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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0635 vote 0 2005.12.27 (18:04:50)


학문의 역사


오리엔탈리즘의 문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중의 하나로 이런 것이 있다. ‘동양과 서양이 영원히 만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국이 독자적으로 근대문명을 이룩하였을까 아니면 여전히 봉건사회를 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는 말이 있다. 그렇지 않다. 역사학에서도 가정은 중요한 추론방법 중의 하나이다. 문제는 오류의 가능성이다. 가정의 방법이 잘못된 결론을 이끌어낼 위험성이 의외로 크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중국이 독자적으로 근대문명을 이룩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다. 그러나 그 원인이 소위 말하는 아세아적 정체성(停滯性) 때문인 것은 전혀 아니다. 서구인이 인종적으로 우월하고 동양인이 열등하기 때문이 아니다.

※ 아세아적 정체성(停滯性)이란? 아세아 특유의 가부장제도에 기초한 가족문화가 나약하고 순종적이며 노예적이어서 아세아에서 독립적인 근대문명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비슷한 주장이 친일파들에 의해서도 제기되었던 바 조선인은 원래 노예근성이 있어서 독립이 불가능하다는 설이 유포되었다.

문명이라는 개념에 대한 명징한 이해가 필요하다. 문명 차원에서 볼 때 동양과 서양을 50 대 50으로 놓고 보는 관점은 잘못 되었다. 청나라 이후 중국의 인구가 급증했지만 단순 인구비교로 동양과 서양을 논한다면 터무니 없다.

서구문명은 르네상스 이래 아랍문명과 이집트문명 등 다양한 동양문명의 자양분을 충분히 받아들인 것이다. 반면 중국은 오랫동안 지리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유럽도 고립되어 있었다면 여전히 중세의 암흑시대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떤 ‘고립계’ 안에서 문명이 자가발전 한다는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문명의 발전은 게가 허물을 벗듯이 비약적으로 일어나는 법이며, 이러한 도약의 계기는 반드시 외부에서 주어져야 한다.  

무엇인가? 문명의 발전에는 일정한 물리적 조건이 존재한다. 서구가 근대문명을 일구어낼 수 있었던 것은 까다로운 여러 가지 문명의 필요충분 조건들을 두루 충족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서구는 아랍과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그리이스와 로마 그리고 이집트인과 유태인의 지혜를 빌릴 수 있었던 반면 중국은 지정학적 조건에서 불리했다. 예컨대 날씨가 무덥고 지리적으로 격리된 아프리카 중남부에서 문명은 일정 한도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하다.

문명이 발전하기 위한 필수 구성요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 중의 하나나 둘이 결핍된 채로 문명의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 여러 개의 문명의 생장점을 가져야 하는데 중국은 그런 조건들을 갖추지 못했다.

결과론의 함정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유럽은 결과적으로 근대문명을 건설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서구인의 내부에 문명을 건설할 어떤 잠재성이 깃들어 있기 때문인 것은 전혀 아니다.

마야문명과 같이 고립된 계 안에서는 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이 불가능하다. 중국은 마야처럼 고립되어 있었고 그러한 고립의 원인 중 하나는 18세기 까지 중국이 가장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이 발전한 이유 중 하나는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뒤져 있었기에 앞선 아랍이나 중국을 배우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럽문명은 다시 뒤처지게 된다. 가장 앞서 간다는 사실 그 자체가 어느 면에서 고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문명은 하나의 대륙, 하나의 국가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이동하고 있다. 최초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성립한 문명이 이집트를 거쳐 그리이스와 로마로 이동했고 스페인으로 옮겼다가 다시 프랑스와 독일로 확장된 후 영국을 거쳐 미국으로 이동하고 있다.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은 문명이 항상 큰 강이나 바다를 끼고 성립하며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대륙과 섬, 혹은 반도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필연적이고 구조적인 이유가 있다.

문명의 필수 구성요소들 중 하나인 이동기술에서 바다와 강을 이용하는 선박의 비중이 크기 때문이다.

※ 문명의 필수 구성요소들은? 이동기술, 전쟁기술, 농사기술, 야금기술, 종교와 문화이다. 이 중에서 이동기술은 항해술, 조선기술, 도로와 역참, 말과 수레, 자동차와 비행기 그리고 통신기술을 들 수 있다. 강과 바다 그리고 섬과 반도라는 지정학적 요건은 선박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동기술의 발전을 촉발하는 핵심적인 요건이 된다.  

중국문명이나 마야문명과 같이 바다를 활용하지 못하고 내륙에 고립된 문명은 다른 문명권과의 접촉이 부족해지기 때문에 숙명적으로 정체를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지구촌 인류문명은 최초 메소포타미아 지방에서 출범하여 지구를 한 바퀴 돌아 미국을 거쳐 일본에 상륙하였다가 한국을 거쳐 다시 중국으로 진입하여 가고 있다. 무엇인가? 구조적인 이유로 조만간 동양이 서구를 추월할 수 밖에 없게끔 지구촌 인류문명은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학문의 시원은 무엇인가?

발상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연역법과 귀납법이다. 논리학과 수학은 고도의 추상을 필요로 하는 면에서 연역추론에 크게 의존한다. 반면 지리학이나 역사학 따위는 경험을 위주로 하는 바 관찰과 통계의 귀납추론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서구가 발달한 배경에는 논리학과 수학이 자리하고 있다. 반면 동양이 낙후한 배경에는 논리학과 수학의 부재라는 문제가 있다. 물론 동양에도 논리학과 수학이 있기는 있었다. 그러나 주목받지 못했다.

● 서구의 성공 - 연역추론(논리학과 수학 등 이론 위주의 순수학문)
● 동양의 정체 - 귀납추론(한의학의 경험방처럼 이론이 부실한 실용학문)

고도의 추상적 사고를 필요로 하는 연역추론을 발달시키지 않으면 뉴튼의 고전역학이 연금술의 한계를 뛰어넘은 예와 같은 비약적인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이 경우 근대과학을 만들 수 없다.

경험방을 위주로 하는 한의학에서 보듯이 동양의 학문은 확실히 이론이 부실했다. ‘어떻게든 환자를 치료하기만 하면 된다’가 아니라 어떤 원인에 의해 환자가 치료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스승이 이룩한 성과가 제자에 의해 재현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이론이며 그 이론은 순수한 연역추론에 의해 가능하다. 관찰, 수집, 실험, 통계 따위의 방법은 보조적인 것이다. 학문의 근본은 연역에 있으며 그것은 논리학과 수학이다.

논리학과 수학의 바탕에는 근대과학의 방법론이라 할 요소환원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요소환원주의를 성립시키는 것은 원인과 결과의 상호관계로 설명되는 인과율이다. 서구문명은 인과율로 시작하고 끝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누가 출발점을 찍었는가?

연역이란 무엇인가? 데카르트의 제 1원인과 같다. 그것은 최초의 출발점을 찍는 것이다. 서구의 경우 그것이 있었다. 그러한 발상법이 존재하였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성경의 창세기다. 창세기는 순수하게 연역적인 방법으로 씌어졌다.

건축가가 건물을 설계하듯이 누군가가 작심하고 천지창조를 설계한 것이다. 그 방법은 실험과 관찰, 수집과 분석의 경험적 귀납이 아니라 인과율에 기초한 논리적 당위에 따라 이루어졌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에 의해 빛이 있었고, 그 다음에 우주가 창조되었다. 이 순서는 논리적인 인과의 순서이므로 이 순서를 뒤집을 수는 없다. 예컨대 아담과 이브를 먼저 창조하고 나중 우주를 창조한다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창세기는 어떤 사업에 착수함에 있어서 초기 단계에 해야할 일의 순서를 지정해주고 있다. 어떤 사업을 하든 최초에 ‘말씀’이라는 동기부여가 있어야 하고 ‘빛’이라는 핵심역량이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에 천지창조라는 공장을 짓고서야 비로소 아담과 이브라는 종업원이 고용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난 수천년간 무수히 많은 서구인들에게 창발성의 영감을 불러 일으킨 연역적 사고의 제 1 원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연역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조금 깊이 들여다 보면 창세기는 모순에 가득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 하나의 결정적 아이템은 모세의 출애굽 사건이다. 이는 무에서 유를 창조함과 같다. 하나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백성과 언어와 영토와 이념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이 창세기의 방법으로 초기조건을 예시하여 출발점을 찍었다면 모세가 국가건설의 방법으로 이를 재현한 것이 출애굽 사건이다.

창세기는 말씀, 빛, 천지창조, 에덴동산, 아담과 이브, 선악과, 추방, 카인과 아벨의 스토리로 전개된다. 여기에 어떤 일이 처음 시작되고 전개하는 발단, 전개, 갈등, 위기, 결말의 1사이클 서사구조가 숨어 있는 것이다.

모세는 최초에 백성을 얻었고 다음 십계명의 언어를 얻었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약속하는 방법으로 이념을 제시하여 공동체에 동기부여를 하였으며 최후에 시나이산 아래에서 영토를 획득했다. 이러한 과정은 연역적인 전개이다.

여기서 두드러진 것은 ‘질서’의 개념이다. 최초에 질서가 주어지고 다음에 비로소 그 질서를 응용하는 것이다. 최초에는 말씀 곧 언어로부터 시작한다. 십계명으로부터 시작하기다. 이는 질서를 상징한다. 하나의 공동체가 출범함에 있어서 이념이라는 언어, 곧 동기부여로부터 질서를 얻어 출범하는 것이다.

이념이 없으면? 말씀이 없으면? 동기부여가 없으면? 질서를 얻을 수 없다. 질서가 없으면 일의 우선순위를 지정할 수 없다. 그 경우 뒤죽박죽이 되어 사업은 실패하고 만다. 공동체는 깨지고 만다.

그 질서의 개념을 그리이스 신화에서는 코스모스와 카오스로 설명하고 있다. 곧이어 여러 신들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각별히 포착되어야 할 점은 그리이스 신화는 창세기나 출애굽 사건과 달리 초기 단계에서 코스모스의 개념을 제기하고는 있지만 그 전개에 있어서는 충분히 카오스적이라는 점이다.

헤브라이즘이 코스모스적 요소의 창발성의 영감을 주었다면 헬레니즘은 반대로 카오스적 요소의 지적 영감을 던져주고 있다. 코스모스의 질서는 신(神)의 완전성을 표상하고 카오스의 자유로움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표상한다.  


만유의 아르케는 무엇인가?

최초의 선각자는 ‘만유의 아르케는 물이다’고 선언한 탈레스가 되겠다. 아르케(arche)는 아트(art)와 같은 어원의 말로 ‘잇는다’는 뜻이 있다. 무엇인가? 연역은 인과율에 기초하며 원인과 결과를 이어서 연쇄적인 사슬구조로 만드는 연결고리가 곧 아르케(arche)인 것이다.

아르케는 원인과 결과의 연결로 하여 성립하는 인과관계를 의미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질서다. 코스모스다. 사물의 바탕에 내재한 근원의 질서가 만유의 아르케인 것이다. 탈레스의 언설은 짧지만 거기에는 각별한 의미가 들어 있다.

- 만유의 아르케는 물이다.
- 세상은 인과관계라는 사슬구조에 의해 연역적으로 전개한다.
- 세상은 인과관계라는 하나의 보편적 질서에 의해 크게 통일되어 있다.
- 통일된 질서 내부에는 다양한 응용과 변주의 가능성이 잠재하고 있다.
- 하나의 통일된 근원의 질서 안에서 다양한 응용가능성이 점차 꽃을 피우는 형태로 우주는 전개하고 있다.

탈레스는 단지 ‘만유의 아르케는 물이다’고 짧게 말했을 뿐이지만 피타고라스에 의해 ‘만유의 아르케는 수(數)다’ 혹은 프로타고라스에 의해 ‘만유의 척도는 인간이다’ 혹은 플라톤에 의해서 ‘만유의 아르케는 이데아다’는 형태로 다양하게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탈레스는 다만 물을 말했다. 물은 흐른다. 역사는 흐른다. 물은 식물을 생장시킨다. 인류의 문명은 식물이 자라듯 성장한다. 물은 다양한 지류를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바다로 크게 통일된다. 인류문명은 다양한 민족문화의 특수성을 유지하면서도 크게 하나의 보편적인 인류문화로 통일되고 있다. 탈레스가 말한 ‘물’에는 무수히 많은 진리의 특성이 숨어 있는 것이다.

그 물은 피타고라스에 의해 수(數)로, 그리고 플라톤에 의해 이데아로 발전하고 있는 바, 동양에서는 노자(老子)의 유(柔)가 강(剛)을 이긴다고 말했을 때의 유(柔)를 의미하면서 또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했을 때의 자연(自然)을 의미함과도 통한다 하겠다.

정리하면 서구정신의 바탕에는 세 가지의 연역적 발상법이 존재하고 있다. 하나는 성경의 창세기다. 둘은 모세의 출애굽 사건이다. 셋은 그리이스 신화에서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개념이다.

여기서 코스모스의 개념은 탈레스의 물로, 그리고 피타고라스의 수로, 또 플라톤의 이데아로 발전하고 있으며 마침내 뉴튼의 고전역학으로 그리고 마르크스의 사회과학 이론으로도 발전하고 있다.

또 여기서 갈라진 한 갈래가 코스모스에 대비되는 카오스의 개념이다. 이는 프로타고라스의 ‘만유의 척도’로서의 인간으로 표상하며 이 흐름은 니체의 ‘생의 철학’에서 그리고 근대의 실존주의 사상과 포스트 모더니즘에 까지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코스모스 - 신의 완전성의 표상, 창세기, 출애굽사건, 플라톤의 이데아
● 카오스 - 인간의 자유의지의 표상, 프로타고라스의 만유의 척도는 인간이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코스모스에 근접하고 있다. 서구의 클래식 음악과 그 문화는 코스모스에 다가서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서구의 그들은 고전음악 속에서 신의 완전성과 그 조화로움을 발견하고 찬탄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이스의 다양한 신화들은 너무나 카오스적이다. 그들은 신으로 불리고 있지만 실로 인간에 가깝다. 신이라면 결점이 없어야 한다. 그들은 무결점의 신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니체가 말한 초인에 가깝다.

카오스적 요소가 강조된 바 그리이스 신화는 너무나 인간적이다. 니체는 이를 아폴론적인 요소와 디오니소스적인 요소로 설명하고 있다. 아폴론은 코스모스에 가깝고 디오니소스는 카오스에 가깝다. 아폴론은 신에 가깝고 디오니소스는 인간에 가깝다. 아폴론은 클래식에 가깝고 디오니소스는 팝에 가깝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고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을 쓴 것은 코스모스의 아폴론 보다는 카오스의 디오니소스를 강조한 바 되겠다.  

- 만유의 아르케는 질서(코스모스)다. 반대편에 무질서(카오스)가 있다.
- 질서는 신의 완전성을 표상하고 무질서는 만유의 척도로서의 인간을 표상한다.
- 신성과 인간성, 완전성과 불완전성의 변증법적 대결로 설명할 수 있다.
- 신의 완전성을 엿보는 아폴론의 클래식과 인간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디오니소스의 팝으로 대비시켜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비교하여 볼 때 동양정신은 너무나 인간적이다. 동양에는 클래식 문화가 없거나 빈곤하다. 클래식 정신의 출처가 되는 아폴론의 개념, 코스모스의 개념 그리고 창세기의 개념, 출애굽의 개념이 없거나 약하다.

● 클래식의 코스모스 - 논리학과 수학으로 신의 완전성에 다가선다.
● 팝의 카오스 - 응용 및 실용학문으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다가선다.

서구의 경우 클래식과 팝의 문화가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다. 신의 완전성을 강조하는 헤브라이즘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헬레니즘이 팽팽하게 대결하고 있다. 아폴론과 디오니소스가 대결하며 변증법적인 발전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동양정신에는 결정적으로 이러한 필수 구성요소들 중 몇 개가 빠져있거나 약하다. 혹은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동양정신의 결격사유

일본의 옛 학문들을 검토해 보면 중국의 제자백가와 유사한 사상이 거의 대부분 일본에도 하나씩 짝을 지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 논리학을 추구하는 명가가 있다면 일본에도 유사한 것이 있고 중국에 겸애를 주장하는 묵가가 있으면 일본에도 이와 유사한 것이 있다. 심지어는 근래의 포스트 모더니즘 비슷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그러한 다양성들은 일본문화의 바운더리 안에서 인문정신의 꽃을 피우지 못했다. 일본문화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죽음에 대한 찬미를 특징으로 하는 사무라이 문화 뿐이다.

일본의 인문주의는 쇼군의 칼 아래 철저하게 굴복하였던 것이다. 일본은 열도 안에서 독자적인 문화적 다양성의 싹을 갖추었으나 맹아 단계에서 그쳤을 뿐 그 꽃은 피우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중국에도 논리학과 수학이 있었지만 맹아 단계에서 좌절하고 말았다.공자의 유교와 노자의 도교 그리고 불교에 의해 짓밟혀졌다. 중국인들에게 아폴론적인 영감을 던져주어야 했던 클래식한 견해들은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다.

중국에도 탈레스와 피타고라스와 플라톤과 프로타고라스가 있었겠으나 서구와는 달리 중국문명의 판구조 자체가 지정학적 조건에서 매우 협소하였기 때문에 그 명을 보존하지 못하고 사멸하였던 것이다.

왜인가? 유럽이라면 지중해와 알프스와 도나우강 주변의 숲으로 나눠져서 문화적 생장점이 여러개 존재할 수 있었지만 중국의 경우 중앙의 평원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어서 다양한 문화의 생장점들이 진시황의 한 칼에 일제히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이후로도 중국은 단일한 거대왕조가 반복하여 등장하는 통에 유럽과 같은 다양한 문화적 생장점을 존속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럽 또한 지나친 기독교 일변도의 문화적 패권이 유럽문화의 다양성을 질식시켜 가고 있다.

중세 암흑시대에 유럽은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같이 어둠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으나 이탈리아 반도는 유럽 대륙의 군사적 중심과 상당히 떨어져 있었기에 문명의 해방구로 살아남을 수 있었것이다.

만약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알프스 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탈리아에서 불어오는 자유의 공기는 프랑스와 독일을 지배하고 있던 신흥왕조의 지배자들을 위협하였을 것이고 이탈리아의 자치도시들은 사나운 게르만족의 말발굽 아래 짓밟혔을 것이고 그 시점에서 문명의 해방구였던 피렌체는 파괴되었을 것이다.

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는 타 문명권과 연결되는 문명의 생장점들이 다수 존재해야 한다. 유럽은 그것이 있었고 중국은 그것이 없거나 적었다. 중국의 피렌체들은 그 자유의 공기로 하여 전제군주들을 위협하였기에 진시황과 같은 폭군에 의하여 철저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지금 침략자 부시의 폭정이 인간의 상상력을 억압한다는 점에서 진시황의 칼 역할을 대리하고 있는 즉 서구의 문화적 생장점들도 이제는 많이 사멸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서구정신은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대립지점을 잃어버리고 점차 획일화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의 창세기

천손족 설화는 북방계 설화이고 난생설화는 남방계 설화이다. 한국에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북방계 천손족 설화와 신라를 중심으로 한 남방계 난생설화가 공존하고 있다. 중국의 신화들은 신농씨, 축용씨, 여와씨, 복희씨, 반고씨 등을 말하고 있으나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무엇인가? 중국사에는 창세기가 없거나 약하다. 또 출애굽사건이 없다. 즉 하나의 국가 혹은 문명이 탄생하는 초기조건의 설계과정에 대한 연역적 인과율의 전개가 충분히 서사되어 있지 않다.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개념이 없다.

중국인들은 만유의 아르케를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들은 지나치게 현실주의자, 인간주의자였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신의 완전성이 아니라 인간이 만유의 척도임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 중국에는 너무나 많은 프로타고라스들이 있었다.

공자에 의해 주장된 중국의 윤리학은 지나치게 인간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들은 신의 뜻을 알아내기 위한 목적의 클래식한 문화를 탐구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유교사상에 아폴론적인 요소가 전혀 없지는 않지만 서구에 비해 약하다.

중국정신을 대표하는 것은 무엇일까? 흔히 공자(公子)를 말하지만 나는 노자(老子)라고 생각한다. 왜인가? 공자가 강조한 아폴론의 질서 곧 연역적 전개의 제 1원인은 주나라의 이상정치, 혹은 요순의 이상정치인데 이는 너무나 초기조건에서 멀어진 설계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창세기가 아담과 이브의 등장 이전의 형이상학적 상황을 말하고 있는데 비해 공자는 아담과 이브 시절에서 한참이나 멀어진 문명시대의 사건을 제 1원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식이라면 이미 아폴론에서 멀어졌다. 이 방법으로는 충분한 연역적 사고를 전개할 수가 없다.

노자는 공자보다 늦은 시대의 인물이지만 실로 앞선 생각을 보여주고 있다.(공자와 노자가 동시대의 사람이라거나 혹은 공자가 노자의 후배라는 설이 있지만 이는 도교 쪽에서 날조한 바 틀린 견해로 본다.) 공자가 말한 요순이나 주나라 이전 시대의 초기조건을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가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듯이 노자 역시 말씀으로 시작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 말씀이 데카르트의 제 1원인에 해당함은 물론이다. 이로서 기점을 삼아 인과율의 사슬에 아르케(arche)의 고리를 걸어 연역적으로 전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의 언급은 너무나 간명하다.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 이 한 줄로 성경의 창세기와 모세의 출애굽을 갈음해버린  것이다. 이에 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이 노자의 부족한 면을 겨우 보충하여주고 있는 정도이다.

장자(莊子) 내편(內篇)에서 혼돈지덕(混沌之德)의 우화는 그리이스 신화의 코스모스와 카오스 개념을 닮아 있다. 남해의 지배자 숙과 북해의 지배자 홀이 중앙의 지배자 혼돈(渾沌)을 방문하여 잘 대접받고는 그 은혜를 갚기 위하여 혼돈의 몸에 인간의 일곱구멍과 같은 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주었는데 하나씩 구멍을 뚫어나가기 7일 만에 혼돈이 죽고 말았다고 한다.

인간의 몸에 있는 일곱 개의 구멍은 건축에 비유하면 7개의 출입문과 같다. 문은 사람이 드나들기 위한 것이며 여기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일곱 개의 구멍은 곧 복잡한 질서를 의미하는 것이며 혼돈은 그 질서에 반대되는 즉 신묘한 조화를 의미하겠다.

장자의 혼돈에 대한 지지는 아폴론적인 질서에 대하여 디오니소스즉인 무질서 혹은 신의 완전성에 대하여 보다 인간적인 요소에 대한 지지가 되겠다. 결론적으로 도교주의는 너무나 인간적인 철학인 것이다.  

프로타고라스가 만유의 척도는 인간이라고 말했다면 노자와 장자는 처음부터 그런 전제로 출발하고 있었다. 노자의 계승자로 겸애설의 묵자에 맞서 위아설(爲我說)을 주장한 양주(楊朱)가 있었는데 그는 ‘내 몸의 터럭하나를 뽑아 천하에 이득이 된다해도 그 터럭을 뽑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여기서 천하(天下)의 개념이 문제로 된다. 천하는 곧 천하의 질서를 의미한다. 이는 음양(陰陽)의 질서로 출발하여 밤과 낮의 질서, 하늘과 땅의 질서, 임금과 신하의 질서, 강자와 약자의 질서, 남자와 여자의 질서로 연역된다.

양주가 천하(天下)를 부정했다 함은 이러한 보편질서를 부정했다는 것이며 곧 아폴론의 부정, 신의 완전성에 대한 부정, 초기조건에 대한 부정, 클래식에 대한 부정, 지방의 중앙에 대한 부정으로 연역된다.

무엇인가? 오늘날 대다수 중국인의 사상은 공자의 유교가 아니라 노자의 도교에 가까우며 그 사상의 기초는 철저하게 아폴론의 부정, 디오니소스의 긍정인 것이다. 중국인들은 니체가 말하기 2천년 전에 이미 신은 죽었다고 선언해 버렸다.

그 결과로 아폴론과 디오니소스의 변증법적 대결은 중국에서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그 결과로 논리학이나 수학과 같은 아폴론적 학문이 배척된 것이다. 중국의 그들은 신의 완전성에 다가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의 완전성 곧 클래식의 분야는 동양에서 충분히 탐구되지 않았다. 그 결과로 동양정신은 지도 없이 순례의 길을 떠난 셈이며 설계도 없이 건축한 셈으로 되었다. 그 건축은 붕괴할 수 밖에 없고 그 순례는 길을 헤매게 된다.

노자가 지나치게 인간적인 데 비해 공자는 그래도 신의 완전성을 일정부분 탐구하고 있다. 그러나 공자 역시 형이상학을 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사후 세계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우주의 탄생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공자의 윤리학은 질서를 주장하고 있으나 그 질서는 우주의 질서가 아니라 정치분야에 한정되는 권력의 질서에 가깝다. 공자의 유교주의는 지나치게 실용적인 학문이었던 것이다.

공자의 부족한 부분을 도교에서 빌어 보충한 것이 한나라 때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이며 또 송나라 때 주자의 성리학이다. 무엇인가? 노자와 장자는 지나치게 인간적인 요소에 기울어 있지만 그래도 도교에는 최소한의 우주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공자는 사회의 질서를 강조한 면에서 아폴론적인 지향을 보이고 있지만 유교에는 우주론이 아예 없다는 점이 문제로 된다.

동중서의 천인감응설은 클래식한 신의 완전성과 팝적인 인간의 욕망과 사이에서의 조화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코스모스와 카오스의 변증법적인 통일과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선명하다. 이는 약간의 발전이 된다.

동양정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불교 역시 형이상학에 소홀하고 있다. 처음부터 형이상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문제는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가 인도철학의 형이상학을 상당부분 폐기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인도에서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발달한 이유는 역시 석가가 형이상학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중국에서 유교가 국가적으로 채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 도교가 더 신앙된 이유와 같다. 형이상학이 없는 사상은 인간정신의 창발상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오늘날 재야 학계에서 논의되는 바를 보아도 유교주의 보다 도교주의가 더 인기가 있는 점이 그러하다. 예컨대 김용옥의 동양학 강의에 있어서도 공자보다 노자가 더 인기가 있다. 우주론의 형이상학이 없어서는 원초적으로 인간의 창발성이 억압되고 마는 것이다.  

물론 석가 이후에 성립하고 있는 금강경에서 형이상학의 부분을 상당히 보완하고 있지만 반야심경의 유명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은 ‘만유의 아르케는 물이다’는 탈레스의 탐구보다 훨씬 발전된 형태라는 점에서 초기조건의 관찰이 소홀했다는 점은 어쩔수 없는 불교사상의 약점이 된다.

● 도교 : 노자의 명가명, 장자의 혼돈 - 창세기의 말씀, 그리이스 신화의 코스모스와 카오스에 가깝다.

● 유교 : 요순시절의 이상정치, 주나라의 이상정치 - 초기조건을 규명하는 우주론이 아니라 문명이 발달한 역사시대의 모델이다. 이런 중간 모델로는 인간의 창발성을 자극할 수 없다.

● 불교 : 석가의 연기설과 금강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 - 힌두교 리그베다의 웅대한 우주론이 강한 원시성을 보여주고 있는데 훨씬 발달한 후대의 이론으로 인간의 창발성을 자극하기 어려운 중간 모델의 성격이 있다.

인간의 창발성은 보다 창세기에 가까울수록 그 단순성으로 하여 강력하게 자극된다. 불교나 유교의 이론은 전문가라야 접근이 가능한 복잡하고 발달된 이론이다. 이것으로는 인간의 창의력을 자극할 수 없다.

학문의 피폐가 이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학문은 상당히 연역이며 연역은 애초에 출발점을 잘 찍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나 석가는 너무 뒤의 발달된 영역에 제 1원인의 연쇄적인 링크가 시작되는 기점을 찍었다. 노자의 기점은 부실했고 아폴론 보다 디오니소스에 기울어졌다. 신의 완전성에 다가선다는 커다란 밑그림을 잡아주지 못하고 있다.

금강경은 MS 도스를 거치지 않고 바로 윈도우 버전을 발표한 것과 같이 순서가 안맞는 것이다. 이 경우 소스를 공개하지 않은 셈으로 되어 사유의 업그레이드 버전의 출현이 불가능하다. 도스라면 누구나 손쉽게 응용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판매할 수 있지만 윈도우는 그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MS의 윈도우 발표 이후 응용소프트웨어 시장은 거의 죽어가고 있다.

초기 설계를 드러내어야 한다. 만유의 아르케를 공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후학들에 의한 버전업이 가능하다. 석가와 노자와 공자는 공통적으로 소스를 공개하지 않았다. 결론부터 바로 들이대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 결과 동양에서 학문의 응용과 업그레이드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했고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 텔레스가 해냈던 버전 업그레이드의 역할을 공자의 제자들과 노자, 석가의 제자들은 충분히 하지 못했다.

창세기의 부재, 우주론의 부재, 클래식 개념의 부재, 신의 완전성에 대한 접근의 부재가 소스를 공개하지 않은 것과 같은 효과를 내었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들과 석가의 제자들은 고작 스승이 남긴 문헌을 암송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동양의 모든 학문은 실용학문으로 되었다. 국가경영과 왕조의 통치에 실용적인 공자의 윤리학과 질병퇴치에 효과적인 도교의 의학 그리고 효과는 불분명하지만 매우 실용적이라 생각되었던 풍수지리설 정도만이 전승되고 있고 수학과 논리학은 실용적이지 못한 학문으로 치부되어 사장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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