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사랑 결혼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한다. 이것이 보통 사람의 생각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 것은 사회적 형식에 불과하다. 그게 통속적인 거다. 인간은 그냥 사는 거다.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거다. 지나가던 객이 공연히 끼어들어 ‘너희들 뭐야?’ 하고 꼬치꼬치 캐물으니까 답이 궁해져서 ‘우리 사랑하는 거야’, 혹은 ‘우리 결혼했어’ 하고 둘러대는 거다. 이런 사회적 조작들을 배제하고 자연 그대로를 보아야 한다. 결혼은 존재규정이다. 어떤 사람이 있는데 공연히 그 사람을 ‘처녀’니, ‘과부’니, ‘미시’니 하고 딱지를 붙인다. 그래서 사람이 달라졌는가? 아니다. 사람은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주변의 의도있는 시선들이다. 달라진 것은 주변의 시선이며 거기에는 목적과 의도가 숨어 있다. 처녀면, 혹은 과부면, 혹은 미시면 그 주어진 입장에 따라서 어떻게 수작해보려는 거다. 그러한 사회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문제는 의도를 가진 자들이다. 그것으로 규정되는 당사자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말하면 처녀니 과부니 미시니 하는 것은 없다. 단지 그렇게 규정하려는 자의 불순한 의도가 있을 뿐이다. 결혼은 존재규정이다. 그 규정은 사회의 것이며 의도가 숨어 있다. 때로는 불순한 것일 수 있으며 때로는 왜곡된 것일 수 있다. 인간은 그냥 인간이다. 결혼했다고 해서 홍길동이 박길동으로 되지는 않는다. 대통령 간판 달았다고 쥐가 인간되지는 않는다. 그때나 지금이나 벙커에서 찍찍대기는 마찬가지다. 목적과 의도를 배제하고 순수한 존재 그 자체를 보라. 그리고 훈련하라. 진짜배기를 보아내는 연습을. 만나서 사랑하고 결혼하는 순서는 확보된 사실을 사회에 전파하는 과정에 불과하다. 실제로 자연이 주변의 시선에 신경쓰며 작동하지는 않는다. 진실로 말하면 그 반대다. 결혼해서, 사랑하고, 만난다. 결혼, 사랑, 만남이라는 사회의 참견을 배제하고 용어를 바꾸자. 결혼은 존재규정이니 존재가 주인공이다. 존재하므로 사랑을 내뿜는 것, 서로가 동시에 사랑을 내뿜어서 서로 감염되었을 때 전광석화같은 만남이 그 안에 있다. 결혼했기 때문에(자연으로 보면 존재하기) 사랑하는 것이고(자연으로 보면 빛나는 매력을 보이기), 사랑했기 때문에 만나는 것(자연으로 보면 위대한 일치와 그로 인한 소통하기)이다. 툰치소크멘이 강수진을 사로잡은 5단계는 1) 보았고 2) 원했고 3) 결심했고 4) 실행했고 5) 성공했다. ..로 발표되고 있지만 이는 확보된 사실을 사회에 알리는 형식에 불과하다. 실제로는 성공했기에 실행했고, 실행했기에 결심했고, 결심했기에 원했고, 원했기에 보았다. 물론 여기서 성공, 실행, 결심, 원함, 보았음을 명시하는 단어들은 사회적 형식어에 불과하다. 언어가 가짜다. 사건은 한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이나 상대방의 승인이 떨어져야 그것을 공식화 할 수 있으므로, 상대방이 승인하는 순서대로 진술해 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왜? 상대방이 생까면 무효화하고, 철회하고, 없었던 일로 할 안전장치가 있어야 하니까. 보다, 원하다, 결심하다, 실행하다, 성공하다의 순서는 사회의 쓸데없는 참견자들로부터 자기네를 보호하기 위한 안전한 표현을 찾아낸 것에 지나지 않으며 거기에는 얼마간의 위선이 숨어 있다. 진짜가 아니다. 거짓되다. 구조로 보면 1) 탑 포지션 차지 2) 확보한 스펙의 가동 3) 쌍방향 크로스체크 시작 4) 마이너스 행동 구사 5) 보았음의 확보. ‘보았음’에서 사건이 시작된다고 생각하지만 허술하다. 뭘 봤다는 거지? 그림자를 봤다는 건가? 뒷모습이라도 보았나? 명찰을 봤다는 건가? 인간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다. 거짓된 표지를 내밀고 다닌다. 그걸 봐서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 가진 만큼 안다. 존재만큼 가진다. 그러므로 존재가 탑 포지션이다. 자기존재를 완성하여 탑 포지션을 차지했을 때, 그 존재의 밀도만큼, 그 존재의 완성도만큼 가지는 것이며, 가진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인다. 호주머니에 한 푼도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눈 앞에 미인이 지나가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반면 돈도 있고, 직업도 있고, 명성도 있고, 신분도 있다면, 그제서야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 훤히 들여다 보인다. 갖추어야 할 돈, 직업, 신분, 명성, 몸매들은 모두 ‘있는 것’들이다. 즉 존재다. being이다. being은 상호작용이다. 그러므로 완성도 문제가 제기된다. 존재해야, 그리고 그 존재를 완성해야 비로소 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먼저 그 존재의 완성으로 하여 탑 포지션을 차지해야 하며, 그 포지션을 받쳐주는 스펙이 구사될 때, 동원된 자원이 활용될 때, 비로소 상대방을 알기 시작하고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존재가 허술할 때 볼 수가 없다. 도무지 무엇을 보았다는 말인가? 눈으로 보았다는 말인가? 마음까지 들여다 보았다는 말인가? 본질까지 충분히 보았다는 말인가? 자기존재가 무너져 있는 상황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 경찰이 아닌 바에 검문할 수도 없고, 지나가는 사람 막아서서 소매자락 붙잡고 캐물을 수도 없고, 선 보는 자리를 마련할 수도 없고 보기는 무엇을 어떻게 본다는 말인가? 존재는 존재에 반응한다.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은 존재다. 자기 존재를 완성했을 때 상대방의 완성된 존재가 포착된다. 자기 존재가 허술한채로 누군가를 보았다는 말은 마치 ‘내가 어제 여의도 MBC사거리 앞에서 지나가는 김태희 봤다’는 말 만큼이나 허무한 것이다. 그게 본 것인가? 그것은 전혀 본 것이 아니다. 알아야 본다. ‘나는 김태희를 안다’고 말하면, 김태희와 나는 ‘아는 사이’라는 의미가 된다. 과연 김태희와 나는 아는 사이인가? 아는 사이가 아닌데 어떻게 볼 수가 있지? 모르는 사람을 본다는 것은 애초에 거짓말이다. 서로 ‘친연’한 사이가 아닌데 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 친연.. 친척이나 친구, 친지로 성립될 수 있는 공통분모가 있는 것.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도 친연할 수 있다. 예컨대 나의 취미가 등산이고 상대방의 취미도 등산이라면 등산이라는 가상의 ‘혈연’으로 맺어진 친연이 있다. 같은 등산족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혈족을 만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군가를 제대로 보았다면 상대방과 나는 친연으로 이미 이어져 있는 것이다. 만나기 전에 이미 두 사람은 연결되어 있었다. 소리굽쇠 실험과 같다. 북 옆의 북을 치면 북은 울지만 종은 울지 않는다. 종 옆의 종을 치면 종은 울지만 북은 울지 않는다. 친연하면 반응한다. 원래 머리 속에 구조론의 인자가 약간 들어있는 사람이 구조론연구소에 반응하는 것이다. 알게 되고 보게 된다. 전혀 그것이 없는 사람은 보고도 모르고 그냥 지나간다.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수히 지나갔다. 옛날 서양의 귀족 부인들이나, 미국의 백인 여성들은 남자 하인들, 혹은 흑인노예들 앞에서 스스럼없이 나체를 보이며 옷을 갈아입곤 했다. 상대방의 신분이 낮으므로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제왕은 무치라는 말이 있다. 옛날 임금들의 성생활은 모두 공개되어 있었다. 날자와 시간까지 정해져 있었다. 궁녀 6명이 왕의 침실에 붙어 있는 밀실 3곳에서 밤새 숙직하며 임금의 일거수 일투족을 살피게 되어 있다. 왕은 감시자를 신경쓰지 않는다. 존재를 무시하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일본의 가부키에서 검은 옷을 입은 쿠로코(黑子)가 왔다갔다 하며 무대장치를 옮겨도 관객들은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과 같다. 그 지점에서 존재는 완벽하게 부정된다. 존재는 상호작용이다. ‘있다’는 것은 반응한다는 것이다. 반응하지 않으면 그것은 없는 것으로 된다. 상대방이 반응하게 하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엄마따라 여자목욕탕에 간 남자아이처럼 반응하지 않으면 없는 것이다. 상대방이 반응하는 위치에 내가 있었다면 이미 성공이다. 그 성공에 의해 스펙이 사용되고, 쌍방향체크가 일어나고, 자원이 소모되면서, 만남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쌍방 중 1인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으면 취소된다. ‘없는 셈으로 치기 모드’에 들어간다. 반응했어도 일방의 반응은 반응하지 않은 셈으로 친다. 가부키의 쿠로코가 무(無)이듯이, 있는 모든 것을 취소하고 리셋모드로 들어간다. 원했고 결심했고 실행했고 성공했던 모든 과정을 취소한다. 그러므로 만남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이전의 전개들은 모두 제로가 된다. 올드보이 마지막 장면에서 최면술을 구사하여 미도의 기억을 날려버리듯이 완전히 날려버리게 된다. 자연은 에너지의 결을 따라간다. 밥을 먹었으므로 똥을 싸는 것이지 똥을 쌌으므로 밥을 먹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닭이 먼저고 알이 나중이다. 밥에는 칼로리가 있지만 똥에는 칼로리가 없기 때문이다. 닭은 자기 안에 에너지가 있지만 알은 그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알은 어미닭이 에너지로 품어주어야 작동한다. 에너지가 있어야 사건의 원인측이 될 수 있다. 만났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했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다. 존재가 원인이다. 상호작용을 반영하는 being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being은 돌멩이처럼 그냥 우두커니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팔팔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스위치가 켜진, 전구에 불이 들어온, 현재 작동하고 있는, 진행되고 있는 것이 being다. 그것이 존재다. 그렇게 팔팔하게 살아서 상호작용하며 존재하므로 사랑이라는 빛을 내뿜는 것이다. 매력을 내뿜는 것이다. 그 매력과 매력이 교차할 때, 두 사람이 동시에 같은 지점에서 매력을 내뿜었을 때 위대한 일치가 일어나는 것이며, 소통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그것이 만남이다. 그것으로 사건은 종료다. 본래의 친연에 의해 그 모든 것은 일어난다. 물론 그 만남은 표면의 만남이 아니라, 마음의 만남, 영혼의 만남, 본질의 만남을 의미한다. 얼굴만 봤다고 본 것이 아니다. 알아야 보는 것이며, 원래 아는 사이라야 볼 수 있다. 친연해야 원래 아는 사이가 될 수 있다. 처음 만났더라도 둘 사이에 어떤 공통점이 있다면, 친연성이 있다면, 서로 아는 것이며 볼 수 있다. 소리굽쇠처럼 이쪽의 사정에 저쪽이 반응하기 때문이다. 공명하기 때문이다. 표면이 아니라 이면까지,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까지, 마음 뿐이 아니라 영혼까지, 내 전부를 들어 상대의 전부를 만날 수 있다. 내 완전한 존재가 갖추어졌을 때, 상대의 완전한 존재가 반응하고, 나의 전부에 상대의 전부가 반응할 때, 온전한 만남이 있고,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혼이니 약혼이니 하는 사회적 안전장치는 쓸데없다. 그것들은 불완전한 자의 보조엔진일 뿐이다. 온전히 만났는가? 나의 전부에 상대의 전부가 반응했는가? 본래의 친연성이 갖추어져 있었는가? 원래 아는 사이인가? 볼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게 아니면 가부키의 쿠로코와 같다. 무(無)다. 다섯 살 꼬마 순이가 다섯 살 꼬마 철이를 만났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만남이 아니다. 얼굴만 봐놓고 만났다고 우긴다면 곤란하다. TV에서 스타를 봤다고 본 게 아니듯이, 관객의 입장에서 무대 위의 배우를 얼핏 봤다고 만난 것은 아니듯이, 본질이 만나지 않으면, 영혼이 만나지 않으면, 그것은 만난 것이 아니라 장차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만남 이후에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남으로 사건은 종결되는 것이다. 한 순간에 다 만나는 사람도 있고 평생 만나도 덜 만난 사람도 있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 만나는 사람도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만나 있는 사람도 있다. 친연이 존재한다. 그것은 태초부터 존재해 왔으며 세상의 안쪽과 바깥쪽을 두로 꿰고 있다. 그것이 때때로 요동을 쳐서 세상 무대 위에 온갖 사건을 연출해낸다. 너와 나는 친연한가? 이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친연하지 않으면 만나도 반응하지 않는다. 불꽃이 튀기지 않는다. 단지 만난 척 할 뿐이다. 남들이 귀찮게 캐물을까봐. 하긴 이 세상 소풍 와서 이 세상 만나지도 못하고 그냥 간 사람이 부지기수라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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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보았고
2) 원했고
3) 결심했고
4) 실행했고
5) 성공했다... 는 허구입니다.
1) 보았고.. 뭘 봤죠? 정확히 말하면 '보기 시작했다'입니다.
본 것이 아니라 보기를 처음 시작한 것이고 보는 행동은 헤어질때까지 가는 겁니다.
2) 원했고.. 뭘 원했죠? 좀 더 보기를 원한거죠. 여기서 다시 1)번으도 되돌아갑니다. 이건 잘못된 거죠.
3) 결심했고.. 뭘 결심했죠? 2)번을 실행하기로 결심한 거죠. 2)번은 1)번을 가리키므로 다시 1번으로 원위치. 빽또에요. 되돌아간 거. 헛수고. 이런 헛수고를 왜 하죠?
4) 실행했고.. 뭘 실행한 거죠? 3)번을 실행한 겁니다. 다시 3번으로 되돌아갔지요. 3)번은 역시 2)번으로, 2)번은 역시 1)번으로 다시 처음으로 계속 되돌아가고 있는 거에요.
5) 성공했고.. 뭘 성공했다는 거죠? 결혼. 그게 중요한 거에요. 서구에는 결혼 안 하고 사는 사람이 태반인데 그들은 실패자에요? 결국 성공했다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 보기를 상대방과 약속함으로써 그에 따른 근심걱정과 스트레스를 감소시켰다는 건데 이건 뻘소리고 역시 1번으로 빠꾸.
결국 이러한 전개는 상대방과 합의를 봤다는 거고, 그건 상대방과의 문제일 뿐 자기 내면의 진행은 아닙니다. 구조론으로 보면 에너지의 결을 따라가는데 에너지가 상대방으로 가지 않아요.
에너지는 내가 밥을 먹고 화장실에서 쌀때까지 내 안에서 맴도는 겁니다. 그러므로 상대방과의 협정 따위는 논외에요. 그건 안 쳐주는 거죠. 결국 전부 가짜죠.
사실 인간은 보는게 목적입니다. 보면 성공이에요. 계속 보면 계속 성공이죠. 그리고 미래는 확정되는게 아니에요. 결혼해봤자 이혼하면 그만인데 전국의 이혼남, 이혼녀들은 전부 실패자들인가요?
이혼했다하더라도 결혼기간만큼은 본 것인데 그만큼 성공이죠. 그러므로 성공은 이혼과 상관없고 결혼과 상관없는 겁니다. 목적은 보는 거고 보는게 성공인거죠. 봤으면 이미 성공한 거죠. 중요한건 제대로 봤느냐죠.
결론..
보는게 성공입니다. 그러므로 보다가 발전해서 성공으로 가는게 아니라, 보다에서 이미 성공이고 사건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계속 보면 계속 성공입니다. 그건 더 많은 다른 사건들의 집합이죠. 그러므로 원했고 결심했고 실행했고는 그 보다의 질을 상승시킨 것이며 더 많이 더 깊이 더 확실히 보기로 한 것입니다.
1) 보았고-얼굴만 보기
2) 원했고-데이트 해보기
3) 결심했고-연인관계로 지내보기
4) 실행했고-부부관계로 발전시켜보기
5) 성공했고-자식을 얻어서 가족구성으로 전개시켜보기
결국 더 많은 보기들을 실행한 것입니다. 얼굴만보기에서 데이트, 연인, 부부, 가족으로 보는 정도를 발전시켜 가는 것은 보통사람들이 사회적 장치속에서 기능하는 형식이고 그게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서로를 고양시켜 줄 수 있다면 한국과 미국에 떨어져 있어도 이미 부부관계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안 봐도 본 것일 수 있습니다. 사회에서 인정되는 형식을 맞춰냈느냐가 아니라 그러한 관계가 서로에게 얼마나 이득이 되었는가 서로에게 긍정적인 기여를 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얼굴만, 데이트, 연인, 부부, 가족의 발달은 사회적 기능에 불과하며 본질에서는 쓸데없는 것이고 고수들은 처음 만나는 순간에 이미 완성되어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작가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단 5분간이었다고 칩시다. 5분 후 상대방은 죽었다고 칩시다. 혹은 떠났거나. 그러나 깊은 소통이 일어나서 영감을 받게되었고 그 영감은 그 작가의 삶에 평생 영향을 미칩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케이트 윈슬렛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단 4일간 같은 배에 동승했을 뿐입니다. 1등석과 3등석으로 떨어져 있어서 아주 잠시 스쳐갔을 뿐이지요. 사회에서 먹어준다는 방식으로 논하면 1)번 보았고에서 끝난거죠. 그러므로 실패인가요? 그럼 영화는 가짜네?
스티브 잡스는 워즈니악을 한번 만났을 뿐인데 골수까지 빼먹었습니다. 한번 봤는데 이미 끝난거죠. 관계는 점점 발전해 가는게 아닙니다. 과학적은 조사로 봐도 연애결혼보다 중매결혼이 더 이혼률이 낮습니다. 이건 안 보고 성공하는 거죠. 보고 원하고 결심하고 실행하고 다 생략. 열쇠 다섯개만 있으면 바로 성공.
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칩시다. 한 숟갈 떠도 먹은 거고 다 먹어도 먹은 겁니다. 점점 먹어간다는 것은 없어요. 숟가락을 대기만 하면 그 밥은 다른 손님에게 못 가는 겁니다. 밥을 먹는다는 본질과 얼마나 먹었느냐는 진행은 별개입니다.
옛날 식으로 말하면 신랑이 첫날밤에 죽어버리면 얼굴도 못보고 끝난건데 (심지어는 사주단자만 받아놓고 끝나버린 일도 있음.) 그래도 부부는 부부로 인정됩니다. 성공인거죠.
1) 탑 포지션 차지
2) 확보한 스펙의 가동
3) 쌍방향 크로스체크 시작
4) 마이너스 행동 구사
5) 보았음의 확보.
보았음에서 이미 성공한 것이고 끝났으므로 ...그 나머지는 불필요한 것이라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은 인식론적인 것은 무의미하다. 필요없는 부분....볼 필요도 없고.
존재론적인 것만을 보아야 한다라는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이미 탑 포지션 차지 >확보한 스펙의 가동 >쌍방향 크로스체크 시작 >마이너스 행동 구사 >보았음의 확보. 로 이미 종결된 것이라는 것이겠지요?
ㅋㅋ..결혼 ,사랑, 성공...이 부분은 웬지 좀 어렵네요.
이런건 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이 있는거구요.
아담이 이브를 만났다 칩시다.
그 시대에 결혼이니 사랑이니 하는건 없었지요.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존재한다는 것이 확실해진 이상 더 뭐가 필요한가요?
결혼을 안 해도 이미 결혼상태인 거죠.
그러나 만약 아담이 사람이 아니고 고릴라였다면 설사 결혼을 해도 미혼상태인거죠.
완전한 남자가 완전한 여자와 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하게 만났다면
그 관계가 부부관계든 연인관계든 원나잇스탠딩이든 아무 상관없는 거죠.
문제는 그 상대가 사실은 쥐새끼였다면 곤란하다는 거죠.
왜냐하면 불완전하니까.
결혼이란 개념은 인간이 지어낸 구라고 자연의 본질로 본다면 완전성입니다.
완전성은 처음부터 있었지만 가장 나중에 입증된다는 거죠.
가장 나중에 입증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가장 나중에 오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지요.
사실은 제일 먼저 오는게 완전성입니다.
어떤 사람이 파트너를 사랑했는데
그 파트너가 알고보니 침팬지였다 혹은 허수아비였다 혹은 인형이었다
이런 착오 때문에 판단을 유보하기 위해 결혼(완전성)을 맨 뒤로 놓은 것입니다.
-완전성은 맨 먼저 오지만 맨 나중에 확인된다.-
이게 혼선의 원인인 거죠.
존재론은 자연의 실재를 나타내고 인식론은 거짓입니다.
그런거 없어요.
문제는 세상에 워낙 불분명한 일들이 많아서 확실하게 판단이 설때까지 기다리는 거죠.
어떤 사람이 누구를 사귄다고 떠벌이면서 맹세를 해놓고 다음날 헤어졌다 그러면 짜증나잖아요.
인식론은 쥐박이류 말 많은 인간들 때문에 필요한 장치일 뿐 사실이 아닙니다.
다른 부분들은 다 그렇게 이해가 되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자꾸 혼동이 되네요.
아무래도 사람이라는 것. 남녀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 결혼이라는 것...이러한 것들이 현실에서 느껴지는 것이 더 강하기 때문에 그 너머의 것을 쉽사리 깨닫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현실의 입장에서 더 생각을 하게되니, 아무래도 욕망..혹은 욕심 이런 부분에 걸려 넘어져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것을 넘어서고 상승시키는 훈련이 필요한 듯....^^
어쨌든 존재와 존재가 만났다.라는 것은 이미 완전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듯 합니다.
완전하니, 이미 성공해 있으니, 만나는 것이 겠지요.
사람과 사람이 만나야지, 사람과 쥐가 만나면 안되니까요.ㅋㅋ
저는 살짝 맛이 간 것 같은데
나는 그럼 누구를 만나야 하죠 ???
살짝 만나면 되죠.
누구든.
맛도 맛 나름 아닐까요?
어떻게 맛이 갔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 같은데...
하하...웃자고 한 얘기입니다.^^
구조론을 논할 때는 포지션만 봐야 합니다.
결혼이라는 단어는 필요없는 거죠.
그냥 1번입니다.
예수가 마음에 간음한 자도 이미 간음한 자라고 말한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초등학교에 입학만 하면 졸업은 사실 확정되어 있습니다.
이미 졸업해 있다는 거죠.
단지 그렇게 말하면 아무도 공부를 안할테니까
정학 휴학 따위를 두고 졸업을 맨 나중으로 돌려서 학생을 통제하는 거죠.
미국에서 출생만 하면 어디서 죽든 미국시민이 되는 겁니다.
비행기에 탑승만 하면 목적지에 도착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라는 거죠.
다만 가짜들이 많아서 헷갈리게 하니까 가장 먼저 오는 것을 가장 뒤로 돌려놓은 것입니다.
매번 동렬님의 글 덕에 많은 위안을 얻고 갑니다 ㅠㅠ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자기 입장에서만 바라보고 얘기하기 때문에
사람들 속에서 더욱 외로움을 느끼곤 합니다.
사귄다거나 혹은 결혼이라거나 하는 드러나 보이는 형식이 없으면
그 관계의 의의를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저에게 아주 상큼한 인연이 있었는데
누구도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았습니다.
남녀가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초반에 결판이 납니다.
어떤 자질을 볼 수 없는 상대라면 시작도 되지 않습니다.
문자를 보내도 씹힙니다.
서로 알아본 사이라면 연락을 하지 않아도
항상 생각속에 있기 때문에
연락한 그 순간에 더욱 통했다고 느끼게 됩니다.
애인이라거나 결혼이라는 식의 형식으로 포장하지 않아도
그 관계의 의의는 분명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제 주변에 아무도 그걸 인정해주지 않아 외로웠는데
동렬님의 글 덕에 위안을 얻고 갑니다.
고맙습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 가진 만큼 안다. 존재만큼 가진다. 그러므로 존재가 탑 포지션이다. 자기존재를 완성하여 탑 포지션을 차지했을 때, 그 존재의 밀도만큼, 그 존재의 완성도만큼 가지는 것이며, 가진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인다.
갖추어야 할 돈, 직업, 신분, 명성, 몸매들은 모두 ‘있는 것’들이다. 즉 존재다. being이다. being은 상호작용이다. 그러므로 완성도 문제가 제기된다. 존재해야, 그리고 그 존재를 완성해야 비로소 뭔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존재는 존재에 반응한다. 진정으로 보아야 할 것은 존재다. 자기 존재를 완성했을 때 상대방의 완성된 존재가 포착된다. 자기 존재가 허술한채로 누군가를 보았다는 말은 마치 ‘내가 어제 여의도 MBC사거리 앞에서 지나가는 김태희 봤다’는 말 만큼이나 허무한 것이다. 그게 본 것인가? 그것은 전혀 본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누군가를 제대로 보았다면 상대방과 나는 친연으로 이미 이어져 있는 것이다. 만나기 전에 이미 두 사람은 연결되어 있었다. 소리굽쇠 실험과 같다. 북 옆의 북을 치면 북은 울지만 종은 울지 않는다. 종 옆의 종을 치면 종은 울지만 북은 울지 않는다. 친연하면 반응한다.
상대방이 반응하는 위치에 내가 있었다면 이미 성공이다. 그 성공에 의해 스펙이 사용되고, 쌍방향체크가 일어나고, 자원이 소모되면서, 만남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때 쌍방 중 1인의 승인이 떨어지지 않으면 취소된다.그러므로 만남으로부터 사건이 시작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이전의 전개들은 모두 제로가 된다. 올드보이 마지막 장면에서 최면술을 구사하여 미도의 기억을 날려버리듯이 완전히 날려버리게 된다.
자연은 에너지의 결을 따라간다. 밥을 먹었으므로 똥을 싸는 것이지 똥을 쌌으므로 밥을 먹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닭이 먼저고 알이 나중이다. 밥에는 칼로리가 있지만 똥에는 칼로리가 없기 때문이다. 닭은 자기 안에 에너지가 있지만 알은 그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알은 어미닭이 에너지로 품어주어야 작동한다.
에너지가 있어야 사건의 원인측이 될 수 있다. 만났기 때문에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했기 때문에 만나는 것이다. 존재가 원인이다. 상호작용을 반영하는 being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being은 돌멩이처럼 그냥 우두커니 있는 것이 아니라 사건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팔팔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에너지가 있는 것이다. 내 완전한 존재가 갖추어졌을 때, 상대의 완전한 존재가 반응하고, 나의 전부에 상대의 전부가 반응할 때, 온전한 만남이 있고, 온전한 만남이 이루어졌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결혼이니 약혼이니 하는 사회적 안전장치는 쓸데없다. 그것들은 불완전한 자의 보조엔진일 뿐이다.
온전히 만났는가? 나의 전부에 상대의 전부가 반응했는가? 본래의 친연성이 갖추어져 있었는가? 원래 아는 사이인가? 볼 수 있는가?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게 아니면 가부키의 쿠로코와 같다. 무(無)다.
다섯 살 꼬마 순이가 다섯 살 꼬마 철이를 만났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만남이 아니다. 얼굴만 봐놓고 만났다고 우긴다면 곤란하다. TV에서 스타를 봤다고 본 게 아니듯이, 관객의 입장에서 무대 위의 배우를 얼핏 봤다고 만난 것은 아니듯이, 본질이 만나지 않으면, 영혼이 만나지 않으면, 그것은 만난 것이 아니라 장차 만남을 기대하고 있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만남 이후에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만남으로 사건은 종결되는 것이다. 한 순간에 다 만나는 사람도 있고 평생 만나도 덜 만난 사람도 있다. 죽음 이후에도 계속 만나는 사람도 있다. 태어나기 전부터 만나 있는 사람도 있다.
친연이 존재한다. 그것은 태초부터 존재해 왔으며 세상의 안쪽과 바깥쪽을 두로 꿰고 있다. 그것이 때때로 요동을 쳐서 세상 무대 위에 온갖 사건을 연출해낸다. 너와 나는 친연한가? 이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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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동의 되는 내용이어서 제가 실례를 무릎쓰고 부분적으로 발췌한 것을 그대로 이어 붙이기 한 것입니다. 요약이라고 하기에는 길지만...^^;
1) 탑 포지션 차지
2) 확보한 스펙의 가동
3) 쌍방향 크로스체크 시작
4) 마이너스 행동 구사
5) 보았음의 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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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았고
2) 원했고
3) 결심했고
4) 실행했고
5) 성공했다.
위에서 차례로 내려오는 것은 존재론이고,
보았고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은 인식론이라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위의 존재론에서 내려오는 방향은 미리 전제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상부구조라 하였고,
인식론의 방향은 그 상부구조에서 실행되었던 것을 그대로 다시 복제하여 그림자처럼 비춰진 것(일의 순서가)이기 때문에 하부구조라 하였습니다.
하지만 보았다라는 것에서,
존재라는 그 자체에 대한 표현이 빠졌었는데, 존재는 준비되어진 것에 이미 포함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 위의 본문처럼 잘 표현하지 못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어쩌라구요...ㅠㅠ
'이미 갖추어져 있었다. 즉 존재다. being이다.' 란 의미에 대해서....
제가 준비되어진 것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이전에 준비되어져 있었다.라는 것이고, 준비되어져 있었기에 본 것에서 이미 완성된 것과 같다라는 의미였습니다. 즉 자신을 먼저 완성하여야 한다라는 것이지요. 거기에는 자신 그 자체(존재)가 있어야 하고, 또한 존재가 존재하고 있는 현실의 바탕위에서의 갖추어야 할 것들까지 포함해서 그것을 통털어 준비되어진 것으로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현실 그 자체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쓴 것은 아닙니다. 그냥 저 사람이 결혼에 성공한 얘기를 하는 것이라서 거기에 맞추어서 얘기한 것이지요.
그리고 저 역시 반드시 결혼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서 실패해도 성공해도 그만이라고 한 것입니다. 성공이면 계속 가는 것이지만 말씀하신대로 실패면 다시 리셋해야 하니까요.
그리고 친연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람을 만나더라도 뭔가 다르게 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서로를 알아보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한 것을 저 역시 인정하기 때문에 필이라는 것은 조금은 그런 느낌이 아닐까?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느낌을 친연이라고 표현한다라는 것은 처음 알았네요.^^
단어나 그 의미를 잘 표현하지는 못했지만 느낌으로는 알고 있었지요. 이제 써 먹어야 되겠습니다.ㅋㅋ
보통은 저사람이 무슨 말을 하면 음 그렇구나 하고 그냥 감으로 자기마음에 비추어 이해하게 되는데 대체로 뜻은 통하지요.
그러나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신적이 있다고 기억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단어가 없어서, 혹은 느낌은 있지만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고 하셨는데...
시인이나 철학자는 그것이 가능하다....뭐 그런 얘기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저역시 그런 느낌들로 글을 쓰기는 썼는데...완전한 것은 아니었다.라고 생각됩니다.
어쨌든 느낌을 정확히 글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하고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직관이 고차원적 논리라고 하셨던 것처럼, 직관도 얼마든지 표현할 수 있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느낌도 정확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단어나 언어가 있어야 하겠지요.
느낌으로만 맴도는 것들에 대한 표현을 이렇게 잘 풀어 설명하여 놓으셔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