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루스에 씌어진 유다복음 사본이 발견되었다.. 영지주의 입장에 충실한 것으로 보아 후대의 기술로 보여진다는데.. 이와 무관하게.. 영지주의적 태도가 역사적으로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 문제로 된다.
기독교 종파로서의 영지주의는 이단으로 몰려 사멸하고 있지만 기독교와 무관하게 영지주의적 태도는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영지주의가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초기 기독교의 역사는 영지주의와의 투쟁의 역사다. 교단의 논리와 체계와 시스템이 영지주의와의 싸움에서 얻어졌다. 역설이지만 영지주의가 초기 기독교 교단의 확립에 기여한 것이다.
논하려는 바는 영지주의가 초기 기독교를 단련시킨 사실과 마찬가지로..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짝퉁들의 난리부르스가.. 어떻게 민중으로 하여금 명품에 대한 갈증을 불러 일으켰느냐 하는 점이다.
민중은 소통의 터미널을 원한다
모든 문제는 지식인과 민중의 입장차이 때문에 일어난다. 지식인은 자기네가 생산하고 판매하는 지식과 정보가 그대로 가치를 지닌다고 착각하고 있지만 민중이 진짜로 원하는건 따로 있다.
민중은 소통을 원한다. 민중은 그 소통의 체계를 자기 내부에 확립하기를 원한다. 지식이나 정보는 소통체계의 확립에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이 차이를 알아야 한다. 모든 오해와 마찰이 이 지점에서 벌어지고 있다.
종교의 본질은 신뢰다. 곧 믿음이다. 그런데 무엇을 믿지? 기독교에서는 구원이라고 표현한다. 그런데 구원이 뭐지? 목사와 신부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변하느냐와 무관하게.. 신도들이 실질적으로 얻는 것이 존재한다.
미국으로 건너간 교포들은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 시달리고 있다. 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건설하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렇게 실질적으로 얻는 것이 있기 때문에 교회는 오늘도 존재한다.
목사와 신부가 신도들을 구원해주기 이전에 교포들은 교회를 건설하는 방법으로 자기 스스로를 구원하고 있다. 종교의 가치가 목사나 신부의 혀 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신도들의 참여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 의사소통 체계다. 우리는 언어와 문자로도 소통하지만 영적인 방법으로도 소통한다. 교포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결집하는 것은 미국이라는 낯선 대륙에서 의사소통의 문제가 절실하기 때문이다.
개척자들이 신대륙에 도착하여 맨 먼저 한 일은 교회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의사소통에 실패하면 곧 죽음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야 말로 그 모든 가치에 우선하는 절대선인 것이다.
종교 이외에도 의사소통 시스템은 존재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공동체다. 가족 공동체도 있고 향촌 공동체도 있고 민족과 국가도 있다. 인간은 공동체라는 동아리에 소속하는 방법으로 의사소통의 포지션을 확립한다.
소통을 위해서 언어와 문자, 지식과 정보가 소용된다. 여기에 하나가 더 추가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체험의 공유다. 체험의 공유를 제공하는 것은 공동체다. 가족과 회사에서도 조달하지만 종교를 통해서 그것을 얻을 수도 있다.
무엇인가? 언어와 문자 그리고 지식과 정보보다 체험의 공유가 더 많은 소통을 그리고 더 진실한 소통을, 더 밀도있는 소통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보다 더 좋은 소통의 방법은 없다. 종교를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믿음보다 지식과 정보가 더 우선한다고 여기는 자들 말이다. 비뚤어진 지식인들 중에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그들은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운전자는 자동차를 믿는다. 그 자동차는 길들여졌다. 마부는 말을 믿는다. 그 말은 길들여졌다. 주인은 사냥개을 믿는다. 그 개는 길들여졌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사랑의 현재진행 과정을 무시하는 것이다.
자동차를 좀 안다고 해서 곧 운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식과 정보라는 것은 현실에서 그다지 쓸모가 없다. 먼저 믿음이 자기 내부에 충만해져야 한다. 서로는 체험을 공유해야 한다. 서로는 길들여져야 한다.
지식이 우선이냐 소통이 우선이냐?
믿음이 우선이냐 지식이 우선이냐? 영지주의는 지식을 믿음 앞에 놓는다. 그 경우 종교의 가치는 사라진다. 믿음은 사라진다. 허무주의에 빠지고 만다. 지식이 우선이라면 공동체도 필요없고 교단도 필요없다.
강령도 교리도 필요없고 교부도 필요없고 교회도 필요없다. 주기도문도 사도신경도 예수도 십자가도 다 필요없다. 영지주의는 그렇게 불필요한 것을 하나씩 지워나간다. 결국은 종교도 필요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허무주의다.
위험한 착각에 빠진 자들이 있다. 먹물좌파가 그들이다. 지식이 있으면 믿음은 필요없다고 여긴다. 지식이 있으면 공동체도 필요없다고 여긴다. 가족도 친구도 사랑도 추억도 다 필요없게 된다.
민족도 필요없고 애국도 필요없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문제가 있으면 지식을 동원하여 문제를 해결하면 된다고 여긴다. 그런데 과연 지식으로 문제가 해결되나? 지식으로 해결될 것이면 황우석 사건은 진작에 해결되었다.
초기 기독교도들은 자신이 무엇을 신앙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영지주의 세력이 지식을 앞세워 믿음을 파괴하였다. 그런데 그 지식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오늘의 신문(新聞)이 내일은 구문(舊聞)이 된다.
지식과 정보의 생명력은 유한하다. 매일 새로이 업그레이드된 지식이 쏟아진다. 우리는 정보의 홍수에 파묻혀 정보의 질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진짜는 무엇인가? 의사소통이다. 소통을 위해서는 체험의 공유가 필요하다.
‘어떤 사실을 가지고 소통을 하느냐’ 아니면 ‘소통의 토대 위에 사실을 전개하느냐’다. 이 문제를 가지고 논쟁해 왔고 그 결과 기독교는 진화해 왔다. 버릴 것과 남길 것이 가려지고 이질적인 것이 추려졌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건설된 소통의 토대 위에 사실을 전개하는 것이 맞다. 먼저 그 소통의 토대를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내부에 믿음이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 내부에 사랑이 충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통과 이단은 무엇이 다른가?
오늘날 한국의 많은 기독교 교파들이나 사이비 교파들은 공통적으로 일정부분 영지주의적 태도에 기울어 있다. ‘뭣도 필요없고 뭣도 필요없다. 오직 이거 하나면 된다’고 말하고 다니는 자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그 만병통치약이라는 ‘이거 하나’는 대개 극단적인 사고다. ‘일체의 육류를 섭취하지 말라. 우유도 멸치도 먹지 말라’는 교파가 있는가 하면 ‘헌혈도 하지 말고 수혈도 말라’는 교파도 있다.
그들은 체험의 공유 그리고 의사소통이라는 종교의 본질을 도외시 한다. 그것은 리더가 사람들에게 언어와 문자의 시스템을 알려주지 않고 “내가 시킨대로만 하라”고 명령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대부분의 지식인들도 이런 식의 오류에 빠져있다. 황우석 파동도 그렇다. 지식인들은 ‘내가 정답을 딱 찔러줄테니 니들은 닥치고 있다가 내가 시킨대로만 하라’고 명령한다.
민중이 스스로 신뢰를 창출하고 체험의 공유를 쌓아가는 것을 두고보지 못한다. 설사 그 지식인들의 판단이 옳았다고 해도 그런 식이면 민중은 약해지고 만다. 자기 내부에 믿음과 사랑을 충전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기여는 인간을 강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과학의 시대인 지금은 종교 때문에 오히려 인간이 약해진 측면도 있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는 영지주의와 싸우는 과정에서 스스로 강해진 것이 사실이다.
지식인들의 문제는 ‘정보가 우선이냐 소통이 우선이냐’의 문제에서 정보를 소통에 우선한 결과 민중이 스스로 자기 내부에 의사소통의 터미널을 구축하지 못하게 하여 인간이 강해지지 않고 나약해 진다는데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글에서 인용할 수 있다.
“싱가포르에선 밤에 개가 짖으면 그 개의 성대를 잘라 버린다. 모든 자동차에는 시속 80킬로미터를 넘으면 귀가 먹먹할 정도로 소리를 내는 경적이 내장되어 있다. 국민들의 행로를 파악하기 위해 경찰은 자동차밑에 발신기를 부착하도록 강요하였다. 국민들의 이동상황을 대형 스크린 위에서 추적할수 있다. 절도, 강간, 마약복용, 뇌물수수에 대해서는 교수형이 내려진다. 태형도 여전히 행해지고 있다. 리콴유는 모든 국민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의 사상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영향을 동시에 받은 것이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효율에 있었다.싱가포르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일본 다음 가는 소득 수준을 누리고 있고 능력껏 사유재산을 늘릴수 있다.-가난한 대학생들에게 주거를 제공하는 등 부의 분배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신앙의 자유는 보장되지만 언론은 검열을 받는다. 신문에서 섹스나 정치를 논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1982년 리콴유는 남성우월주의에 기인한 낡은 습성이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수한 두뇌를 가진 남자들이 멍청하고 얼굴만 예쁜 여자들하고만 결혼하는 바람에 똑똑한 여자들이 신랑감을 구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그래서 리콴유는 학위를 가진 여자와 결혼하려는 사람에게는 장려금을 주고, 학위를 소지하는 여자가 아이를 둘 이상 낳을때에는 벌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문맹자에 대해서는 많은 돈을 주어가며 불임 수술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권장하였다. 리콴유는 한 가정에 자녀가 둘이 넘으면 교육을 제대로 시킬수 없다고 판단했다.경찰에선 자녀가 이미 둘 있는 가정에 밤마다 전화를 걸어, 피임약을 복용하거나 콘돔사용하는 것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쥐의 똥구멍을 꿰맨 여공] |
무엇인가? 리콴유는 시스템의 결함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패치를 남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MS가 하는 짓과 비슷하다. 그 경우 신뢰는 무너지고 만다. 인간은 약화되고 만다. 영지주의는 이와 같은 것이다.
지식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업데이트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끊임없는 감시와 명령과 통제와 튜닝과 미세조정이 필요하다. 매일매일 ‘윈도우즈를 업데이트 하시오’ 이런 것이 뜨면 짜증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종교의 가치는 소통을 정보에 우선하기다. 자기 내부에 체험과 사랑이 충만해서 업데이트를 안해줘도 된다. 패치가 남발될 이유가 없다. 개인이 스스로 사유하고 행동하고 결정할 폭이 커진다. 민중이 주체가 된다.
소통의 토대 위에 지식과 정보를 전개하는 것이 맞다. 먼저 그 토대를 구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것이 교단이고, 교리고, 강령이고, 십자가이고, 교회이고, 성당이고, 삼위일체고, 성경이고, 예수다.
유다와 예수는 친구인가?
영지주의 입장에서 보면 유다는 예수의 친구다. 종교를 떠나서 보면 실제로 그랬을 수 있다. 유다는 예수그룹에서 유일한 지식인이었다. 예수 입장에서 유다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둘은 죽이 맞는 친구였을 수 있다.
예수가 통찰력을 발휘하여 자신이 불가항력적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보고 이를 유다에게 말했을 수 있다. 예수를 지도자가 아닌 친구로 받아들였던 유다가 상황을 절망적으로 보고 예수를 희생시키기로 결정했을 수 있다.
처음부터 예수를 친구 정도로 만만하게 본 것이다. 그랬을 수 있다. 중요한건 여기에 종교가 설 자리가 없다는 거다. 영지주의가 과학을 하려면 몰라도 종교를 하려면 이런 식으로 가서는 안 된다.
종교의 본질은 의사소통에 있다. 소통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터미널이 확보되어야 한다. 믿음이 터미널의 역할을 한다. 터미널은 간선과 지선을 가진다. 예수가 정거장이면 사도들은 그 정거장으로 이어지는 도로다.
유다와 예수가 평등한 친구일 수는 없다. 예수도 그냥 평범한 목수아저씨였다거나 그럴 수 없다. 신에게도 믿는 신이 따로 있다거나 그런 식일 수 없다. 그런 식이라면 의사소통체계가 붕괴하고 마는 것이다.
문제는 영지주의 입장이 지식인들의 역할을 확대한다는데 있다. 믿음은 신도들 각자가 자기 내면에 키우는 것이다. 그 믿음을 부정하고 정보와 지식을 앞세운다면? 신도들은 자기 내면에 구축한 것이 없다.
그 경우 붕어가 밥알을 기다리듯, 월급쟁이가 월급봉투에 목을 매듯 신도들은 지식인에게 의존해야 한다. 정보와 지식은 해석되어야 하고 부단히 패치버전을 업데이트 해줘야 하기 때문이다. 딱 싱가포르처럼 되는 것이다.
● 지식이 믿음에 앞선다... 지식을 해석해주는 먹물의 역할이 확대된다. 리콴유는 모든 싱가포르인의 아버지로 군림하게 된다.
● 소통의 토대 위에 지식을 전개한다... 각자가 믿음이라는 터미널을 통해 필요한 것을 조달하므로 지식인의 역할은 축소된다. 리콴유는 없어도 된다.
사회의 소통체계를 파괴해놓고 붕어에게 밥알을 던져주듯 끊임없이 패치를 남발하며 민중이 지식계급에 의존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이런 식의 오류에 빠져 있다. 그 결과는 인간이 약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 영지주의적 오류에 빠졌던 마르크스 생각 - 상품이 먼저고 시장은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 옳은 생각 - 시장의 건설이 우선이다. 시장이라는 소통의 토대 위에 생산된 상품을 전개하는 것이다.
지식을 전파하기 위해 소통이 존재하느냐 아니면 소통의 토대를 먼저 건설하고 그 토대 위에 지식을 전개하느냐? 지식우선으로 보는 것이 영지주의적 태도에 빠진 먹물좌파들의 오류다.
친일파들의 변절사태
그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왜 갑자기 친일파로 돌아섰을까? 이 또한 영지주의의 오류 때문이다. 독립운동의 본질은 ‘일본인은 나쁘다’, ‘일본인이 한국인의 것을 약탈한다’는 따위의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다.
본질은 무엇인가? 당시 우리 내부에 질서가 없었고 의사소통의 체계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이다. 왜? 첫째 조선왕실이 망했고 둘째 양반사회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개화로 인하여 민중의 생산력이 양반사회의 지도를 무력화 시켰기 때문이다.
신기술 신지식이 도입되었다. 민중의 생산력은 날로 증가하였다. 그런데 이를 담보할 의사소통의 체계는 확립되어 있지 않았다. 상품은 있는데 시장이 없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냥 식민지로 있으면 안되느냐고? 당연히 안 된다. 일시적으로는 일본의 신기술이 일시적으로 조선시장에 신용을 증가시켰지만 언어가 다르고 문자가 다르고 체험이 다른 일본인들을 계속 신용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생산력이 증가했기 때문에 이를 담보하기 위하여 시장이 더 확대되어야 하는데 시장의 확대를 한국과 일본 사이의 언어, 문자, 체험, 역사, 전통, 문화, 관습의 차이가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이 독립하지 않는 한 한국은 미래가 없었던 것이다. 한국이 독립하지 않는 한 우리 스스로가 우리 자신을 신용하지 못하게 된다. 우리가 우리 안에 질서를 형성하지 못하는 것이다.
왜 독립운동가 이광수는 갑자기 친일파가 되었을까? 상품이 시장에 앞선다고 착각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중국을 치면 중국은 3등국가가 되고 조선은 2등국가로 한단계 올라선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노예에서 청지기로 일등급이 올라가는 것이다. 하여간 이광수의 논리는 이렇다.
● 중일전쟁 이전 - 일본은 나쁘다. 왜? 일본이 조선의 것을 약탈하기 때문이다.
● 중일전쟁 이후 - 일본은 좋다. 왜? 일본이 중국을 약탈하여 조선에도 궁물을 나눠주기 때문이다.
먹물좌파들의 비뚤어진 사고나 영지주의의 태도는 이광수의 생각과 비슷하다. 지식과 정보를 앞세우면 딱 이렇게 된다. 지식은 언제나 변하고 정보는 날로 새롭다. 수시로 변한다. 믿음은 설자리가 없다.
알아야 한다. 일본이 조선을 약탈하지 않아도 일본은 나쁘다는 사실을. 일본이 조선을 도와줘도 나쁘고, 철도를 놓아주면 더욱 나쁘고, 교육을 시켜주면 더욱 나쁘다. 우리를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 강해질 기회를 빼앗기 때문이다. 우리 내부에 우리 스스로 의사소통의 체계, 신용형성의 체계를 구축할 기반을 빼앗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믿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이라는 토대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배신자가 우리를 단련시킨다
영지주의자들은 역사이래 늘 있어왔다. 본질을 도외시하고 수단을 앞세우는 모든 태도가 일종의 영지주의다. 만병통치약을 파는 좌파들, 기적의 치료제를 파는 수구들은 원래부터 이단이고 영지주의다.
그들은 항상 좌우의 극단에 서 있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항상 외통수로만 달려가기 때문에 딱 표시가 난다. 그들의 가슴에는 사랑이 없고 그들의 영혼에는 믿음이 없다. 수단에 의존하는 자가 가짜다.
임꺽정을 배신한 가롯 유다 서림이 그러하고, 독립운동가들을 배신한 가롯 유다 춘원 이광수가 그러하고, 노무현을 배신한 가롯 유다 김민석이 그러하다. 그들이 배신의 역사를 만들어 우리를 단련시켜 왔다.
그들이 우리를 한 번 배신할 때 마다 우리는 두 배로 신뢰를 축적한다. 우리는 두 배로 의사소통의 밀도를 높인다. 우리는 두 배로 체험의 공유를 늘리고 그만큼 더 진실해진다. 왜? 그렇게 하지 않고는 그들에 대항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종교가 주는 것은 의사소통의 토대이다. 그 토대는 믿음과 사랑의 토대이다. 그 믿음과 사랑은 우리 내부에서 씨앗처럼 자라난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때 우리는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 강해진다.
지식인이 우리에게 주입하려는 지식과 정보는 외부에서 조달된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씨앗처럼 자라나지 않는다. 붕어가 밥알을 기다리듯 지식인에게 의존해야 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약해지고 만다. 어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