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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순간에 타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겁자는 리더의 자격이 없다. 지도자는 전장의 모든 국면을 속속들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있을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여 마음의 준비를 해 두고 있어야 한다.

진중권들이 재빨리 ‘네 탓이야’를 외쳤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 자는 이라크에서 김선일씨의 죽음 때도 ‘네 탓이야’를 외친 전력이 있는 자다. 이런 유형의 비겁자들은 절대로 집단의 리더가 되지 못한다.

‘옹졸한 자여! 아무도 미미한 존재인 너의 탓이라고는 말하지 않을 터이니 두려워 말라.’

계급간 가치의 충돌로 하여 일어난 사건이다. 서로간에 지향하는 가치가 다르다. 이 사회에 서로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그룹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

황빠와 황까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간격이 있다. 이 거리는 절대로 좁혀지지 않는다. 자신이 믿는 가치를 타인에게 강요해서 안 된다. 너는 너대로 너의 길을 가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나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 싸움 절대 빨리 끝나지 않는다. 가치관이 다르므로 어차피 화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 만큼.. 무분별한 확전을 삼가고 이제는 제한전을 시도해야 한다. 연착륙을 유도해야 한다.

우리 강해져야 한다. 담담하게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의연하게 나아가야 한다. 훗날 역사의 심판대에 서서.. 그리고 신(神)의 심판대에 앞에서 최후의 증언자가 되기를 사양할 이유가 없다.

 

그들도 이유는 있다

지식인들이 황우석을 씹는 이유는 자기네들이 피해를 봤기 때문이다. 진중권들은 ‘나는 논문 조작 안했어’라고 말하겠지만 나 같은 사람들은 ‘학자들 세계가 다 그렇지 뭐’ 이렇게 생각하는 거고.. 내가 이렇게 여긴다는 그 자체로 진중권들은 피해자일 수 있다.

젊은 세대도 황우석에 대해서 비판적이다. 황우석이 자기네 앞길을 가로막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필자도 어느덧 40대가 되어버렸다. 인생의 절반을 살아버린 사람의 목표와 이제 막 사회에 뛰어든 사람들의 목표는 다르다.

비유하자면.. 10년 전 40~ 50대 들이.. 이재오, 김문수, 장기표, 이부영, 박계동의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이 DJ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다. 그들 입장도 전혀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DJ가 자기네 출세길을 막았다고 보고 다투어 딴나라로 튄 것이다. 이들 쓰레기들 뿐만 아니라 그 세대는 전반적으로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반면 당시의 20대와 30대는 DJ와 동교동이 앞길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을 해본적이 없다. 2~30대는 당장 출세할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겉으로는 말로 지어낸 명분을 다투지만.. 이렇듯 한꺼풀 벗겨보면 철저하게 이해관계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회의 절대적인 법칙이다. 세상 돌아가는 원리가 그렇다.

황우석을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싸움 역시 이해관계에 따라 진행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황우석 개인의 입장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이건 가치의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승리했을 때 누가 혜택을 볼 것인가를 생각하라.

‘한국모델’을 성공시키려는 사람, ‘우리 세대의 성공모델’을 우리 시대에 완수하려는 사람, ‘노무현 패러다임’을 성공시키려는 사람이 혜택을 본다. 왜인가? 황우석은 우리 세대에 속한 사람들의 ‘공동선’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고인은 왜 목숨을 던졌을까? 고인이 목숨을 던져 얻으려 한 것은 무엇일까? 고인이 황우석 개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것은 결코 아니다. 고인은 목숨을 던지는 방법으로 자기 존재의 무게를 증명한 것이다.

무엇인가? 진중권류 지식인들은 분명한 삶의 동기를 가지고 있다. 그 동기는 개인이 노력해서 출세하고 성공하겠다는 거다. 그러나 민초들은 자기 혼자서 성취하는 것 보다 공동체의 공동선을 통해서 목표를 달성하고자 한다.

고인은 황우석이 저지른 잘못 이상의 지나친 징벌을 받는 현실에 대해서 공동체의 공동선이 파괴되는 모습을 본 것이다. 공동체에의 기여를 삶의 목표로 지향하는 이들에게 공동선의 파괴는 죽음을 강요함과 같다.

저들은 우리를 향하여 말한다.

‘너희들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잘난 나는 출세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지. 나는 나의 출세에서 삶의 의미와 보람을 찾지. 그런데 못난 니들은 뭐할 거지. 너 왜 사니?’

저들의 이러한 잔인한 질문에.. 고인은 목숨을 걸고 대답한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을 우리의 삶의 목표로 삼는다고. 그 공동선에 대한 희망을 부숴놓으려 해서 안 된다.

그것은 이상주의다. 그것은 거대한 희망이고 꿈이다. 그것은 우리 세대가 우리 시대에 대한민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켜 놓는 방법으로.. 우리의 맡은 바 할 일을 다 하겠다는 것이다.

진중권들은 자기가 출세하면 성공이다. 그걸로 삶의 의미를 찾고 보람을 찾는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나 개인의 성취는 전혀 성공이 아니다. 대한민국이 성공해야지만 내가 성공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인은 목숨을 던진 것이다.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대한민국이 성공해야 내가 성공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우리의 삶의 의미와 보람이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그러므로 우리 태산처럼 무거워져야 한다. 고인이 목숨을 던져 지키려 했던 공동체의 공동선을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더 단단해져야 한다. 우리 더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황우석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황우석은 이토록 많은 지지자를 가졌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복 받은 사람이다. 노무현 외에 누가 이렇게 많은 사람들로부터 성원을 받았는가?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황우석은 억울할 일도 서러울 일도 없다.

그러므로 이 싸움은 황우석 개인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황까들을 설득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눈꼽만큼이라도 저들이 우리를 이해해주기를 바랐다면 그건 정말 잘못된 것이다. 누구도 저들의 생각을 바꿔놓을 수 없을 것이며 바꿔놓을 필요도 없다.

그들은 그들대로 분명한 삶의 동기와 희망과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잘난 그들이 출세하고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미 분명한 가치를 가진 이에게 우리의 꿈을 설파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그렇게 살라하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가면 된다. 그것은 공동체의 공동선에 기여하는 것이며 우리가 힘을 합쳐서 우리 세대의 성공모델을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다만 우리의 의지를 과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정도면 역사 앞에 부끄럽지 않은 정도의 성의를 보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할 몫을 했다.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말하는 자들은 모두 희생양을 찾는 비겁자들이다. 사건은 공동체의 위기이고 이는 가치관의 차이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위기관리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일의 심각성을 아는 것으로부터 해법은 찾아지는 법이다. 참으로 심각하다. 심각하다는 사실 그 자체를 인정해야 한다. 심각하다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MBC는 경솔하게도 복마전의 뚜껑을 열어버린 것이다.

비유하자면.. 2차대전은 서구 인문주의의 파산선고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서구 인문주의의 총체적 부실이 파시즘을 낳은 것이다. 이 같은 본질을 직시하지 않고 ‘히틀러 너 때문이야’ 하는 자가 비겁자다.

그것이 어찌 히틀러 한 사람 때문이겠는가? 서구정신의 근본적인 한계였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노자는 무위지도(無爲之道)를 말했고, 석가는 중도(中道)를 말했고, 공자는 중용(中庸)을 추구했다. 동양정신의 전통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사고를 치지 않는다. 동양정신에서 파시즘이 나올 가능성은 전혀 없다.

반면 마르크스는 극단주의를 말했다.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소크라테스도 독배를 마시고 죽었다. 마호멧 역시 극단주의자였다. 원인이 없이 결과가 없다. 그들은 예로부터 극단주의의 전통에 서 있었기 때문에 파시즘을 낳은 것이다.

이 나라의 알만한 지식인들이 한결같이 파시스트의 행동을 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공자에게서 배운 것이 없고, 노자에게서 배운 것이 없고, 석가에게서 배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머리 속에 마르크스와 예수와 소크라테스의 극단주의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저들이 노자의 무위를 배우고, 석가의 중도를 배우고, 공자의 중용을 취했다면 절대로 자신이 책임지지 못할 일을 저지르지는 않는다. 책임이란 것이 임의로 전가한다고 전가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책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존재의 무거움이다. 무거우면? 천리 밖의 작은 지진도 울림이 전해져 온다. 가벼우면? 전해지지 않는다. 그 집단 안에서 가장 무거운 자가 그 집단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풍파를 전부 감수하는 것이다.

태산이 바람을 감수하듯이. 숲이 마침내 그 바람을 진정시키고 말듯이. 바다가 강과 하천의 지류에서 떠내려온 온갖 오물을 모두 가라앉히듯이 가장 무거운 자가 가장 낮은 곳에서 모든 것을 책임지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결국 서구의 그들은 전쟁을 막지 못했다. 전쟁으로 얻을 이익보다 더 큰 인문정신의 가치를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입으로만 전쟁반대를 외치는 것은 참으로 무력한 거다.

무엇보다 가치를 제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전쟁으로 얻을 수 있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모두가 인정하게 될 때 그 전쟁은 막을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인가? 민초들 각자에게 삶의 동기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파시즘은 제압된다. 서구의 잘난 지식인들은 자기네 지식계급의 동기부여에 집착했을 뿐 민초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히틀러가 그 빈틈을 파고든 거다.

이 나라 민초들 개개인에게.. 개개인의 일상적인 삶과 밀접한 삶의 동기를 부여하지 않으면.. 모습을 바꾸어 비극은 계속된다. 진중권들은 그때 마다 누군가를 탓할 것이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 나라의 민초들에게 돌아간다.

공허한 이념이나 입으로만 떠드는 원칙이 아니라.. 개개인의 삶과 밀접한 삶의 동기와 희망과 목표를 제시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MBC는 그 작은 희망들 중 하나를 임의로 파괴한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기 때문이다. 최후의 임무는 끝까지 살아남은 자에게 주어진다. 그 위대한 임무는 우리 중에서 가장 강한 자의 몫으로 돌아간다. 그러므로 우리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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