.
한국소설은? 개입한다. 마찰한다. 그리고 엉엉 운다. 통곡한다. 매달린다. 그래서 찌질하다. 전혀 쿨하지 않다. 그러므로 독자들이 외면한다.
그러나 일본 소설의 한계가 있다. 주류 질서와 마이너리티를 대비한다는 것은 테레사가 곧 사비나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다. 모모가 하밀 할아버지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다. 병태와 왕초가 내 안에서 끊임없이 갈등하며 공존하는 두가지 인격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모른다.
‘자기앞의 생’에서 사회의 주류질서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랍인과 유태인과 흑인과 창녀와 동성애자와 할아버지와 소년과 환자가 공존하는 모모의 낡아빠진 7층 아파트에 교양있는 프랑스인은 얼굴도 내밀지 못한다.
모모는 ‘창녀’ 아이샤의 아들이지만 모모는 아이샤라는 이름이 예쁘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한다. ‘창녀’라는 표현은 교양있는 프랑스인의 관점일 뿐이다. 흑인과 유태인과 아랍인이 모여사는 모모의 7층짜리 아파트에서 창녀는 그저 몸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일 뿐이다.
막노동을 하든 농사를 짓든 물고기를 잡든 도둑질을 하든 몸으로 벌어먹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물론 롤라 아줌마처럼 남자이면서도 호르몬 주사를 맞고 숲에서 엉덩이로 벌어먹는 방법은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죽을 맛이라는 충고가 따르긴 하지만.
거기에는 창녀를 타락한 자로 보는 계급의 관점이 없다. 편견이 없다. 그런데도 독자들은 편견을 가지고 본다. 그래서 모모를 동정한다. 잘못이다.
● 이문열의 실패 - 주류질서가 비주류인 마이너리티를 응징.
● 일본소설의 한계 - 주류와 비주류를 대비시키며 단절과 소통을 묘사.
● 에밀 아자르의 성공 - 비주류 안에서 독립적인 미학의 완성.
이문열의 일그러진 영웅이 문학적인 의미에서 참혹한 실패가 되는 이유는 엄석대와 병태 사이에 제도권의 룰이 끼어들어 작위적으로 판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담임선생님과 시험문제와 교도소는 그 이야기에 끼어들어서 안 된다. (모모는 경찰과 의사를 완벽하게 따돌렸다.)
문학은 나만의 새로운 가치기준을 발굴하고 제시하기다. 기성사회의 가치와 룰이 문학인이 새로이 발굴하여 제시하려는 가치기준을 억압한다면 문학의 설 자리는 없다. 이문열 현상은 문학의 자기부정이다.
문학의 본질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허용된 자유와 사랑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문인이 스스로 선발대가 되어 탐색하고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방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사막까지 정글까지 나아가 모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삶의 외쿠메네, 자유의 외쿠메네, 사랑의 외쿠메네를 넓혀가기.. 그것이 문학인의 본분이다. 모모가 그러하고 조르바가 그러하듯이.
[이문열들의 문제]
화가는 초상화를 그리되 실물과 다르게 그린다. 이때 사회의 규범이라는 판정관이 끼어들어 ‘이건 실물과 다르잖아’ 하고 항의하지 말아야 한다. 실물과 같아야 한다면 사진을 찍을 일이지 그림을 그릴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고흐와 이중섭과 피카소는 실물과 똑같이 그리지 않았다. 왜? 실물의 이면에 숨겨진 메타포를 찾아내야 했기 때문이다.
메타포란? 예컨대 내가 당신에게 ‘사랑이 뭐지?’ 하고 묻는다면.. 당신은 당신이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과 첫 키스를 나누었던 해변을 떠올릴 수도 있고 호숫가를 떠올릴 수도 있다.
바로 그것을 담아내야 한다. 당신이 ‘사랑’을 그리기로 했다면 고즈넉한 분위기의 저녁 호숫가를 그려야 하고 혹은 해 떠오르는 정동진 앞 바닷가를 그려햐 한다. 그것이 진정한 리얼리즘이다.
이상이 ‘테이프가 끊어지면 피가 나오’ 하는 것과 같다. 현실의 한 단면을 칼로 쪼개었을 때 진정한 모습이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당신이 그 어느 바닷가에서 연인과 첫 키스를 나누었다면 그것은 하나의 단면이다. 사랑이라는 커다란 동그라미의 쪼개어진 한 단면. 그렇게 쪼개어져 속살을 드러내었을 때 그것은 평면이 아닌 입체로 비약한다.
감정은 어떤 포우즈.. 평면에서 입체로의 비약. 하나의 단면을 칼로 잘라보이는 것, 메스를 들이대어 속을 헤집는 것. 그렇게 화가는 겉이 아니라 속을 그리는 것이다. 메타포를 품은 그것이 평면이 아닌 입체로의 비약이다.
공제 윤두서의 자상은 그림을 그리되 그 내면에 깃든 정신의 깊이까지 묘사하고 있다. 고흐 이전에는 서구에는 없었다. 그 정신까지 묘사하려 한 화가는. 고흐의 자화상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세계를 표면에 드러낸 것이다.
평면이 아닌 입체로 보는 것. 팩트가 아닌 메타포로 보는 것이다. 윤두서의 그림은 그래서 입체적이다. 고흐의 자화상은 입체적이다. 빨려드는 듯한 강렬한 눈빛. 감정의 어떤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한 모습.
테레사와 사비나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제압하지 못한다. 둘은 그대로 평행선을 그린다. 병태와 왕초는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제압하지 못한다. 왕초없는 병태는 실패다. 병태없는 왕초도 실패다. 그러므로 평면이 아닌 입체다.
이문열의 소설이 쓰레기인 이유는 ‘병태 승, 왕초 패’로 판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소설에는 왕초가 등장한다. 왕초는 컨닝으로 반장이 된 사기꾼이거나 자신이 황제라고 믿는 정신병자거나 혹은 사이비교주다.
이문열의 병태는 왕초를 추종하지만 얼마 안가서 왕초가 사이비라는 사실을 깨닫고 왕초를 죽인다. 왜 이문열은 왕초를 처형하지 못해서 안달일까?
왜 이문열은 모모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왜 이문열은 조르바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것일까? ‘호모 엑세쿠탄스’.. 이문열, 그렇게도 모모를, 조르바를 죽이고 싶었나? 왜 무엇 때문에?
순진한 어리버리 병태가 세상을 다 아는 척.. 왕초같은 운동권 형들 따라다니다가 혼줄이 나고 마침내 정신차려서 왕초를 물리친다는 설정이 이문열 소설의 뻔한 공식이다. 그 평면적인 구조의 단순함이라니. 창피하다.
단지 ‘운동권 선배’라고 노골적으로 말하지 않고 황제니 혹은 교주니 영웅이니 하고 에둘러 표현할 뿐이다.
[일본소설의 한계]
일본소설이 확실히 수준이 높지만 미학적인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다. 그들은 과감하게 쪼개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테레사와 사비나를 떼어 놓는다. 이문열이 민요섭과 조동팔을 떼어놓듯이.
고흐와 윤두서는 구상과 추상을, 표면과 이면을 겹쳐놓았는데도 말이다. 표면의 팩트와 이면에서의 메타포를 겹쳐놓는 것.. 그것이 입체적인 캐릭터이다. 그것이 문학의 본질이다.
일본소설에서 테레사와 병태는 번화한 도시에 살고 사비나와 왕초는 오타쿠족처럼 홀로 골방에 숨어서 산다. 이건 전도된 거다. 최인호의 겨울나그네처럼 병태와 왕초의 역할이 바뀌어 있다.
일본소설에서 병태와 왕초, 테레사와 사비나는 소통한다. 서로의 영역에 개입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본다. 그래서 쿨하다. 그러나 끝내 테레사가 사비나였음을 알아채지는 못한다. 주류와 비주류, 집단과 개인이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는 평면적 구도를 온전히 극복하지는 못한다.
일본문학은 개인주의가 약하다. 자유주의가 약하다. 그래서 줏대가 없다. 쿨해보이지만 썰렁하다. 모모처럼 조르바처럼 과감하게 치고나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차단된 벽 앞에서 울고있다. 그 사랑의 밀도는 낮다.
무엇인가? 일본소설의 모모들은 하밀 할아버지의 부끄러워 하는 눈빛으로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어’에서 끝나버리는 것이다. 작가는 그 지점에서 넘어진 거다. 포기한 것이다. ‘왜 포기하는가?’
모모가 포기하지 않았듯이 끝끝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한국소설의 실패]
겨울나그네의 한민우는 제 안에 숨은 사랑의 백프로를 끌어내지 못했다. 그는 망설이고 뒷걸음질 친다. 박현태 역시 인간의 본질을 보여주지 못했다. 내 손에 든 사랑을 지키기 위해 조바심 내며 빌빌거렸다. 쫄았다.
모모와 조르바가 쉽게 넘어가버린 금을 그들은 왜 과감하게 넘어가지 못했을까? 아랍에서 온 이방인 꼬마 모모가 거짓말로 프랑스인과 그들의 법질서를 따돌리고 로자 아줌마를 유태인의 지하묘지로 이끌었는데 왜 최인호는 그리하지 못하였을까?
이문열과 최인호들은 사회의 규범이 인간의 사랑 위에 있다고 말한다. 선량한 병태를 운동권 선배인 왕초가 꼬셔서 데리고 다니며 버려놓았다고 말한다.
세상이라는 틀에 적응할 것이냐 아니면 그 틀에 맞설 것이냐 아니면 이를 초월하여 자기만의 새로운 가치기준을 제시할 것이냐다. 그것이 수준이다. 문제는 수준이다. 한국소설은 수준이 낮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녀는 무척 아름다웠던 것 같다. 아름답다는 것은 우리가 누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다.”
모모는 ‘아름답다’는 말의 의미를 다르게 풀어낸다. 못생긴 뚱보 로자아줌마를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인가? 자기 자신의 가치기준을 들이대기다. 세상에서 먹어준다는 기준을 무시해 버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있어야 한다. 당신에게는 그 가치기준이 있는가? 바로 그것을 얻지 않으면 세상의 진짜 모습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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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말하고 있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그리고 또 말한다.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 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바로 그 지점이 당신과 내가 칼날처럼 스쳐가는 한 순간이다. 베어넘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