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은 상대와 나 사이의 유기적인 메커니즘을 본다. 입자를 보고 있는 자는 상호작용을 보는 자에게 진다. 입자를 보는 자는 표적으로 눈이 가지만 상호작용을 보는 자는 상대와 나 사이의 밸런스, 그 밸런스를 조율하는 무대 전체를 보고 있다. ◎ 표적을 보는 자는 무조건 상호작용과 그 상호작용의 변화, 그리고 그 변화의 방향성까지 보는 자에게 진다. 먼저 너를 볼 수 있어야 하고, 다음 그 너를 보고 있는 나를 볼 수 있어야 하며, 다음 그 둘 사이의 대칭구조와 그 대칭의 축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 대칭구조의 작동에 따른 상호작용의 변화, 및 그 변화의 방향까지 보아야 한다. ◎ 표적을 볼 것. ◎ 표적을 보고 있는 자신을 볼 것. ◎ 표적과 자신을 통일하고 있는 대칭의 축을 볼 것. ◎ 대칭구조를 담은 상호작용의 변화를 볼 것. ◎ 상호작용의 변화의 방향까지 볼 것.
하수는 오직 상대를 치려고 할 뿐이지만, 중수는 그 상대를 상대하는 자신을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공격해오는 상대의 힘을 역이용한다. 먼저 잽을 던져서 상대를 교란하고 한 편으로 상대의 허점을 찾아내는 것이다.
상수는 그 둘이 대칭을 이룬 채로 공동의 토대 위에 올라서 있다는 점까지 이용할 수 있다. 둘은 한 배를 타고 있다. 고수는 그 공유한 토대를 흔드는 파도까지 이용한다. 진정한 경지에 오른 사람은 그 바다 너머의 등대까지 이용할 수 있다.
입자와 질의 차이를 아는 훈련을 해야 한다. 음식의 맛이 입자에 고정된데 비해 멋이 주인과 요리와 손님의 상호작용을 반영하듯이 음악도, 그림도, 문학도, 영화도, 게임도, 그러한 상호작용의 성질을 반영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것을 알아보는 눈을 터득해야 한다.
‘옷이 예쁘다’고 생각하면 입자 마인드에 지나지 않는다. 옷으로 파트너의 주의를 끌고자 하는 것이며, 단지 주의를 끄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옷과 그 옷을 입은 자신과 그 옷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 사이에 상호작용이 있고, 그 상호작용의 수준을 지속적으로 높여가는 것이 진짜다.
소설이 재미있다. 그래서 좋다. 이건 입자 개념이다. 단지 재미로 소설을 읽고 단지 재미로 영화를 본다는 사람과는 대화할 필요도 없다. 대화해봤자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재미라는 양념은 소설 안에 고정된 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이상의 경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설사 내용이 따분하고 지루하더라도 뭔가 독자를 긴장시키고, 흥분시키고, 일어서게 하고, 행동하게 해야 진짜다. 흔들어 깨우는 것이 있어야 한다. 한 명의 독자가 아니라 더 많은 독자와 함께 미래를 열어가는 방향성이 있어야 한다. 항상 다음 단계의 전개가 예시되어야 한다. 영화라도 마찬가지다. 재미가 있다거나 혹은 감동을 준다거나, 혹은 교훈을 준다거나, 혹은 무거운 주제의식이 있다거나 하는 걸로 그치고 만다면 유치한 거다. 영화에 쓸데없이 복잡한 복선이나 암시, 은유, 풍자, 반전, 멜로, 코미디 이런거 잔뜩 들어가면 쓰레기다. 그야말로 산해진미를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려서 맛있게 해놓은 거다.
그런건 상품일 뿐 예술이 아니다. 걸작이 되려면 양념 빼고, MSG 빼고, 감동 빼고, 주제 빼고, 교훈 빼야 한다. 그런 잡스러운 것들이 들어가면 도리어 예술적 확장성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다음 단계가 없기 때문이다. 등대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객과 영화와 감독이 상호작용을 하는, 방향성을 가진, 등대를 바라보는, 다음 단계가 제시되는, 열린 구조를 가진, 진화형 생장구조를 세팅하려면 단순해야 한다. 소문난 걸작 영화들은 유치하다 싶을만큼 단순하고 강렬하다. 진짜라면 그 안에 장치가 있어야 한다. 장치는 대칭구조다. 그 장치가 작동하려면 넉넉한 여유공간이 있어야 한다. 감동, 교훈, 풍자, 주제의식 따위 잡된 것을 최소화 해야 충분한 여유공간을 얻어 나아가 새끼를 치고 아류를 낳고 유파를 만들고 흐름을 타고 시대와 교감할 수 있다. 등대를 바라볼 수 있다. ◎ 등대 – 내부에 단순한 대칭구조를 갖추고 상호작용하며 다음 단계를 바라볼 것. 외부로 뻗어나가는 확장성이 있을 것. 진화형 생장구조를 갖출 것. 아류를 생산하고 계통을 열어가고 유파를 만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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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부라는 알맹이.
'입자'에 대한 생각을 버려야 하오.
학교는 도무지 공부 가르치는 곳이 아니오.
인격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오.
뭔가를 가르치는 곳이 전혀 아니오.
무엇보다 상호작용에 대한 마인드를 얻어야 하오.
학교를 처음 연 사람은 공자 선생이오.
공자는 도무지 가르칠 생각이라곤 없었소.
왜?
임금 한 사람만 잘 설득하면 되는데 피곤하게 뭐하려고 애들을 가르쳐?
미쳤나?
등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쓰잘데기 없는 일을 벌이지 않소.
그런데 이놈의 임금이라는 자가 도무지 말을 들어먹지 않는 것이었소.
이 임금 저 임금 찾아다니며 열국을 돌아다녔는데 한 임금도 제대로 설득하지 못했소.
아니 사나운 임금놈들 때문에 전쟁통에 지나라와 채나라 사이 국경에 갇혀
오도가도 못하고 밥을 굶으며 죽을 뻔 했소.
임금을 이기는 방법은 세력을 키우는 것이며 때문에 학교를 열어 제자를 양성한 것이오.
학교는 무리를 모아 세력을 기르는 곳이며
그 세력에 가담함으로써 세상과 맞서는 자신의 레벨을 끌어올리는 것이오.
그 세력은 오직 진보의 세력 뿐이며 보수 따위는 애초에 해당없소.
인간으로 나서 어떻게 세상과 맞설 것인가?
어떻게 세상과 상호작용할 것인가?
그 상호작용의 레벨을 올려갈 것인가?
세력을 길러야 하며 세력이 진화해야 하는 것이오.
세력을 길러 스스로 진보함으로써 세상과 맞선다는
방향성에 대한 안목없이 교육은 실패할 뿐이오.
구조론은, 기존의 서구 강단학계를 대체할만한 대안을 제시할수 있단 말인가요.
인문학은 어차피 개판이니, 논외로 하고,
물리학을 개편하고, 주도할 대안이 있으신지요.
무슨 뜻인지?
직접 보고도 판단이 안 서는 사람과의 대화는 의미가 없지요.
학교에 아이들을 상대하는 교사에게 적용하면
학생, 학생을 가르치는 교사, 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실, 해당 학년 교육과정, 학교의 교육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