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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7]꼬레아
read 3695 vote 0 2011.09.29 (14:11:42)

남산공원(장충단공원) 탐방 - 2011년 8월 6일 에셀나무홈스클 탐방 / 포토로그

2011/08/06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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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충단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明成皇后閔氏)가 살해된 지 5년 뒤인 1900년 9월, 고종은 남소영(南小營) 자리에 장충단을 꾸며 사전(祠殿)과 부속건물을 건립, 을미사변 때 순사한 장졸들의 영혼을 배향하여 매년 봄·가을에 제사를 지냈다.

처음에는 을미사변 때 전사한 시위대장 홍계훈(洪啓薰), 영관(領官) 염도희(廉道希)·이경호(李璟鎬)를 주신으로 제향하고 대관(隊官) 김홍제(金鴻濟)·이학승(李學承)·이종구(李鍾九) 등 장병들을 배향하여 제사지냈다. 그러나 ‘창선(彰善)·표충(表忠)의 일이 어찌 군인에게만 한할 것이랴.’는 육군법원장(陸軍法院長) 백성기(白性基)의 제청에 의해 다음해부터 을미사변 때 순국한 궁내부대신 이경직(李耕稙)을 비롯, 임오군란·갑신정변 당시에 순의(殉義), 사절(死節)한 문신들도 추가, 문무의 많은 열사들이 장충단제향신위(奬忠壇祭享神位)에 포함되었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군악을 연주하고 군인들이 조총(弔銃)을 쏘았다. 그러나 1910년 8월 장충단은 일제에 의해 폐사되고 말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는 이 곳 일대를 장충단공원으로 이름하여 벚꽃을 심고 공원시설을 설치하였으며, 상해사변(上海事變) 당시 일본군인 결사대로 전사한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이토(伊藤博文)의 보리사(菩提寺)인 박문사(博文寺)를 건립하였다.

광복 후 육탄삼용사의 동상과 박문사는 철거되었다. 6·25전쟁으로 장충단 사전과 부속 건물은 파손되었으나 장충단비(奬忠壇碑: 서울특별시 지방유형문화재 제1호)는 남아 있다. 이 비는 원래 영빈관 내에 있었는데, 1969년 지금의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 서편으로 옮겼다.

비의 ‘奬忠壇(장충단)’ 세 글자는 순종이 황태자였을 때 쓴 글씨이며, 뒷면에는 민영환(閔泳煥)이 쓴 143자의 찬문(撰文)이 새겨져 있다. 정부수립 후 장충단공원 경내에는 여러 공원시설이 들어섰다.

 

 

장충단비의 글씨는 순종이 직접 쓴 예필(왕세자가 쓴 글씨)이다.

 

일본에 의한 장충단의 훼손과 복원

남산 동쪽 계곡에 위치한 장충단 지역을 ‘장충단공원’이라는 이름으로 경성부에서 관리한 것은 1919년 6월부터였다. 경성부는 이곳에 벚나무 수 천 그루를 심고 광장・연못・어린이놀이터・산책로・교량 등을 설치하였다. 1928년에는 화성대공원에 설치하였던 경성신사를 확충하여 본전(本殿)을 개축하였고, 일본 불교의 전파가 시작되어 많은 일본식 사찰이 지어졌다.
남산의 동본원사(東本願寺)는 가장 규모가 컸던 것으로 1906년 건축할 때 남산의 큰 소나무 목재와 돌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1926년에는 장충단지역에 경희궁의 정전(正殿)이었던 숭정전(崇政殿)을 옮겨와 일본인들의 사찰(조계사 본당)로 사용하였다.

(현재는 동국대학교에서 경희궁 정전을 법당인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 속히 원 위치로 복귀되길 희망해 본다.)

1929년 장충단공원 동쪽, 지금의 신라호텔부지에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을 기리는 사찰인 박문사(博文寺)2)가 들어섰다. 공원의 소나무가 우거진 지역 41,822평(138,255㎡)에 조성하여 1931년 일본식 사찰을 완공하였는데, 본전(本殿)과 서원(書院)은 경복궁 내 선원전(璿源殿)및 부속건물을 옮겨 지은 것이고, 입구의 문은 경희궁의 흥화문을 옮겨지었다.

(현재 흥화문은 경희궁으로 옴겨 졌으나, 원래 위치에 구세군회관이 들어서면서 재 자리를 찾지 못하고 현재 위치에 복귀되었다)

일제는 1940년 〈조선총독부고시〉를 통해 서울시내 총 140개에 달하는 공원을 결정했는데, 장충단공원은 제8호, 남산공원은 제9호로 결정되었으며, 이때 우리 국민들에게 신성시되었던 종묘와 사직단까지도 공원으로 결정하여 민족혼 말살을 추진하였다.

 

광복 후 공원 내 일본인들을 기리는 사당과 비(碑)등 시설물들은 철거되었다. 조선신궁은 신궁 관계자들이 미군의 허가를 받아 1945년 9월 9일 해체 작업이 시작되어 1945년 10월 7일 완료되었다. 신궁건물은 그 해 11월부터 동양의학전문학교가 사용하고, 부속건물은 이듬해 2월부터 경성음악학교가 개교되면서 사용하였다. 광복 이후 경성신사 터에는 숭의여고가 천막 10개를 치고 개교하면서 점유하였고, 이등박문을 위해 지었던 사찰인 박문사는 이등박문을 저격했던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모시다가 영빈관을 신축하면서 철거되었다. (현재 영빈관은 철거 되었고 그 자리에 신라호텔이 자리 잡고 있다.)    -남산공원 교육자료실에서-

 

장충단과 장충단공원의 슬픈 역사이야기

장충단에 공원을 만든 것은 지금으로부터 91년 전인 1919년이다. 그 당시 일제는 경성부로 하여금 우리의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해 장충단을 폐하고 일본식 공원을 만들었다. 원래 장충단은 19세기 말엽 외국 세력이 침입하여 풍운이 감돌던 조선말기에 세워졌다. 즉, 국가에 충성을 다하다가 목숨을 바친 충신들의 제사를 받들던 제단이었다. 장충단을 세우게 된 직접적인 사건은 을미사변이다.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1895년) 8월 20일 새벽, 미우라 일본공사는 민비를 시해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다음, 일본 낭인들을 이끌고 경복궁에 난입하였다. 일본 낭인들은 민간인 복장이나 한국 훈련대 복장으로 변장하여 그들의 흉계를 감추려고 하였다.

홍계훈 궁성 수비대장은 이날 새벽, 경복궁에 밀려드는 난군들의 포성을 듣고 변란이 일어난 것을 알았다. 그는 군부대신 안경수와 함께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을 이끌고 허둥지둥 광화문에 도착하였다. 홍계훈은 광화문에 도착하는 즉시 난군이 침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문을 가로막았다. 칼을 빼어든 그는 “웬 놈들이냐 썩 물러가라”고 난군들을 호령하였다.
이 호통에 일본 낭인들과 난군들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러나 이들은 문을 막아선 홍계훈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면서 밀고 들어왔다. 홍계훈은 6발의 총을 맞고 칼로 난자당해 몸은 두 동강이 났다. 또한 이경직 궁내부 대신은 이날 밤 궁중에서 숙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 3시경 궁궐 밖이 소란하더니 곧 일본 낭인들이 건청궁 내의 고종과 왕비의 침소를 침입했다. 이때 고종을 호위하던 신하들은 모두 피신해 버렸는데 일본 낭인들은 고종과 세자를 끌어내어 위협하였다. 그러나 이경직은 고종의 신변을 끝내 보호하려다 그 자리에서 살해당하고 말았다. 일본 낭인들은 밀실을 샅샅이 뒤져 궁녀들을 위협하고 드디어 민비를 찾아냈다. 그리고는 민비를 등 뒤에서 칼로 허리를 난도질하여 살해하고 우물에 던졌다가 다시 끌어내었다. 그리고 이불에 싸서 송판에 옮겨 경복궁 후원 숲속에서 석유를 뿌린 다음 불에 태워서 산속에 묻어 버렸다.
일본의 이 만행에 온 국민이 분노로 치를 떨었던 것은 물론이다. 이로부터 5년 후 고종황제는 을미사변 때 끝까지 난군들을 막다가 목숨을 잃은 홍계훈・이경직 외에 희생된 장병들의 영혼을 배향하도록 조칙을 내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사당을 건립하는 계획서와 단을 설치하는 두 가지 계획서를 황제에게 올렸다. 고종황제는 단을 설치하되 1년에 봄․가을로 두 번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그리고 친히 이 단의 이름을 장충단이라 지었고, 비석을 세워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글씨를 썼다. “폐하, 신의 생각으로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순직한 문관들도 그 영혼을 장충단에 모시는 것이 타당할 줄로 아옵니다.” 하자 고종은 고개를 끄덕이며, “충의를 표창하고 절개를 장려하는 것에 어찌 문무를 구별할 것이냐. 경의 의견이 자못 이치에 합당하니, 이 일을 장례원으로 하여금 처리하게 하라.”하였다. 이에 장충단 신위는 늘어났다. 이곳에 모신 신위는 대부분 항일 인물들이었으므로 장충단 제사는 장병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제사 때는 군악을 연주하고 조총도 쏘았다. 그 후 일제는 을사조약 체결로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은 다음 장충단의 제사를 폐하고 이 비석을 남산 숲속에 버렸으며, 3․1운동 직후에는 이 곳에 장충단공원을 만들었다. 공원에는 벚꽃 수천 그루를 심고 광장을 만들어 일본인 기념비를 세웠다. 그 뿐만 아니라 상해사변 때 결사대로 죽은 일본군의 육탄삼용사 동상을 건립하는 것도 서슴치 않았다.    -남산공원 교육자료실에서-

 

 2. 수표교

수표교는 원래 수표동과 관수동 사이의 청계천에 놓였던 다리로 세종 2년(1420)에 설치하였다.
다리 부근에 마전(馬廛)이 있어 마전교라 불려졌으나 세종 23년(1441)에 청계천에 흐르는 수위를 측정하기 위해 수표석(水標石)을 세운 뒤부터 수표교라고 하였다. 1958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이곳 장충단공원으로 옮겨 오게 되었다.
비스듬한 돌기둥과 돌기둥에 새겨진 눈금 등이 우리 조상들의 과학에 대한 창의성과 우수성을 알려준다.
폭 7m, 길이 27m 정도의 수표교의 모습을 보면 온통 돌로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멀리서 보면 마치 목재를 사용한 다리처럼 보인다. 특히 돌은 모두 화강암이고 다리 기둥은 45개의 육모진 큰 석재로 그 위에 길게 모진 시렁을 걸쳐 놓고 시렁 사이에 돌을 깔아서 다리를 세웠다. 지난날 수표교가 있던 곳은 수표동과 관수동이라는 동명과 수표공원이라는 어린이공원이 있어 그 이름만 전하고 있다.     -남산공원 교육자료실에서-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 ’라 부르게 됐다.

 

중간 우측 사진 다리 난간에 한자로 쓰여진 글씨는 丁亥改造(정해개조) 戊子禁營改造(무자금영개조)라 새겨져 있어 준설공사가 끝난 후 영조 43,44년(1767, 1768년)에 다리를 다시설치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3. 이준열사 동상과 순국열사 이한응선생 기념비 

 

 

이준열사

조선 고종 때의 대신(1859~1907).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 해사(海史).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였으며, 1907년 고종의 밀사로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서 열린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세계에 호소하고자 하였으나 일본측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순국하였다.

 

순국열사 이한응선생

조선후기의 외교가(1874~1905). 자는 경천(敬天). 호는 국은(菊隱). 1901년에 영국, 벨기에 양국주차공사관(駐箚公使館) 3등참사관(參事官)이 되었고, 1904년에 주영공사관서리공사(署理公使)가 되었으나, 제1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한국정부의 국제적 지위가 전락하자 이를 개탄하여 자결하였다.



 

남산공원 내에 이렇게 의미있고 역사적으로 공부할 내용이 많다는게 너무 놀라웠다.

그리고 아픈 과거를 다시 한 번 기억하며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준비해야 겠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oyjunyi&logNo=150115535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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