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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을 하자는건 아니고 아래 사과의 글이 맨 위에 있는게 신경쓰여서 아래로 한 줄 밀어내릴 겸으로 써본 글입니다.



『왜 황우석과 노무현대통령이 공동운명체냐는 것이다. 황우석이 과학적 성과를 올렸고 향후 발전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노무현대통령이 정부의 수반으로서 지원한 것 뿐이다. 그 황우석이 거짓말을 쳤건, 구라를 깠건 그건 순전히 황우석이 책임져야 할 문제다. 왜 노무현대통령이 황우석과 공동운명체라는 것인가?  중요한 것은 진실일 뿐이다.』

나는 그 시점에서 황우석이 MBC보다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지금 상황에서 황우석 말의 절반은 가짜로 확인되었지만 그 시점에서는 그랬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최종적으로 황우석이 옳다고 밝혀진다면(지금은 줄기세포가 있어도 황우석의 절반은 꺾였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조중동으로부터 욕을 당할건 뻔한 일 아닙니까?


『김동렬님은 "네티즌"이라고 하는 실체에 대한 믿음이 너무 크다. 이 네티즌이 역사를 움직이는 주체가 될 것이라고 김동렬님은 보는 것이다. 그 역사적 주체의 선택은 무조건 결론적으로 옳고 그게 역사의 흐름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틀렸다. 무정형의, 몰계급적인 네티즌이 어떤 일정한 정치적 집단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 자체가 환상이다. 그들이 무오류라는 생각 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모든 네티즌이 아니라 서프 네티즌이죠. 서프 네티즌이 무정형의 몰계급적인 사람들은 아닙니다. 예컨대 대학에 몸담고 있는 사람은 다수가 황까이고 회사원이나 자영업자는 황빠가 많다고 보면 대략 맞습니다. 물론 다 그런건 아니지만.


『이 안에도 최소한의 유대감과 소속의식이 있어야 한다. 또한 절박함이 필수다. 2002년에는 그것이 있었다. 지금은 없다.』


그런 측면이 일부 있지요. 그러나 그 반대의 측면도 있습니다. 


『김동렬님이 "민중의 지배"를 꿈꾸는 것은 인정한다. 물론 그 민중의 지배를 관철시키는 방식이 "포퓰리즘"이어야 한다는 것도 당연하다. 포퓰리즘은 한줌의 지배세력이 엘리트 운운하면서 민중의 머리 꼭대기 위에 군림하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즉 상식과 민중 전체의 자치능력을 믿고 모든 형태의 권위, 일체의 관념적 독선에 복종하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저는 원래 무정부주의에 가까운 월든의 소로우나 노자에 가까운, 조직화된 집단 보다는 독립적인 개인의 역할을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조직이나 집단에는 본능적인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지요. 님의 포퓰리즘에서 말하는 그것이 조직화된 집단이어서는 안되겠지요. 그 보다는 사회 각 분야에서 일정한 위치를 굳힌 개인들의 '자유연합'의 형태를 가져야 할 겁니다.


『그런데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다. 이 표퓰리즘은 진보적 포퓰리즘이어야 한다. 이것은 의회민주주의를 통해서 변질되고 왜곡되고 수축된 민주주의를 다시 민중에게 되돌려주려는 정치적 시도이기 때문에 이러한 진보적 토대에 상치되는 수구반동적인 포퓰리즘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종국적으로 민중의 심층을 파고들지 못한다.』


그 진보가 좌파가 멋대로 정하는 마르크스의 진보인지 아니면 역사의 진보인지가 중요합니다. 제가 말하는 진보는 역사의 진보이며 그것은 대한민국의 지정학적 조건과 역사와 전통이 만드는 거지 어디서 누가 만들어놓은 기성품을 수입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과정이 중요하고 그 과정에는 이런 진통이 반드시 필요하지요.


『김동렬님이 말하는 "네티즌"이라는 실체는 언제든지 수구반동적인 포퓰리즘에 동원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대중은 언제나 그런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모든 네티즌 운동이 종국적으로는 선이라는 김동렬님의 주장은 틀렸다.』


모든 네티즌 운동이 아니라 서프를 통해서 집단학습을 거친 훈련된 네티즌이어야 하겠지요. 하여간 ‘모든, 절대, 반드시’ 이런 단어를 붙여서 논쟁을 하려들면 안 좋지요. 저도 글 쓸 때 모든, 절대, 반드시 이런 표현을 안쓰는건 아니지만 그건 단순한 ‘강조’일 뿐입니다. 이 세상에 ‘절대’나 ‘모든’은 없습니다. 진실은 항상 51 대 49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곡예지요.


『진보적 경향성을 분명히 하지 않는 모든 네티즌의 정치적 운동은 결국 실패하거나 왜곡될 것이다. 우리가 전사모나 박사모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다. 왜냐하면 이것은 "개방적이고 수평적인 분권적 네트워크를 통한 보다 많은 사람들의 평등한 참여에 의한 계획"이 전제되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계획이 바로 "진보"다.』


맞는 말이지만 그 진보가 마르크스의 진보로 굳어 있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또 네티즌은 그냥 네티즌이 아니라 서프의 집단학습으로 훈련된 네티즌이어야 합니다. 중요한건 서프와 같은 사이트가 속속 등장할 것이며 그 결과로 네티즌은 점차 훈련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십년 후를 생각해 보세요. 네티즌의 수준은 확실히 높아질 것입니다. 고급정보를 빠르게 접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진보를 걷어차고 네티즌이 주도하는 정치를 만들자? 네티즌이 주도하는 정치 자체가 진보를 전제로 한 것인데?  앞 뒤가 맞지 않는다. 즉자성을 초월하지도 못하고, 오히려 속물주의에 빠져있는 자들이 단지 인터넷을 이용한다는 이유만으로 정치역사적 주체가 될 수 있다고?』


진보를 걷어찰 이유는 물론 없지요.


『김동렬님이 초기에 인터넷이 시작됐을 당시의 개인적인 경험을 극단적으로 과장해서 해석한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면 네티즌이 수구언론이 주도하던 아젠다 세팅을 하고, 이차원적인 권력에 대해 가장 위협적인 병기로서 인터넷이 등장한 것은 사실이다. 말없던 다수들이 말을 할 수 있게 한 힘도 인터넷에서 나왔다. 그러나 노무현대통령 탄생의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노사모는 물론 인터넷이 동기가 됐지만 또한 인터넷 그 자체만으로는 종국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결론을 낳게 한 것도 사실이다.』


노사모를 노사모 사이트에 모여 의결에 참가하는 3천 열성회원으로 좁게 생각한다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으나 노사모에는 가끔 들리는 10만 네티즌으로 본다면 노사모를 그리 과소평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노사모가 노사모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노사모를 그토록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 집단으로 만든 것은 감동과 소주였다. 인터넷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인터넷은 그 익명성으로 본질적인 상호신뢰를 줄 수가 없다. 사회적 자본을 형성할 수가 없다. 또 움직이지 않으면 인터넷은 죽는다. 예전의 노사모 열기는 지금 다 어디로 갔는가? 이슈동원 능력이 탁월하지 않으면 열기는 곧 식고 만다.』


선거 때 살아나겠지요. 노사모는 원래 선거 때 힘을 쓰게 만들어진 조직입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인터넷은 본래 정치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뿐이다.』


인터넷은 진화하고 네티즌은 학습합니다.


『적어도 이 서프가 역사에 공헌하는 사이버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느슨한 공동체"가 되는 것이 필수다. "느슨한 공동체"를 거부하고 벽을 쌓기 시작하면 "폐쇄적 공동체"가 되어버린다. 외연확대가 불가능해 진다. 이런 측면에서 김동렬님은 황우석 건에서 큰 실수를 했다. 이것은 이차원적인 권력에 압력을 넣어서 노무현대통령을 후방에서 지원한다는 서프의 취지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느슨한 공동체를 거부하는 만큼, 이차원적 권력에 대한 압력의 힘은 약화된다. 그러면 서프의 존재 이유도 그 만큼 퇴화하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보수적인 일부 세력들이 서프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김동렬님과 같은 대표논객들이 집합적 정체성 정도만 유지하는 "느슨한 공동체"를 거부하고 높은 벽을 쌓았기 때문이다. 사이버 공동체는 항의보다 탈퇴가 100배 쉽다. 기분 나쁘면 서프에 안 오면 그만이다. 김동렬님은 이런 측면에서 여러번 실수를 했다. 모두를 포용하는 정치가 혐오스럽지만, 이차적 권력에 압력을 행사하려는 서프만큼은 모두를 포용했어야 했다. 적어도 이곳은 사람들이 와글와글 모여서, 관용이 넘치는 토론을 펼치는 진정한 의미의 광장이 되었어야 했다. 집합적 정체성만 유지하는 선에서 온갖 논리와 주장이 팽배하다가 이슈가 발생했을 때 결정적인 순간에는 분노와 열정으로 뭉칠 수 있는 그런 집단으로 갔어야 했다.』


인터넷의 구조를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를 배척하고 벽을 쌓자는 것이 아니라 서프가 황빠와 황까로 나눠져서 50 대 50으로 팽팽해지면 그걸로 감정이 쌓여서 또다른 무슨프라이즈가 생기고.. 그런 식으로 계속 쪼개지는 것을 막는 방법이 원래 없었던 겁니다.


느슨한 연대가 오히려 대결을 장기화 시키는게 분명합니다. 인터넷의 속성 상 모든 세력을 두로 포용하기로 표방하는 사이트는 전부 망했습니다. 느슨한 공동체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운영진과 편집진의 권한이 강화되고 눈팅의 역할이 축소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가면 눈팅들이 외면해서 사이트 망하거나 아니면 눈팅들이 들고 일어나서 운영진을 쫓아내고 말지요.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일단 다수 눈팅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으면 사이트가 죽고, 사이트가 죽으면 느슨한 연대고 뭐고 끝이라는 점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셔야 할겁니다.


『그런데 매 상황에서, 상시적으로, 상습적으로 진보 가르고 보수 자르고 양손, 양팔 다 베어버리는 그런 우를 범했던 것이다. 결국 집합적 정체성 자체가 오그라들고 말았다. 황우석사건이 그 단적인 예다. 황우석과 대통령을 동일시한 것부터 잘못된 판단이다. 이제라도 서프가 집단적 정체성만 유지하는 "느슨한 공동체"로 돌아가길 바란다. 쓸데없이 이 황우석 건에 너무 많은 체력을 소진했다는 느낌이 든다.』


느슨한 공동체로 가야한다는데 일정부분 동의합니다. 그래도 사이트가 쪼개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운영의 묘를 살려야 합니다. 운영의 묘를 살리기 위해서는 운영진과 편집진의 재량권이 더 커져야 할겁니다.


지금은 운영진이 눈팅의 여론에 끌려가는 상황입니다. 저는 인터넷의 진화법칙상 눈팅의 입장을 존중할 수 밖에 없다는 의견이구요.


느슨한 연대라며 양쪽을 두루 존중해서 그 결과로 노짱방에서 황빠와 황까가 50 대 50으로 팽팽해져서 서로 죽이네 살리네 하는.. 결국 또 무슨 프라이즈가 생겨나고 마는.. 그런 최악은 면해야 하지 않을까요?


인터넷은 진화합니다. 그 진화에는 본질적이고 구조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 결과로 오늘날의 서프가 만들어진 겁니다. 그 진화의 법칙을 무시하고 느슨한 연대를 위해 인위적으로 설계한다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집니까? 

 

진보도 좋지만 무엇이 진짜 진보인지가 중요합니다. 인터넷의 자연스런 발전과정 그 자체가 진보 아닐까요? 인위적인 진보의 설계로 하여 인터넷 자체의 진화가능성을 차단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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