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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540 vote 0 2006.04.06 (20:38:52)

 

많은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2002년 봄에 왜 갑자기 노무현 후보가 떴는지를. 고작 3프로의 지지를 받고 있던 노무현 후보가 67프로의 지지를 받게 되는 데는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 한 달 사이에 도무지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말인가?

2002년에 노무현 후보가 왜 떴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강금실이 지금 왜 뜨는지도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코카콜라의 브랜드 가치가 왜 704억불로 평가되는지도 역시 이해 못할 것이다.

강금실에 대해서는 85번 이상 언급하여 쓴 적이 있다. 모르는 사람이 모를 뿐 아는 사람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바람이라는 것이 우연히 불게되는 것은 아니다. 밑바닥에 에너지가 고이고서야 허리케인은 만들어지는 법이다.

허리케인을 우리말로 싹쓸바람이라고 한다. 진작부터 싹 쓸어버리고 싶었다. 노무현 빗자루만으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구석구석 닦아주는 강금실 스팀 진공청소기가 필요했었다.

(아래 글은 다른 곳에 쓰고 있는 '학문의 역사 시리즈'에서 부분 발췌하고 있으므로 글의 맥락이 부자연스럽게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한식과 중식 그리고 일식과 양식이 있다. 골고루 맛볼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개념으로 만들어진 뷔페식은 식은 음식이다. 다양해 보이지만 차가움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  

한국음식은 대부분 고춧가루가 들어있고 일본음식은 대략 간장냄새가 난다. 중국음식이 다양하다고는 하나 대략 기름에 절어 있다. 프랑스 요리가 종류가 많다지만 전부 치즈로 볶은 거다. 다양성 속에 획일성이 있다.  

우리는 잘 모르지만 일본인들은 안다. 한국음식 하면 고춧가루를 연상한다. 일본인들은 잘 모르지만 프랑스인들은 잘 안다. 일식 하면 ‘어휴 간장냄새’ 하면서 얼굴을 찡그린다.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은 자기네 음식이 기름에 쩔었다는 사실을 모른다. 프랑스인들은 자기네들 치즈냄새가 고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한국인들 청국장 냄새만 탓한다.

다양한 요리를 맛보고 싶다면 어떤 방법을 선택해야 할까? 한정식 하나만 시키는 것이 좋다. 궁중요리라면 50여가지 반찬이 나오는데 갖가지 재료를 다양한 방법으로 요리하고 있다.

중식이든 일식이든 마찬가지다. 다양성 속에 획일성이 있고 획일성 속에 다양성이 있다. 다양성을 포함한 통일성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가치판단이 가능하고 판단이 가능해야 소통할 수 있다.

어떤 문화도 일정한 양식에 도달하기 까지는 진짜가 아니다. 한국에는 한국풍이 있고 일본에는 일본풍이 있으며 중국풍, 인도풍, 인디언풍, 아프리카풍이 있는가 하면 프랑스풍, 독일풍, 영국풍이 있다.

풍(風)은 양식을 말한다. 그 양식은 한국음식이 고춧가루 하나로 통일되듯이 일본음식이 간장 하나로 통일되듯이, 중국음식이 기름 하나로 통일되듯이, 이탈리아 음식이 올리브유 하나로 통일되듯이 전체를 통일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풍을 얻어서 양식화에 성공했을 때 문명은 외부세계와 소통가능한 형태가 된다. 풍에 이르지 못하고 양식화에 성공하지 못한 학문은 소용이 없다. 그 의미는 평가절하 된다.

자연학은 역학적 가치를 추구하고 인문학은 미학적 가치를 추구한다. 역학으로 질료를 얻고 미학으로 형상을 부여한다. 깨달음은 양자를 통일한다. 비로소 학문은 양식화 된다. 한국식 일본식 독일풍 중국풍이 탄생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양식화 하는 것이다. 자기다움을 얻자는 거다. 자신의 풍을 완성하자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외부세계와 소통가능한 상태로 자기 자신을 재질서화 하는 것이다.

깨달음에 의해 인식은 소통할 수 있고 전달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된다. 하나의 사회가 그러한 양식을 얻었을 때, 풍을 얻었을 때 의사소통의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는 현상이 있다.

이때 영웅과 호걸은 우후죽순처럼 출현한다. 그리고 그 나라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육조시대가 그러했고 그리이스에서는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가 그러했다.

그때 중국의 양식이 탄생했고 그리이스의 양식이 탄생한 것이다. 어느 나라를 가도 마찬가지다. 의사소통의 속도가 급격하게 빨라지는 시점이 있다.  

문제는 그 한식의 고춧가루를 어디서 조달하는가이다. 일식의 간장을, 중식의 돼지기름을, 이탈리아의 올리브유를, 프랑스의 치즈를 얻어야 한다. 전체를 통일하는 하나의 심(心)은 반드시 있다. 먼저 그것을 얻지 않으면 안된다.  

우리는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 진보냐 보수냐를 논쟁하지만 부질없다. 양식화에 성공하지 않으면 안된다. 한국풍을 만들지 못하면 그 어떤 진보도 허상에 불과하다. 천년에 한번 올까말까한 기회를 잡아야 한다.

양식은 외부에서 수입할 수 없다. 진보나 보수의 논의들,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논의들은 외부에서 수입된 것이다. 가짜다.

우리는 말로는 사회주의를 수입한다면서 200년 전 영국의 양식이나 혹은 100년 전 러시아의 양식을 수입하려 들지 않았는지, 50년 전에 만들어진 중국의 양식을 사회주의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또 우리는 자본주의를 수입한다면서 100년전 서부시대의 개척자들이 만들어놓은 청바지와 그 너절한 양식을 수입하려들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우리 안에서 재발견하지 않은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수입된 그것은 그 고춧가루 역할의 심(心)이 없기 때문에 통일성이 없고 통일성이 없기 때문에 명료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없고, 판단기준이 없기 때문에 소통되지 않는다. 이는 도량형이 통일되지 않는 것과 같다.  

우리 내부에서 심(心)을 얻어야 한다. 심은 핵심(核心)이고 중심(中心)이다. 내부에 든든한 심지가 있고서야 이심전심의 소통이 가능하다. 붐업이 가능하고 빅뱅이 가능하고 신바람이 가능하다.

우리가 입는 옷이나 사는 집과 쓰는 가구들은 대개 중국에서 들어온 것이지만 우리 내부에서 새로이 해석되고 재편되었다. 한국풍에 맞게 고쳐진 것이다. 우리식의 판단기준을 적용한 것이다. 그래서 진짜다.

학문의 목적은 가치의 획득에 있다. 가치는 그 우열이 비교되는 것이며 그러한 비교에 의해 둘 중 하나가 선택되는 것이다. 즉 주체와 대상으로 나누어지고 일자와 타자로 나누어진다. 불완전하다.

깨달음이 완전하다. 양식을 얻는 것이 깨달음의 목적이다. 양식은 스타일이다. 스타일은 다양성 속에 통일성을 부여하기다. 하나로서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그것은 심(心)이다. 핵심이 되고 중심을 잡아 평형을 이룬다.

양식은 완전성을 반영한다. 먼저 완전에 대한 비전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완전한 것은 신(神)이다. 또 완전한 것은 성(聖)이다. 진(眞)과 선(善)과 미(美)와 자유(自由)는 그 성(聖)에 다가가는 과정이다.

성(聖)은 속(俗)에 맞선다. 속은 속물(俗物)이다. 속물은 타인의 시선으로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자를 말한다. 자기 자신의 뼈대를 얻지 못한 사람이다. 자신의 시야와 안목과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얻지 못한 자다.

등뼈를 얻어야 한다. 비로소 피와 살을 보탤 수 있다. 심지가 박혀야 한다. 심이 있어야지만 이심전심이 가능하다. 비로소 세상과의 소통이 가능하다. 신의 완전성과 대화할 수 있다.

삶을 관통하는 하나는 사랑이다. 사랑이라는 등뼈를 획득해야지만 피가 돌고 맥이 뛰어 일상의 삶의 모습들이 파릇파릇 살아난다. 사랑이야 말로 삶을 완성하게 하는 것이며 깨달음이야말로 학문을 완성하는 것이다.

시장의 제품이라도 그렇다. 양식화에 성공해야지만 브랜드가 빛이 난다. 코카콜라가 팔리는 이유는 콜라와 햄버거가 궁합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즉 콜라가 일상의 삶 속으로 침투하여 양식화 된 것이다.

명품이 그러하다. 명품의 가치는 그 상품 자체에 한정하여 고유한 가치가 아니다. 양식의 가치다. 한 잔의 커피 가격은 그 커피잔에 든 내용물의 가격이 아니라 그 커피와 함께 하는 대화의 분위기를 제공하는 양식의 가격이다.

사회는 점차 브랜드화하고 있다. 브랜드는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양식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 옷은 어떤 장소에서 입고 이 신발은 어떤 사람과 만날 때 신으며 이 핸드백은 어떤 장소에 나갈 때 사용한다는 식의 양식 말이다.

자기 자신의 양식이 아니면 안 된다. 백화점에서 양식을 쇼핑할 수 있다고 착각하는 자가 바로 속물이다. 뼈대가 있어야 한다. 등뼈가 없으면 낙지나 문어처럼 몸체가 무너져서 그 핸드백과 넥타이를 걸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고 멋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진 자기류의 양식을 포착했다는 의미다. 화가에겐 화가의 양식이 있고 소설가에게는 소설가의 양식이 있고 음악가에게는 음악가의 양식이 있다.

그 양식은 절반은 눈빛에 있다. 화가의 눈빛을 획득하지 못한 자는 화가의 멋을 낼 수 없고 소설가의 고집을 획득하지 못한 자는 소설가의 멋을 낼 수 없고 음악가의 눈빛을 획득하지 못한 자는 음악가의 멋을 낼 수 없다.

눈빛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 눈빛의 깊이는 그 사람의 안목에 있고 심미안에 있고 있고 가치관에 있고 사고방식에 있다. 그렇게 눈빛이 살아있는 사람은 한 눈에 감이 오는 법이다. 보면 안다.

왠지 다가갈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 있다. 왠지 말을 걸어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 소박하면 소박한대로 세련되면 세련된대로 자기방식의 스타일을 완성해 놓은 사람이 있다.

말이 통할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대화가 될 것 같은 사람이 있다. 분위기만으로 매료시키는 사람이 있다. 자기류의 양식을 완성해 놓고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 시대는 강한 개인을 필요로 한다.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브랜드가 되는 사람이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만인의 시선을 무리없이 소화해내는 사람이다. 어떤 장소에 있어도 자연스러운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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