된장녀니 고추장남이나 하는 소리들은 정말 마뜩치 않은 것이다. 더운 여름에 짜증을 더한다. 세상에 들이댈걸 들이대야지.. 막강 한류녀 앞에서 감히 된장녀 따위를 들이댄다는 말인가?
인민일보 등에 의하면 한류녀 사태는 된장녀 찜쪄 먹고도 남음이 있다고 한다. 하루종일 한류잡지나 읽어대고 주야장창 인터넷에서 한국 배우 사진이나 다운받는 것으로 소일하는 머저리들 말이다.
도대체 중국 시골 촌구석에 사는 사람이 서울 한복판에 사는 한국 젊은이들보다 한국 연예인에 대해 빠싹하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가. 한류스타 추종한다고 거기서 쌀이 나오나 밥이 나오나.
그게 다 어러버리 촌닭의 서푼짜리 허영심이 아니겠는가. 한심 바가지 짓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고 할 일이 없어 죽겠다면 그 시간에 공부나 해라. 멍청한 한류녀들아 이런 거다.
그러나 한류녀 이전에 왜색남 왜색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 것이 좋겠다. 시계바늘을 10년 20년 되돌려 보라. 어쩌다가 일제 샤프연필이라도 하나 구하면 ‘이거 울 삼촌이 일본에 출장가서 구해온 일제인데’ 하고 자랑하던 바로 당신 말이다. 바로 당신이 문제야 인간아.
세상에서 제일 한심한 것이 모냐믄.. TV방송에서 가끔씩 왜색추방한다고 떠들던 것.. 양담배 비판하는 것 그리고 대마초 연애인 씹는 거다. 그런 장면을 볼 때 정말이지 조낸 패주고 싶다.
약자에게 강한 것.. 사소한 일에만 분노하는 것.. 정작 쳐죽여야 할 전두환 노태우는 못 건드리고 엉뚱한데 화풀이 하는 짓. 그거 처참하다.
만만한게 연예인, 만만한게 양담배, 만만한게 왜색.. 만만한게 대마초.. 만만한게 유영철, 만만한게 지충호.. 만만한게 김정일..
그렇다. 이건 수준 문제다. A, B, C, D, E가 있다. 수구꼴통에게는 김정일이 만만하고 유영철이 만만하고 지충호가 만만하다. 그건 D가 E를 씹는거다. 황까가 황빠와 치고받는 것은 C와 D가 다투는 거다.
진정한 리더는 대중과는 싸우지 않는다. 대중은 바다와도 같고 태산과도 같다. 파도가 일면 그 파도가 진정되기를 기다리는 것은 리더의 지혜다. 산이 높다고 투덜댄다면 등반가의 자격이 없는 거다.
왜색남 왜색녀를 비난하고, 한류녀를 비난하고, 된장녀를 비난하고, 황빠를 비난하고, 월드컵 길거리 응원을 비난하고 아무 생각없이 괴물을 보는 관객을 비난하는 것은 대중을 비난하는 것이다.
그것은 축구골대와 싸우는 격이다. 배를 산으로 모는 짓이요 답이 없는 것이다. 대중이 움직이는 것은 토대가 주어졌을 때 한정된다. 2002년의 싸움은 인터넷이라는 신무기 덕분이었다. 토대의 변화가 대중을 움직인 것이다.
2006년의 싸움은 힘들 것이다. 1차대전에 써먹은 기관총으로 2차대전을 이기겠다면 망상이다. 인터넷 다음의 신무기를 개발하지 않으면 우리는 대중을 통제할 수 없다. 우리는 대중을 이끌 수 없다.
대중을 가르쳐서 위로 끌어올리는 수는 없다. 대중에게 무기를 쥐어주는 방법으로만이 대중을 끌어올릴 수 있다. 그 무기는 신무기여야 한다. 전통적으로 그 무기는 신문과 방송, 영화와 인터넷이었다.
대중매체가 등장했을 때 비로소 대중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청동으로 싸울 때는 귀족만이 전사가 될 수 있었다. 철기가 보급되자 대중이 전투에 주도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항상 그렇다. 대중은 교육과 계몽이 아니라 신무기에 의해서만 움직이며 현대사회에서 그 신무기는 대중매체다. 대중의 손에 무기를 쥐어주지 않은 채로 대중을 훈화하려는 꼴통짓을 버려야 한다.
그러므로 몰래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다운받아보고 일본노래나 흥얼거리는 왜색남 왜색녀를 꾸짖지 않는다. 그것은 꾸짖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때 그시절 그 왜색남 왜색녀들이 한국문화의 수준을 상승시켰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7인의 사무라이는 서부영화의 관습을 충실하게 베끼고 있다. 그러나 그 20년 후에는 헐리우드의 감독들이 구로자와의 수법을 베끼고 있다. 그 이전에 7인의 사무라이가 모여드는 방식은 수호지의 수법을 베낀 것이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사무라이 영화는 서부극의 총을 칼로 바꾼 것에 다름 아니다. 베낀 것이다. 오션스 일레븐에서 11명이 모이는 방식은 7인의 사무라이가 모이는 것과 같고 7인의 사무라이가 모이는 방식은 수호지의 도둑들이 양산박에 모여드는 것과 같다.
수호지에는 선과 악의 대립이 없다. 주인공이 기본적으로 악당들이기 때문이다. 수호지의 기본은 선과 악의 대결을 고수와 하수의 대결로 치환한 것이다.
이 패턴이 일본에서 요짐보가 되고 이태리에서 황야의 무법자가 되더니 마카로니웨스턴이 뜬 것이다. 그렇게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고수와 하수의 치환법이 한국영화의 흥성기를 연 것이다.
뜨는 한국영화는 대부분 고수가 등장한다. 고수는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고 종횡무진으로 치닫는다. 그 시초는 주유소 습격사건이었다. 주인공은 악당이다. 이는 서부영화의 무법자와 비슷하다.
그렇듯 순환한다.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오는 것이다. 그때 그시절 양담배나 피우고 일제물건이나 찾고 일본노래나 흥얼거리고 숨어서 일본 애니메이션 보던 왜색남 왜색녀가 오늘날 한류붐을 만든 것이다.
지금 스타벅스를 찾는 된장녀는 그때 그시절 왜색남 왜색녀와 같다. 다른가? 그때 우리나라에 왜색남이 없었다면 지금 중국에 한류붐도 없다. 지금 스타벅스붐이 없다면 우리의 수준도 높아지지 않는다.
1500원 짜리 커피가 있는데 왜 5000원 짜리 스타벅스를 찾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나는 100원짜리 커피믹스로 충분한데 미쳤다고 1500원짜리 커피를 찾냐? 바보아냐?
100원짜리 커피믹스로 부족하면 300원짜리 자판기 커피도 있다. 그보다 더 싼 숭늉도 있다. 아니 냉수만 마셔도 정신을 차릴 수 있다. 1500원이나 5000원이나 오십보 백보인 것이다.
연암 박지원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박지원은 연경의 저자거리에서 큰 충격을 받았던 거다. 요술사들이 요지경이나 주마등 따위를 갖고나와서 교묘한 속임수를 쓰고 있었다.
작은 상자 안에 인형으로 도원경을 꾸며 놓고 행인을 유혹하고 있었는데 청나라 관헌들이 이를 보고도 수수방관 하였던 거다. 야바위도 있었던 모양인데 특히 조선인들이 공격대상이 되곤 했다.
요술사가 권하는 떡을 조선인이 집으면 그 안에 오물이 들어있는 식이다. 이를 지켜본 청나라 사람들이 박장대소 하였음은 물론이다. 연암은 크게 분개하여 청나라 대신들에게 따졌다.
거리의 요술사들이 대중을 현혹하며 온갖 속임수를 다 쓰고 있는데도 왜 이를 단속하지 않느냐고? 청나라 관리는 반론을 펼쳤고 박지원은 자신의 생각이 짧았음을 인정하였다.
그들을 단속해서 안 된다. 그것은 민중의 삶이다. 거기에 조정이 개입하여 인위적으로 유교질서를 강요하면 민중이 스스로 자기 내부에 질서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생명력과 역동성을 잃어버린다.
두 가지 질서가 있다. 지배계급을 위주로 하는 조정의 질서는 유교질서다. 반면 민중의 바다에는 또다른 질서가 있다. 그것은 도교주의에 가깝다. 그것은 민중의 소박한 재치와 해학을 허용하는 보다 다원적인 관용의 세계다.
민중이 스스로 우두머리를 정하고 내재적인 질서를 만들어가는 그 역동적인 과정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다. 중국이 중앙의 유교질서와 민중의 도교질서로 보다 다원화 된데 비하여 우리나라는 유교질서 하나로 획일화 되어 있다. 그 결과로 이 나라에 민중의 축제는 사라졌다. 민중의 삶은 억압되었다.
작은 나라에서 개인과 개인의 거리가 너무 밀착되어 있다. 좁은 바닥에서 서로 어깨를 부딪히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자신과 다른 가치관을 가진 다른 세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민중의 다양성과 발랄함과 그 생명력과 역동성을 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된장녀 현상이나 한류녀 현상이나 지난날의 왜색풍조 현상은 민중이 스스로 내적인 질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생겨나는 흐름이다.
그 바다에 파도가 없으면 바다가 아니다. 당연히 파도의 거칠음은 있어야 한다. 바다를 탓해서 안 된다. 민중을 탓해서 안 된다.
수준이 문제다. 수구꼴통은 D로 E를 탓하고 황까들은 C로 D를 탓하고 고추장남은 B로 C를 탓한다. 그러나 진정한 리더는 탓하지 않는다. 관용한다. 리더는 왜색풍조도 이용하고 한류도 이용하고 된장도 이용한다.
지식인이 좀 안다고 민중들의 발랄한 삶에 꾸지람의 고춧가루를 뿌리는 것, 좀 안다고 월드컵에서 응원하는 대중들의 축제에 끼어들어 초를 치는 것, 괴물의 흥행에 심술을 앓는 것 이건 정말이지 밥맛인 것이다.
진정 비판해야 할 대상은 대중이 아니다. 그들은 저 위에 있다. 지식인들이야말로 비판되어야 한다. 자칭 원로, 자칭 리더들이야말로 비판되어야 한다. 귀족들이야 말로 비판되어야 한다.
대중이 지멋대로 까불고 자랑하고 으스대며 나는 5000원짜리 된장이야 너는 1500원짜리 고추장이냐 하고 뻐기는 것은 흑선풍 이규와 화화승 노지심이 거리에서 내 배가 더 크다니 내가 술을 더 잘먹는다니 뻐기는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왜 거기서 귀여움을 발견하지 못하는가?
김민수 교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입을 닫은 비겁자 정운찬, 딴나라에 부역하고 있는 비겁자 김수환의 머저리 짓에 역겨움을 느끼지 않으면서 된장녀의 귀여운 짓에서 괴롬을 느낀다냐? 이건 아니다.
인간의 수준이 문제다. 리더는 대중을 탓하지 않는다. 선수는 골대를 탓하지 않는다. 언제나 그렇듯이 수준이 안되는 D가 E를 탓하고, 바닥의 C가 D를 탓하고 별볼일 없는 B가 C를 탓하는 것이다.
D급인 수구꼴통이 김정일, 유영철 지충호를 씹는 재미로 오늘 하루를 살아내고 C급인 황까들이 황빠 씹는 재미로 하루를 살아내고 B급 고추장남이 C급 된장녀를 씹는 재미로 하루를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괴물관객을 비난하고 월드컵 응원축제를 비난하고 애국질이 파시즘이니 어쩌니 하는 자들은 바다의 파도를 무서워 하는 풋내기 선장이며 산의 높음에 투덜거리는 풋내기 등산가인 즉 박노자 진중권류 B급 지식인인 것이다.
무질서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무질서야 말로 질서가 만들어지는 자궁이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한 것은 무질서에서 나왔다.
왜 한국은 안되는가? 무질서를 버렸기 때문에 안 된다. 왜 한국은 무질서를 버렸나? 중국에서 이미 검증된 완제품을 수입하는 지름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수호지와 일본의 사무라이 영화와 미국의 서부영화와 한국의 장길산은 본질이 같다. 한국의 조폭영화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무엇인가? 무질서의 자궁에서 질서의 옥동자가 탄생하는 과정을 노출시키기다.
서부는 거칠다. 무법천지다. 일본의 전국시대는 거칠다. 조폭들의 세계는 거칠다. 장길산의 무대는 거칠다. 수호지의 양산박은 거칠다. 그 거친 황야에서 질서가 움트는 것이다. 그 과정을 정밀하게 포착하지 않으면 안된다.
모든 진정한 것은 그곳에 있다. 거친 황야에 있고 거친 양산박에 있고 거친 전국시대에 있고 거친 장길산에 있고 거친 임꺽정에 있고 거친 조폭영화에 있고 막 깨어나고 있는 인터넷에 있다.
대양의 넓음과 파도의 높음과 거함의 사이즈는 비례한다. 큰 바다에 많은 된장녀와 한류녀와 왜색풍조가 넘실거린다. 큰 바다에 파도가 높으니 거함이 출항하는 것이며 위대한 선장이 그 모든 위험을 극복하고 마침내 키를 잡는 것이다.
좁쌀 마음의 B급 지식인들이여. 좁쌀 마음의 C급 황까들이여. 좁쌀 마음의 C급 고추장남들이여. 호연지기를 얻어라. 정상의 이미지를 품어라. 대양에 거함을 띄우라. 함대를 지휘하는 선장의 마음을 얻어라. 관용의 마음을 얻어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니들은 족제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