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白凡)이 당신의 아호를 백범으로 정한 뜻이 무엇이던가? 흰옷 입은 평범한 사람들이 모두 독립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오를 때 우리나라는 진정한 독립을 얻게 될 것이라는 깨우침을 던져주고자 하였던 것이다.
왜인가? 당시 무지한 농민들 입장에서..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되는 것은 한편으로 기회를 얻는 것이기도 했다. 어제의 머슴이 오늘은 방앗간이라도 운영하며 양복이라도 입고 행세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 농민이 교사에 군인으로 출세한 것은 일본의 식민통치 덕분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일제의 식민통치가 반길만한 것이기도 했다. 이런 식이라면 독립이 불가능하다. 선각자들의 외침이 민중들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래도 좌절할 필요는 없다. 그들 신분상승을 이룬 농민들은 곧 알게 된다. 노예에서 평민으로, 혹은 머슴에서 마름으로 약간 상승할 수 있었지만 더 이상 위로 치고 올라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좋아 보이던 일본인이 돌연 태도를 바꾼다. ‘식민지인의 한계는 거기까지’ 하고 목에 칼을 들이대는 시점이 있다. 그때 깨닫는다.
아주 바닥일 때는 수치를 모른다. 제복입은 일본 순사가 지배하든, 도포입은 조선 양반이 지배하던 수탈을 당하기는 매 한 가지다. 해방된 노예 입장에서는 양반들이 더 이상 행세를 못하게 된 사실이 고소하기만 하다.
그러나 한 계단 위로 올라서면 알게 된다. 그것이 수치라는 사실을. 높은 곳에 올라서면 시야가 넓어진다. 호연지기를 얻는다. 그제 깨닫는다. 그동안 괜히 겁먹고 쫄아 있었다는 사실을.
선생이 당신의 아호를 백범으로 정한 데는 그러한 깨달음이 자리하고 있었다. 혼자 가는 열 걸음으로 안 되고 함께 가는 한 걸음으로 세상이 바뀐다는 사실.
개화기 독립투사들은 소수의 선각자였다. 그들이 먼저 눈을 뜬 것이다. 농민들은 뒷짐지고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 농민들의 생각이 낱낱이 바뀌어야 진정 세상이 바뀐다.
민주화 이후 많은 것이 달라졌지만.. 아직 흰옷 입은 사람들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수치를 모른다. 박정희, 전두환의 존재가 치욕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그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한다.
어떤 방법으로 그들의 생각을 바꿀 수 있지? ‘박정희 알고보면 나쁜 놈이다’ 하고 방송을 하면 바뀔까? 아니다. 그런 식의 엘리트 위주 계몽주의의 한계가 드러난지는 오래 되었다. 이제는 주입식 계몽주의로 안 된다.
민중이 수치를 모르는 이유는.. 자부심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노무현 대통령이 공연히 부시형님의 심기를 건드려서 부시형님이 삐치면 안되는데 하는.. 바보 조선일보 같은 걱정을 하고 있다.
민중이 자부심을 가져야 수치를 알고, 수치를 알아야 상승하려는 마음을 갖고, 상승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독 오른 뱀처럼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삐죽하게 고개를 쳐들어야 멀리서도 보이고, 멀리서도 보여야 소통이 되고, 소통이 되어야 세상이 바뀐다.
민초들이 낱낱이 더 높은 가치를 바라보고, 더 근사한 꿈을 꾸고, 더 멋진 비전을 가져야 한다.
민중이 기가 살아야 한다. ‘어이쿠 부시형님’에서 ‘부시 이 좀만한 원숭이 새끼가’로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이 나라 민초들에게는 건방이 필요하다.
‘박정희가 그래도 밥은 먹여줬잖어. 그게 어딘데.’ 하는 이흥규 할아버지의 생각으로는 한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 자칭 주인이라는 자가 밥은 먹여줬다. 다 떨어진 우산도 줬다. 그러나 인간이 밥만 먹고 살 수는 없다.
밥만 먹고 살 수 있다는 인간도 있다. 그들이 조선일보를 본다. 그 숫자가 조중동 합쳐서 이 나라에 대략 600만이다. 그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아직도 멀다.
어떻게 하면 그들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 있을까? 간단하다. 이흥규 할아버지가 주인의 폭력 앞에서 탈출하지 못한 이유는 기가 죽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가 죽으면 딱 그렇게 된다.
족쇄를 채워놓지 않아도 스스로 보이지 않는 마음의 감옥에 갇혀 버린다. 기가 살아야 한다. 이 나라 민초들이 기가 살아서 우쭐하고 건방져야 세상이 밑에서부터 진짜로 확 바뀐다.
저 멀리 양반 도포자락만 봐도 쫄아서 골목으로 숨는 상놈근성, 왜놈 순사가 차고 다니는 칼끝만 봐도 쫄아서 울다가 울음을 그치는 어린아이 마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백범의 부친은 ‘존위’라는 상놈벼슬을 했는데.. 행패 부리는 양반 두들겨 패주는 것이 일이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관가로 끌려가서 경을 쳤는데 아는 이방과 사령들에게 몇푼 쥐어주고 겨우 풀려나곤 했다.
“아버지는 당신께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양반이나 강한 자들이 약한 자를 능멸하는 것을 볼 때면 참지 못하시고 '수호지'에 나오는 호걸들식으로 친불친을 막론하고 조낸 패주었다. 이렇게 아버지가 불같은 성정이신 줄을 알므로, 인근 상놈들은 두려워 공경하고 양반들은 무서워서 피하였다.”[백범일지]
양반의 서슬에 주눅들지 않고 꿋꿋이 맞서는 헌걸찬 기개가 있었던 것이다. 백범이 그러한 부친의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내가 노무현 대통령의 모습에서 느끼는 것도 그렇다. 주눅들지 않고 악착같이 달려든다.
줄기사태의 본질은 ‘한국인들 기 살려놓으면 안된다’는 사실에 이 나라의 모든 기득권들이 합의했다는 거다. 그 점에 있어서는 진보도 보수도 한겨레도 오마이도 조중동도 예외없이 일치단결 의기투합 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나의 결론은 ‘그래도 기죽을 거 없다’는 거다. 황우석이 문제를 일으켰지만 이에 대한 합당한 징벌은 향후 30년간 줄기세포 연구만 전념하게 하는 정도가 적당한 처분이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역사를 조금만 공부했다면 알 것이다. 유럽이 발전한 이유는 나라의 숫자가 많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실패한 사람은 프랑스에서 재기했고, 프랑스에서 실패한 사람은 미국에서 재기했고, 독일에서 실패한 사람은 러시아에서 재기했다.
중국에서는? 실패하면 갈 곳이 없다. 중국은 침체를 면하지 못했다. 조선에서는? 역시 실패하면 갈 곳이 없다. 조선 역시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소도(蘇塗)가 있어야 한다. 해방구가 있어야 한다. 피난처가 있어야 한다. 보호지가 있어야 한다. 한국은 바닥이 좁다. 이 나라에서는 한 번 찍히면 죽는다. 그걸로 끝이다. 재도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방법은 없는가? 있다. 유럽이 나라를 조각조각 쪼개어서 발전했듯이.. 우리 안에서도 의견이 다르면 다른 채로 ‘따로 또 같이’ 공존하는 지혜를 배우면 된다.
나는 내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의견이 다르면 다른대로 평행선을 그리고 가면 된다. 줄기세포 안할 사람은 안하면 되고 그래도 연구할 사람은 연구하면 된다. 각자의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
하여간 월드컵에서 한국이 또다시 4강이라도 가는 불상사가 일어날까봐 잠못이루는 진중권, 박노자들 많을 것이다. 저 우매한 것들 기 살아나면 안되는데 하고 걱정하는 자들 많이 있다.
한 알의 불씨가 요원의 들불을 일으키는 법. 나는 민초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버리고 싶다. 나는 그들의 거친 욕망이 활활 타오르기를 바란다. 물론 그들의 판단과 행동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옳고 그름을 떠나 우선하는 가치가 있다. 주저앉은 사람 일으켜 세우는게 먼저고 바른 길을 찾아가는 것은 나중이다. 황빠들 중에는 함부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도 있고 어문 데서 자기편끼리 싸우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들이 주저앉아 있지 않고 일어섰다는데 만족한다.
그들이 높으신 서울대를 코딱지로 보게 되었고, 높으신 검찰나리를 개 거시기로 보게 되었고, 높으신 새튼의 미국을 홍어 거시기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얻은 성과다.
민초는 풀과 같다. 기가 살아야 풀은 빳빳하게 일어난다. 기를 살려야 한다. 생기를 생생하게 살리고, 활기를 팔팔하게 살리고, 원기를 빳빳하게 살려야 한다. 민중은 어떤 상황에서 기가 살아나는가?
무엇 하나라도 제 힘으로 해서 성공시켜본 경험이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의존적인 생각에 빠져 ‘그래도 박정희가 밥은 먹여줬는데’ 이 따우 머저리 소리를 하는 것이다. 이흥규 할아버지 기운내야 한다.
줄기세포는 성과가 불명하지만 배반포로 한 번, 스너피로 한 번 우리는 세계의 끝까지 가봤다. 한 번 정상을 보고 온 것이다. 한 번이라도 정상을 보고 온 사람의 마음은 그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노무현으로 한 번 성공해 본 경험이 있다. 인터넷 정치로 세계의 첨단에 서 본 것이다. 이런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야 흰옷 입은 사람들의 생각이 바뀐다. 혼자 가는 열 걸음이 아니라 함께 가는 한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