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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5607 vote 0 2006.02.03 (22:39:28)


오자의 전술과 손자의 전략

전술은 전장(戰場) 안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설명하고 있고 전략은 전장(戰場) 밖에서 일어나는 싸움을 설명하고 있다. 아폴론이 말하는 ‘계 안에서의 질서’가 전술이라면 디오니소스가 말하는 ‘계 밖에서의 질서’는 전략이다.

고대 중국의 병법으로 논하자면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이 병법가의 양대산맥이 된다. ‘오자병법’이 상대적으로 전술 위주의 병법이라면 ‘손자병법’이 더 전략 위주의 병법이라 하겠다.

오자병법을 남긴 전국시대 초나라의 오기(吳起)는 일생동안 76전을 싸워 64승 12무를 기록한 불패의 사나이다. 단 한번도 패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병법이 실제로 쓸모가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출세를 위하여 아내를 살해하는 등 목표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이유로 인심을 얻지는 못하였다. 초나라 도왕(悼王)을 도와 명재상으로 크게 출세했지만 도왕이 죽자 귀족들의 미움을 받아 살해되었던 것이다.

노자의 제자인 증자에게서 유가(儒家)를 배웠으니 가치보다 수단과 방법에 치우친 유가의 폐단이 그의 일생에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오자병법은 한 마디로 ‘신속한 공격에 의한 정면돌파’를 주장하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필사즉생 필생즉사’도 오자병법에 나오는 말이다. 오자병법은 야전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한 실전 위주의 전술이다.

손자병법은 한 마디로 ‘전쟁은 속임수’라는 거다. 그는 ‘싸우지 않고 승리하는 것’을 전쟁의 모범으로 삼고 있다. 이는 야전에서 일어나는 실전과는 관련이 없다. 오늘날 손자병법은 처세술로 새로이 평가받고 있다.

오자병법이 법가와 유가의 사고틀 안에 갇혀 있는데 비해 손자병법의 바탕이 되는 철학은 도가사상이다. 노자는 유(柔)가 강(剛)을 이긴다고 했다. 전국시대 당시만 해도 손자와 오자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으나 오늘날 오자병법은 손자병법의 그늘에 가려 버렸다. 노자의 말대로 된 것이다.

로마교범을 바탕으로 하는 서구의 전쟁론은 오자병법에 가깝고 동양의 전쟁론은 손자병법에 기울어 있다. 여기에는 지정학적인 이유가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탈리아반도만 해도 북으로는 알프스로 막히고 남으로는 지중해로 막혀서 전장이 그리 넓지 않다. 전쟁은 단기전으로 끝나고 이 경우 ‘신속한 공격에 의한 정면돌파’를 주장하는 오자의 병법이 먹힌다.

단기전에는 오자의 전술이 필요하고 장기전에는 손자의 전략이 필요하다. 전쟁이 단기전으로 끝나는가 장기전으로 가는가는 전장(戰場)의 크기와 관련이 있다. 지형이 복잡한 유럽은 전장이 좁고 광대한 평원을 가진 중국은 전장이 넓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를 대부분 점령하고 도시국가들을 묶어서 반로마 동맹을 결성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전장이 너무 좁았기 때문이다. 한 싸움에서 패배하자 좁은 반도 안에서 달아날 곳이 없었다.

반면 중국의 경우 영토가 광대하여 그러한 막힘이 없다. 전쟁은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삼국지연의의 경우처럼 끝없이 전쟁이 이어진다. 이 경우 손자병법을 토대로 하는 고도의 전략이 필요한 것이다.

물론 유럽의 경우 항상 전장이 좁았던 것은 아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패퇴한 이유는 전장이 너무 넓어졌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몽고와의 전쟁을 통하여 동양식 전쟁을 배워두고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군이 모스크바를 비우고 달아난 것은 임진왜란 때 왜군의 수중에 곡식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하여 들판을 불태웠던 청야작전을 연상시킨다. 이는 전장을 한 없이 넓혀버린 경우가 된다.  

이차대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독일이 무모한 도발을 감행한 이유는 미국의 불개입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러시아는 넓음을 알지 못했고 미국의 개입에 대비하지 못했다. 전선이 한없이 넓어져 버렸다. 동양식 전략이 먹힌다.

침략자 부시가 어리석은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것도 그러하다.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전장이 한 없이 넓어져서 군사적인 수단으로는 한계가 있고 외교술을 구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서구에는 그러한 역사의 경험이 적다.

일찍이 동양인들은 싸우지 않고 승리한다는 손자병법의 지혜 덕분에 전략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서구인들은 아직도 전략을 모른다. 그들은 다만 싸워서 이기는 방법을 알고 있을 뿐이다.

● 전술은 돌파하고 전략은 포위한다.  
● 전술은 룰은 존중하고 전략은 룰을 바꾼다.
● 전술은 승부를 결정하고 전략은 결과에 승복하게 한다.
● 전술은 닫힌 공간에서 성립하고 전략은 열린 공간에서 성립한다.

전술적 사고는 링 위에서 싸우는 권투시합과 같이 사방이 막혀있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잘 찾아보면 반드시 어느 한 곳은 열려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열려있는 방향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문명의 발전은 그 열려있는 출구를 향한 부단한 모색이었다. 언제 어느 시대이든 한 쪽은 열려있었고 문명은 그 열린 틈새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해 왔다. 새로운 이동기술의 발명으로 해서 닫힌공간의 지리적인 한계가 극복되곤 했던 것이다.


남성의 전술과 여성의 전략

전술은 유능한 선장이 배를 통제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선장이 배를 통제하는 것은 좋지만 파도를 통제하려 해서는 안된다. 성난 파도에 함부로 맞서다가는 휩쓸리는 수가 있다.

그 파도를 슬기롭게 타고 넘어야 한다. 소용돌이는 비켜가야 하고 여울은 헤쳐나가야 한다. 전략은 유능한 선장이 파도를 타고 넘는 것과 같다.

전술이 선수 개개인이 가진 능력의 최대치를 끌어내는 것이라면 전략은 팀 전체의 유기적인 협력에 의한 플러스 알파의 상승효과를 얻는 것이다. 이때는 선수들 뿐 아니라 관중들의 응원도 기여함이 있다.  

단기전에서는 초패왕 항우의 전술이 승리한다. 싸움은 전장 안에서 일어나고 힘이 센 쪽이 이긴다. 그러나 장기전에서는 한고조 유방의 전략이 승리한다. 굳셈과 부드러움이 대결에서 단기적으로는 남성성이 강조되는 서구의 굳셈이 이기지만 종국에는 여성성이 강조되는 동양의 부드러움이 승리하고 있는 것이다.

남성성은 더 전술적이고 여성성은 상대적으로 전략적이다. 남성은 논쟁하여 상대방의 이기려 하고 여성은 대화하여 상대방의 동의를 구한다. 남성은 설명하려 하고 여성은 동감하려 한다.

남성은 개인의 아이디어에 민감하고 여성은 전체적인 분위기에 민감하다. 남성은 상대방을 제압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고 여성은 함께 공감하고 동의하는 데서 쾌감을 느낀다.

● 남성 : 내가 이겼다.
● 여성 : 너도 그랬니? 나도 그랬어.

남성은 정답을 맞출 때 기뻐하고 여성은 의견이 일치할 때 기뻐한다. 남성은 차별화의 지점에서 통쾌해 하고 여성은 일치하는 지점에서 즐거워 한다. 남성성은 장애물을 제거하고 여성성은 팀을 통제한다.

난관을 돌파하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는 데는 남성의 전술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성과를 최종적으로 수확하고 소비하는 데는 여성의 전략이 필요하다. 다만 사냥감을 잡아오는데 그치지 말고 요리를 해서 축제를 열어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패자가 승복하는가이다. 전술로 승리할 수는 있지만 패자가 승복하지 않으면 싸움은 절대로 끝나지 않는다. 패자로 하여금 결과에 승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전략이 구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아폴론의 역학적 구조가 전술이라면 디오니소스의 미학적 구조는 전략이다. 역학은 장애물을 제거하여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고 미학은 그렇게 얻은 성과를 공동체의 성원 모두에게로 되돌린다.

역학적 구조는 시스템을 최적화하여 ‘닫힌 계’ 안에서 최대한의 에너지를 뽑아내는데 소용되고 미학적 구조는 ‘열린 계’에서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투자승수 효과를 얻는데 사용된다.


고전학파와 케인즈 학파

계획경제가 전술이라면 시장경제는 전략이다. 고전학파가 전술을 위주로 한 계획경제의 한계를 폭로하고 있다면, 케인즈학파는 전략을 위주로 한 새로운 질서의 무한한 가능성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개념과 유사하다. 알고보니 카오스는 무질서가 아니라 질서였으며 그 질서는 전술과 달리 전략이었던 것이다.

● 코스모스 - 중상주의, 계획경제, 개발독재의 전술적 효과
● 카오스 - 방임주의, 시장경제, 신자유주의의 전략적 대응

● 고전학파 - 코스모스의 한계를 폭로, 틀린 전술의 폐기
● 케인즈학파 - 카오스의 혼돈을 극복, 바른 전략의 채택

무엇인가? 카오스의 역동성이 혼돈과 무질서라는 생각은 틀렸던 것이다. 그것은 전술에서 전략으로의 질적인 비약이었다. 고전학파의 방임주의가 실패한 이유는 틀린 전술을 폐기했을 뿐 이를 대체할 바른 전략을 강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잘못된 제도를 폐지했을 때 일시적인 성장세가 있지만 곧 한계가 드러난다. 이는 한 고조 유방이 진시황의 법을 폐지했을 때 얻은 일시적인 성공과 같다. 유방은 결국 진나라 법의 상당부분을 복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방임주의 발상은 잘못된 계획경제를 폐기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중상주의 방식의 계획경제도 성과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단지 그 방법을 오래 지속할 수 없을 뿐이다. 그것은 지속불가능한 경제였다.

왜냐하면 전술은 닫힌계의 한정을 전제로 하는데 경제의 지속적인 발전은 그 계를 넘어서는 형태로 진행되기 때문이다. 계의 한정은 자급자족의 완전경제를 꿈 꾸지만 자원의 부족과 시장의 협소로 하여 그러한 시대는 농업과 같은 일부에서 가능할 뿐 근본에서 실패로 돌아간다.

방임주의는 노자의 무위자연(無爲自然)과도 통한다. 그러나 이는 개체 내에 동력원이 있을 때에 한정하여 유의미하다. 움직이지 못하는 바위나 가만히 서 있는 그루터기가 인간의 '무위'에 '자연'히 호응하지는 않는다.  

진정한 무위는 타인의 영역에 개입하지 않고 바깥에서 환경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이는 살아있는 생명을 다스리는 데는 사용된다. 자본주의의 자유방임은 시장이 살아있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아프리카나 중남미의 후진국에서 죽은 시장을 방임하면 시장은 여전히 죽어있을 뿐이다. 시장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는 소년의 단계 까지는 적극적인 개입이 필요하다. 이 시기에는 코스모스의 중상주의, 계획경제가 성공한다.

중남미 후진국에서 좌파정권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 국가들은 아직 시장이 살아있지 않다. 시장이 죽은 상태에서 노자의 무위는 작동하지 않는다. 중남미에는 지금 노자가 아닌 공자가 필요하다.

힘이 질서라면 미(美)는 무질서와 같다. 그러나 오해였다. 살펴본 바와 같이 미(美)는 자유방임의 무질서가 아니라 고도의 전략적 통제였던 것이다. 노자의 무위는 무대책이 아니라 직접 개입하지 않고 간접 영향을 미치는 고도의 전략적인 대응이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의 승리는 자유방임의 승리가 아니라 고도의 전략적인 경제행위를 통한 승리여야 한다. 고전학파 보다 케인즈학파가 더 장기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고 더 폭넓은 시야를 갖고 있음이 분명하다.

요는 닫혀 있는가 열려있는가이다. 닫힌계에서는 계획경제와 개발독재가 성과를 낸다. 예컨대 농업의 영토는 한정되어 있다. 이는 자급자족의 닫힌 경제다. 그러나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열린계로 변화되었다.

물은 무한정 존재한다. 하늘의 공기도 무한정 존재한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어부들은 바다는 한 없이 넓고 고래는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석유도 한 때는 무한정 존재하는 듯 했다.

과학기술의 발전 가능성 또한 무한히 열려있는 듯이 보여진다. 당장이라도 인류가 저온핵융합 기술의 개발에 성공한다면 에너지난은 극복되고 닫힌계는 열린계로 변하게 된다.

신기술의 발전은 닫힌 경제를 열린 경제로 변화시켜 왔다. 물론 무한정 열려있지는 않다. 분명한 한계가 있다. 지하자원은 언젠가 바닥이 난다. 그러나 역사의 경험칙에 의하면 90프로 닫혀 있어도 어딘가 한 곳은 반드시 열려 있었다.

문명은 그 열린 지점을 따라 끊임없이 문명권의 중심축을 이동한다. 그 10프로의 열린 곳을 찾아내는 국가가 문명의 발전을 선도한다. 2006년 이 시대에 어느 부분이 열려있는가? 인터넷으로 열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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