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실에 쓴 글입니다.)
여기서 예의 차려봤자 도무지 소용이 없다. 그런거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건 말이 통하느냐다. 대화가 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그 부분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미학으로 판단한다. 깨달음은 미학이다. 미학적 소양이 보이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왜 미학이어야 하는가? 이곳은 질서가 없는 곳이다. 기존의 질서를 존중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어떤 식으로 말하든 자유다.
그러나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제거된다. 미학은 질서가 없는 곳에서 질서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그 질서의 씨앗은 자기 내부에서 가져와야 한다.
기존의 질서-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에 순응해도 좋지 않다. 굳이 마찰하며 내 스타일을 고집해도 좋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든 현장에서 게임의 룰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상대에 따라 눈높이가 다를 수 있다.
좀 아닌 애들은 조낸 패주는 방법으로 다스리고.. 좀 아는 이들은 멍석을 깔아주는 방법으로 대접하는 것이다.
미학과 지식은 어떻게 다른가? 예컨대.. ‘저는 대패질을 못하지만 벽돌은 찍을 수 있는데요’.. 이 양반 고용된다.
반대로.. ‘저는 벽돌은 못찍어도 대패질 하나는 할 수 있는데요.’ 이 양반 역시 취업한다. 그런데 말이다.
‘저는 소설은 못 써도 글자는 매우 잘 쓰는데요.’ 이 양반 짤린다. 집은 못지어도 대패질이나 벽돌일로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못 쓰는데 글자는 이외수 만큼 쓸줄 안다는 양반 소설 못 쓴다. 즉 예술에 있어서는 부분적인 기여를 안쳐주는 것이다.
그것은 귀납과 연역의 차이다. 깨달음은 연역이다. 연역은 자동차를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하는 것이다.
자동차를 조립하는 데는 부분적인 기여가 인정받는다. 문짝만 잘 달아도 고용이 되고 나사만 잘 조여도 취업이 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데는 부분적인 기여가 인정되지 않는다. ‘저는 핸들은 못잡아도 브레이크 하나는 끝내주게 잘 밟는데요’.. 이 양반 면허취소다.
예술은 연역이고 미학은 연역이다. 운전은 연역이다. 깨달음은 연역이다. 연역은 전체과정을 동시에 통일하는 것이다.
학문적 지식은 귀납이다. 부분적 지식이라도 쳐준다. 인식에는 지각, 수용, 분석, 종합, 응용의 단계들이 있고 이 중 하나만 알아도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은 연역이다. 전체과정을 꿰뚫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 ‘스케치는 못해도 잉크칠은 할 수 있는데요’.. 이 양반 화가가 못된다.
내가 보는 것은 현장에서 즉시 룰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이다. 그 룰은 정해져 있지 않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원래 이런 룰이 정해져 있다. 이 룰대로 가야한다’고 우기는 사람은 안쳐준다. 그런 사람은 미학이 없는 사람이다.
여기서 예의 차려봤자 도무지 소용이 없다. 그런거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건 말이 통하느냐다. 대화가 되는가 혹은 그렇지 않은가.
그 부분은 무엇으로 판단하는가? 미학으로 판단한다. 깨달음은 미학이다. 미학적 소양이 보이지 않으면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왜 미학이어야 하는가? 이곳은 질서가 없는 곳이다. 기존의 질서를 존중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어떤 식으로 말하든 자유다.
그러나 대화가 통하지 않으면 제거된다. 미학은 질서가 없는 곳에서 질서를 이끌어내는 능력이다. 그 질서의 씨앗은 자기 내부에서 가져와야 한다.
기존의 질서-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에 순응해도 좋지 않다. 굳이 마찰하며 내 스타일을 고집해도 좋지 않다.
어떤 상황에서든 현장에서 게임의 룰을 만들어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상대에 따라 눈높이가 다를 수 있다.
좀 아닌 애들은 조낸 패주는 방법으로 다스리고.. 좀 아는 이들은 멍석을 깔아주는 방법으로 대접하는 것이다.
미학과 지식은 어떻게 다른가? 예컨대.. ‘저는 대패질을 못하지만 벽돌은 찍을 수 있는데요’.. 이 양반 고용된다.
반대로.. ‘저는 벽돌은 못찍어도 대패질 하나는 할 수 있는데요.’ 이 양반 역시 취업한다. 그런데 말이다.
‘저는 소설은 못 써도 글자는 매우 잘 쓰는데요.’ 이 양반 짤린다. 집은 못지어도 대패질이나 벽돌일로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소설은 못 쓰는데 글자는 이외수 만큼 쓸줄 안다는 양반 소설 못 쓴다. 즉 예술에 있어서는 부분적인 기여를 안쳐주는 것이다.
그것은 귀납과 연역의 차이다. 깨달음은 연역이다. 연역은 자동차를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운전하는 것이다.
자동차를 조립하는 데는 부분적인 기여가 인정받는다. 문짝만 잘 달아도 고용이 되고 나사만 잘 조여도 취업이 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데는 부분적인 기여가 인정되지 않는다. ‘저는 핸들은 못잡아도 브레이크 하나는 끝내주게 잘 밟는데요’.. 이 양반 면허취소다.
예술은 연역이고 미학은 연역이다. 운전은 연역이다. 깨달음은 연역이다. 연역은 전체과정을 동시에 통일하는 것이다.
학문적 지식은 귀납이다. 부분적 지식이라도 쳐준다. 인식에는 지각, 수용, 분석, 종합, 응용의 단계들이 있고 이 중 하나만 알아도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깨달음은 연역이다. 전체과정을 꿰뚫지 않으면 참여할 수 없다. ‘스케치는 못해도 잉크칠은 할 수 있는데요’.. 이 양반 화가가 못된다.
내가 보는 것은 현장에서 즉시 룰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이다. 그 룰은 정해져 있지 않다. 상대가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원래 이런 룰이 정해져 있다. 이 룰대로 가야한다’고 우기는 사람은 안쳐준다. 그런 사람은 미학이 없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