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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1391 vote 0 2006.02.18 (11:09:20)


클래식과 팝

클래식의 의의는 신(神)의 질서를 인간이 재현해 보이는데 있다. 팝의 의의는 그렇게 재현된 신의 질서를 각자의 몫으로 되돌려 주는데 있다. 그러나 팝은 흔히 무질서로 오인되곤 했다.

무질서 처럼 보이지만 실로 무질서가 아니다. 인간 내부 깊숙한 곳에서 신의 질서와 공명하는 접점을 찾아내는데 성공할 수도 있다.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예리한 접점과도 같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상주의와도 같다. 신의 질서와 인간의 열정이 만나는 접점에서 강렬한 인상이 얻어진다.

그 강렬한 인상의 접점에서 본받아 신의 질서를 투영한 인간의 질서를 찾아낼 수도 있다.

팝의 열정 그 자체가 인간이 찾고자 하는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그것은 신과 연결하는 링크요, 끈이요, 매듭이다.

팝의 참된 의미는 클래식과 마찬가지로 신과의 소통에 있다. 신과 소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의 사랑은 그 링크의 고리, 그 접촉의 지점에서 뿌리가 내리고 싹이 자라고  가지를 쳐서 새로운 질서를 창조함으로써 완성된다.

팝은 그 사랑을 완성할 때, 기어이 신의 질서와 닮은 자기 자신의 몫으로 된 질서를 완성할 때 그 목적을 달성한다.

팝의 열정은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하나의 링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위대한 유혹이다. 그 유혹으로 인간의 사랑이 시작된다.

그것은 충동이요 자극이다. 인간 내부에 숨어 있는 욕망의 재발견이다. 자기 내부에 자기 자신도 모르게 잠들어 있던 욕망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인간의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며 그 사랑을 완성할 때 얻어진 질서는 신의 질서와 닮아 있다. 그 방법으로 인간은 신과 소통한다.


학문과 예술

학문은 세계의 질서를 파악한다. 예술은 그 질서를 나의 몫으로 되돌린다. 그 방법으로 인간은 신과 소통한다.

진리는 위대하지만 저 높은 곳에 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을 수 있다. 그리하여 진리와 인간 사이가 차단된다면? 진리가 인간의 삶과 동떨어져 별개의 가치로 존재한다면?  

그래서는 안된다. 진리와 나를 연결시켜줄 그 무엇이 존재해야 한다. 내 안에 저 높은 곳의 진리와 공명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학문이 단지 진리를 파악하고 질서를 규명하는 데서 끝난다면 허무할 뿐이다. 그 질서를 내 안에서 재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의 사랑을 완성시키지 않으면 진리도 학문도 의미가 없다.

학문은 세계의 질서를 파악한다. 그 질서는 인간의 삶과 공명한다. 예술이 신의 진리와 인간의 삶을 교통한다. 그러한 가치의 배달을 우리는 ‘의미’라 부른다.

● 학문은 세계의 질서를 파악한다. 곧 진리다.
● 가치는 진리와 인간 사이에서 의미를 배달하는 징검다리다.
● 의미는 진리의 빛이라 할 가치를 각자의 삶에 투영한다.
● 사랑은 진리의 빛을 내 안에서 재현하는 방법으로 각자의 삶을 완성하기다.

신의 완전성이 전원(電源)이라면 진리는 광원(光源)이고 가치는 빛이고 의미는 그 빛을 받아들이는 컬러(color)고 사랑은 그 컬러로 나의 그림을 그려내기다.

그렇게 그려진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림이 기어이 완성될 때 그 그림은 신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 닮음들이 서로 공명할 때 울림과 떨림이 전해져 온다.

● 하늘 - 신의 완전성
● 태양 - 진리의 보편성
● 빛 - 공동체적 가치(빛은 모두가 공유한다.)
● 컬러 - 각자의 위치에 자리매김 하는 의미(색은 빛과 반응한다.)
● 그림 - 내 몫의 사랑이 완성될 때 그 모습은 신의 완전성과 닮아있으며 둘이 일치하는 접점에서 울림과 떨림이 전파된다.

각자의 삶을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몫으로 완성시켜 주지 않는다면? 다른 어떤 것을 위하여 나의 존재를 소모품으로 희생해야만 한다면?

인간의 삶이 인스턴트 식품과 같이 1회용으로 쓰이고 버려진다면? 그렇다면 진리도 가치도 의미도 소용없는 것이다.

각자의 삶을 각자의 위치에서 제 각각 완성시켜 주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이다. 바로 그것이 팝의 정신이다. 그렇게 모두를 참여시키기다. 그것이 대중예술의 본질이다.

학문은 세계의 질서를 파악한다. 그것이 클래식의 정신이다. 예술은 그 질서를 내 몫으로 되돌린다. 신의 질서를 인간 안에서 재현해 보이는 것이다. 울림과 떨림이 그 안에 있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진리는 위대하지만 그것은 모두의 것이다. 진리는 태양처럼 빛나지만 우리는 태양 가까이 다가갈 수 없다.

사랑은 다만 나의 것이다. 온전히 나의 몫으로 주어진 거다. 사랑은 내 안에서 빛나는 태양과도 같다. 나의 힘으로 꽃 피우지 않으면 안 된다.

예술은 진리의 보편성에서 가치를 유도하고 공동체적 가치에서 각자의 의미를 낱낱이 유도하고 그 의미를 개인의 삶에 반영하여 내면화 해 가는 절차인 거다. 그것이 사랑인 거다.

예술은 사랑으로 가는 머나먼 여정에서 나침반이 되어줄 미추를 구분하는 눈을 얻는 것이다. 미추를 구분할 수 있어야지만, 심미안이 열려야지만, 진짜 사랑을 발견할 수 있다.

모두가 공유하는 보편의 진리를, 나만의 사랑으로 오롯이 내면화 할 수 있다. 온전히 내것이 되는 거다. 그 방법으로 나 자신의 삶을 통째로 하나의 멋진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거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 만나되 진정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전부를 들어 상대의 전부와 만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공감하고, 동감하고, 동의하고, 호응하고 언제라도 한 편이 되어주는 것이다.


학습과 재현

학문은 신의 질서를 학습하려는 것이고, 예술은 그 질서를 인간이 재현해 보이려는 것이다. 클래식은 재현하되 신의 질서에 더 가깝고 팝은 재현하되 인간의 모습에 더 가깝다.

두 가지 욕구가 있다. 하나는 ‘학습에의 욕구’이고 하나는 ‘재현에의 욕구’이다. 둘 중 어느 욕구에 응답할 것인가이다. 학습하려는 이는 가짜다. 재현하려는 이가 진짜다.

속이 비어 있는 그릇은 학습의 방법으로 채울 수 있고, 속이 가득 차 있는 그릇은 그것을 토해내는 방법으로 재현할 수 있다.

예술과 예술에 미치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컨대 여행이라도 다녀온다면 어떨까? 친구들에게 자랑을 해야지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 있다. 그것이 심해지면 여행하기 위해서 여행하는지 아니면 자랑하기 위해서 여행하는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런 심리가 있다. 그 밑바닥에는 욕구가 있다. 그것은 학습의 욕구다. 이는 아홉 살 꼬마가 그날 하룻동안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방과후 엄마에게 모두 이야기 하려고 기를 쓰는 것과 같다.

아이는 하루동안 있었던 일을 엄마나 형에게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그날 학습한 것을 복습한다. 그것은 학습욕구다. 엄마가 그 이야기를 성실히 들어주는 것은 아이의 학습을 분발하게 하는 효과가 있다.

예술은 다르다. 그것은 여행지에서 전부 풀어놓고 오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것을 완전히 비우고 돌아와야 한다. 거기서 무언가 얻어오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돌아와서 누구에게 이야기 할 것이 없다.

왜 사람들은 여행지에서 본 것을 자랑하고 싶어할까? 자기 자신에게 학습 시키려는 욕구 때문이다. 친구에게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가르치는 거다. 선생님이 강조하는 복습을 실천하는 것이다.

학습하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나만의 고유한 미학적 동그라미를 완성하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 동그라미를 가져야 한다. 정상에서 본 풍경에 대한 이미지를 얻어야 한다. 이상주의를 얻어야 한다.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 철학이 있어야 한다. 자기류의 세상을 보는 관점이 열려야 한다. 심미안을 얻어야 한다. 미추를 구분하는 눈을 얻고,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그래야지만 관광객이 아닌 순례자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사람들이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보고 화를 내는 이유는 백남준이 자신의 학습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관객은 거기서 본 것을 엄마에게도 친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다. 본 것이 없으니 복습할 수 없다.

진정한 것은 무엇인가? 재현하려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진짜다. 그들은 자신의 추억 속에 있는 이상주의의 동그라미를 현실에서 재현한다. 그들은 공감하고 또 동감하고 호응하고 또 소통하고 동의하려 한다.

자기 내면 깊은 곳에서의 울림과 떨림을 전파하려 한다. 내 안에 목구멍 까지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을 한 바탕 쏟아내려고 한다. 울컥 토해내려고 한다. 이들이야말로 진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내부에 쌓인 것이 있어야 한다.

나의 꿈은?
나의 가치관은?
나의 철학은?
나의 동기는?
나의 이상주의는?
나의 사랑은?
나의 세상을 보는 눈높이는?

나라는 존재는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배우인가 관객인가? 구경온 관광객인가 아니면 영혼의 순례자인가? 자기 관점이 있는가?

꿈이 있고, 가치관이 정립되어 있고, 동기부여가 되어 있고, 이상주의가 심어져 있고, 세상을 보는 관점이 확립되어 있다면? 재현할 수 있다. 당신의 안에 가득 들어찬 것을 토해낼 수 있다.

그것이 없다면? 투덜거릴 뿐이다. 논쟁이나 붙으려 할 뿐이다. 그런 식으로는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주인공이 될 수 없다.

무엇인가?  당신이 한 곡의 음악을 감상하는 목적이, 혹은 당신이 전람회에 다녀가는 목적이 그것을 학습하려고 하는가 아니면 자기 위치에서 재현하려고 하는가이다.

내 안의 것이 완성되어 있다면, 그것이 무르익은 이는 재현하려 하고 그것이 빈곤한 이는 학습하려 한다.

학습하려 드는 이는 가짜다. 그들은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보고 화를 낸다.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재현하려고 하는 이는 기뻐한다. 자신이 상상 속에서 늘 하던 것을 백남준이 재현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 번 정상에 서 본 이가 그 정상에서 얻은 느낌을 현실의 공간에서 재현하려 한다. 그것이 예술이다.


클래식의 학습과 팝의 재현

예술의 목적은 재현이지만 클래식 관객은 상대적으로 더 학습하려 하고 팝의 관객은 상대적으로 더 재현하려 한다. 클래식의 청중은 작곡가와 연주자에 의하여 미학적으로 완성된 작품을 소비하지만 팝의 청중은 현장에서의 열기가 더하여 함께 무대를 만들어간다.

클래식은 질서가 있고 팝은 질서가 없다. 클래식은 질서를 학습할 수 있고 팝은 질서가 없으므로 학습할 수 없다. 그러므로 팝을, 혹은 재즈를 즐기기 위해서는 체험이라는 준비물이 필요하다.

내가 체험한 만큼, 내 안에 가득 들어찬 만큼 내가 반응한다. 그 체험이 없다면, 내 안이 텅 비어 있다면 내 몸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 현장에서 내 영혼이 울음을 토하지 않는다. 과연 내 안에 준비되어 있는가이다.

외국인이 한국의 풍물을 듣는다면 어떨까? 소음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을 터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다르다. 내 안에 축적된 체험에 의하여 내 몸이 먼저 반응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듯이 체험한 만큼 반응하는 것이다.  

클래식은 질서가 있다. 그 질서는 자연의 질서이며 자연의 질서는 근본에서 신의 질서를 재현하고 있다. 팝은 그 질서를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러므로 팝은 무질서처럼 보인다. 그러나 무질서가 아니다.

팝은, 그리고 재즈는 자기 자신을 악기로 삼아 연주하려는 태도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몸을 연주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영혼을 연주할 수도 있다. 내 안 깊은 곳에서의 신음소리를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술에는 취하는 방법으로도 연주할 수 있지만 자연의 아름다움에 취하는 방법으로 더 많이 그것을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육체의 접촉으로도 그것을 끌어낼 수 있지만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도 더 많이 끌어낼 수 있다.

우리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끌어낼 수 있지만 고요한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도 끌어낼 수 있다.

진짜는 신과의 대화, 그리고 신의 완전성과의 대화다. 그때 당신은 완전히 취할 것이다. 당신의 몸이 노래할 뿐만 아니라 당신의 영혼도 노래할 것이다. 정상에서 본 풍경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이가 그리 할 수 있다.

내 몸에서 소리가 나지 않으면, 감탄사가 나오지 않으면, 울컥 하고 쏟아지는 것이 없다면, 내 영혼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지 못하면 아직은 진짜가 아니다.

꿈이 없고, 바램이 없고, 한이 없고, 눈물이 없고, 체험이 없고, 정서가 없고, 가치관이 없고, 관점이 없고, 희망이 없고, 분노가 없고, 철학이 없고, 이상주의가 없는 자는, 그래서 아무 것도 토해낼 것이 없는 자는, 그 안에 아무 것도 들어차 있지 않은 자는 그 몸도 반응하지 않고 그 영혼도 반응하지 않는다.

묻노니 당신은 내면의 울림통을 열어놓고 있는가? 그 내면의 울림통을 열어 놓은 모든 인간에게는 그것이 의미가 있게 되고 그 순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울림통이 열려 있다면, 자연이 그대를 연주할 수 있도록 온전히 맡길 수 있다면.. 나는 당신이 자신의 힘으로, 당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서의 당신의 진짜 소리를 끌어내는데 약간의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때 당신은 인간의 언어를 잃고 신의 미소를 얻을 것이다.

참된 예술에는 논리조차가 필요하지 않다. 몸이 먼저 알고 영혼이 먼저 반응한다. 울컥 하고 쏟아져 나온다. 동감한다. 동감을 원하는 이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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