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이란 무엇인가? ‘삶을 디자인하기’ 우리는 막연히 ‘존재’라고 표현하여 말하지만 실로 존재(存在)가 무엇을 뜻하는 건지.. 제대로 그 의미를 꿰뚫어보고 아는 사람은 드물다. 존재의 존(存)은 명목이고 재(在)는 위치다. 명목은 자격, 위치는 포지션이다. 구조를 보아야 한다. 공간에서의 구조 말이다. 요소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지다. 어떤 자격, 어떤 포지션으로 그대는 그라운드에 난입하였는가? 대표선수 자격과 공격수 포지션은 챙겼는가? 아니면 경기장에 난입한 스트리커 모양으로.. 천둥벌거숭이로 날뛰며.. 불쌍한 광대짓을 벌이고 있지는 않은지? 그대 인생이라는 이 무대에서 배우의 자격과 주인공의 포지션은 챙기고 올라온 것인가? 아니면 길 가다가 잘못 휩쓸려 들어온 것인가? 그대는 뭔가? ‘당신 뭐야?’ ‘니가 뭔데?’ 이 질문에 무엇이라 대답할 것인가? 나는 감독이요. 나는 연출자요. 나는 프로듀서요. 나는 코치요. 아니면.. 하다못해.. 나는 그냥 물병 들고 왔다리 갔다리 하는 팀의 주무요 정도는 되어야 한다. 선수든 주인공이든 걸맞는 자격과 포지션을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을 갖추고 있는 것이 존재다. 그것이 없으면 존재가 아니다. 무(無)다. 자격도 없고 명목도 없고 포지션도 없으니 무다. 인간실격. 잉여인간. 아웃사이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어서 존재에 미치지 못하는 부스러기. 그득하게 존재감이 느껴져야 한다. 없으면 빈자리가 눈에 띄어야 하고 있으면 방안이 가득차야 한다. 그래야지만 존재다. 들이대더라도 자격을 가지고 나타나야 하고 머무르더라도 주소를 얻어 머물러야 한다. 하다못해 소개장이라든가 아니면 명함이라도 있어야 한다. 아무리 졸병이라도 이등병이라는 자격이 있고, 1소대라는 위치가 있고, 소총수라는 임무가 있다. 그것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나. 나는 한국인이오. 나는 홍길동이오. 나는 직장인이오. 나는 노동자요. 뭐든 자격과 포지션과 임무가 있어야 한다. 자격과 위치와 임무를 잃을 때 내 존재는 안개처럼 부산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존주의 철학이라는 것이 막연하게 실존, 실존, 실존 하며 타령하고 자빠져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의 삶의 형태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본질을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삶의 형태는 문화적 양식으로 완성된다. 나는 이상주의자다. 나는 진보주의자다. 나는 홍대앞을 주름잡는 패션 리더다. 나는 명동을 휘어잡던 60년대 모던걸, 모던보이다. 뭐 이딴 것이 있어야 한다. 내 삶을 어떤 타이틀로 어떻게 연출할 것인가? 내 바운더리 어디까지 디자인할 것인가? 그런 고민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는 그것이 필요하지 않았다. 교회에서 다 정해주기 때문에. 그때가 좋았다. 그냥 살았다. 왜 사냐건 웃었다. 그러나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선언한 이후로 실존주의 철학이 대두되었고, 기독교가 디자인해놓은 삶의 양식을 해체해 버렸다. 이건 서구의 모습이고 한국도 비슷하다. 왜 사냐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고? 삼강오륜에 다 나와있걸랑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으며, 부모는 높고 자식은 낮으며, 남편은 높고 아내는 낮으며.. 포지션이 다 지정되어 있다. 임무가 정해져 있다. 정해진 길로 딱 가면 된다. 왜 사냐고? 그야 천국가기 위해서 살지. 어떻게 사느냐고? 십일조 내며 살고. 기도하며 살고. 주기도문 사도신경 외우며 살고. 목사님 말씀 잘들으며 살지. 시킨대로 고분고분 하면 되지. 이걸 해체해 버렸다는 말이다. 이제는 제각기 스스로 알아서 살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세상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종교라는 등불은 꺼져버렸다. 기독교, 불교, 유교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통제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현대판 자발적 노예들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종교의 사슬로 자신의 몸을 묶으며 그 아래로 기어들어 가서 복종하며 살지만 그런 신이 경멸할 군상들은 어차피 대화가 안 되는 존재이니 논외다. 국가로부터 민증만 받으면 국민이라는 자격이 생기는줄로만 아는 수구꼴통 아저씨들도 논외다.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역사 앞에서 자기 임무와 포지션을 명확히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종교의 빈 자리를 칸트와 헤겔은 이성으로 채우려 했다. 그런데 그 이성이란건 도무지 뭐지? 이성만 지갑챙기고 명함챙기듯 챙겨가지고 있으면 충분히 각자의 자격과 포지션이 찾아지나? 그건 아니올시다였다. 그래서 부조리다. 종교를 떠난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한 인간이 ‘왜 사느냐’, ‘어떻게 살것이냐?’ ‘너의 존재는 뭐냐?’ 이 질문에 스스로 대답해야만 하는 상황에 몰렸다는 보고가 실존주의다. 그래서 나의 삶을, 그 삶의 양식을 어떻게 디자인하여 완성시킬 것인가? 여기서 완성의 문제가 대두된다. 완성의 근거는 자연의 완전성으로부터 유도된다. 그 완성은 석가의 니르바나와 같다. 열반은 죽어서 좋은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서 좋은 그림을 완성하기다. 탄생부터 죽음까지 일관하는 그 무엇 말이다. 깨달았다고 선언하면 깨달음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그림을 완성해야 깨달음이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말했지만 신을 부정한다고 이야기 끝나는게 아니라 신의 부정은 나의 긍정이어야 한다. 신에게 있다고 믿어졌던 것이 내게 있다는 거다. 신의 완전성을 내 안에서 재발견하기다. 신의 완전성으로부터 나의 완전성으로 배달받아 또 뒤에올 누구의 완전성으로 배달할 그 무엇을 스스로 디자인하고 내 삶의 바운더리 안에서 연출하기에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된 것이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신이라는 연출자를 끌어내리고 스스로 자신의 삶을 연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스스로 감독도, 코치도, 선수도, 관객도, 평론가도 되어야 한다. 전체과정을 혼자서 책임져야 한다. 해내야 한다. 부모도, 스승도, 동료도, 국가도, 하느님도 돕지 않는다. 오직 자연이 도울 뿐이다. 진리의 완전성이 어둠 가운데 빛을 밝혀주고, 역사의 강이 배를 띄워주고, 진보의 물결이 그 배를 뒤에서 밀어줄 뿐이다. 어쩔 것인가?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 어떤 그림을 그려낼 것인가? 삶의 양식을 디자인하기에 성공할 것인가? 인생이라는 이 무대 위에서 어떤 자격과 포지션과 임무를 얻어 마침내 완성에 이를 것인가? 구조로 보면 보인다. 구조론의 많은 개념들도 마찬가지다. 단어의 사전적 뜻풀이에 집착하지 말고 구조를 꿰기 바란다. 감독도 무대도 객석도 주인공도 대본도 있다. 어쩔 것인가? 애드립은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그림을 보더라도 마찬가지. 구조를 파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가 전하려는 메시지에 홀리지 말고. 그림 안에 무대도 객석도 연출자도 주인공도 대본도 있다. 잘 보면 보인다. 보이는가? 음악을 듣더라도 마찬가지다. 감미로운 선율의 황홀감에 취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눈 부릅뜨고 구조를 꿰어야 한다. 작가의 메시지는 지나가는 행인 1에 불과한 그대를 작품 앞으로 유인하는 삐끼짓에 불과하다. 소설이라도 그러하고, 시라도 그러하고, 영화라도 그러하고, 드라마라도 그러하다. 권선징악의 메시지나 세련된 정치풍자, 놀라운 반전, 수준높은 주제의식 따위는 삐끼에 불과하다. 그거 가짜다. 메시지에 감동하여 어설프게 눈물짓거나, 정치풍자에 반해서 함부로 정신줄 놓거나, 반전에 홀려서 입 헤벌리고 감탄한대서야 3류관객이다. 주제의식 따위나 들먹이는 그런 바보들과 무슨 대화를 하겠는가? 양식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디자인을 꿰뚫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작가가 나비를 그렸는지, 개를 그렸는지, 인물을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도 좋다. 어떤 일관성을 얻었는지가 중요하다. ∑ |
이렇게 실존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정리하여 주시니...과연 나는 그동안 실존했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보고
나에 대해 한 번 살펴보고 점검해 보는 계기를 갖게 됩니다.
실존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모르고 사는 경우들이 허다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에 대한 이해가 없어서 사람이 더 방황을 하고 그 시간들이 길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