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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ad 14504 vote 0 2005.12.08 (19:5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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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법가(法家)는 형률(刑律)로 인간을 억압했고, 유가(儒家)는 예(禮)를 내세워서 인간을 억압했다. 형률이던 예(禮)든 조직과 집단의 영역을 확대하고 인간의 영역을 축소하자는 것이다.

노자(老子) 선생은 둘 다 반대하고 있다. 밝혔듯이 필자는 노자 선생의 무위지도를 숭상하는 사람이다.  

20세기가 사회혁명의 세기라면 21세기는 인간해방의 세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20세기의 혁명은 국가와 제도의 조직화된 폭력으로부터의 집단적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조직의 힘으로 조직에 맞서자는 것이다.

결국 조직을 인간에 앞세운다는 점에서 20세기의 방법은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이제 논의의 초점은 사회 구성체에서 보다 개인으로 옮아와야 할 것이다. 21세기의 인간 해방은 보다 근본적이고 미시적인 혁명이어야 한다.

서구의 진보주의 경향은 동성애, 낙태권리 등과 관련하여 ‘윤리’를 앞세운 종교적 억압과의 투쟁이 주요하다. 소수자를 보호하고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는 개인의 영역을 넓혀감이 된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호주제 철폐 등에서 보듯이 ‘윤리’를 빙자한 특정 종교집단(유림)의 개인의 사적 영역에 대한 부당한 개입과 폭력에 맞서는 것이 이 나라 진보주의의 주요한 과제이다.

MBC들의 난동은 이러한 역사의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행동이다. 이는 문명과 역사에 대한 배반이다. 그들은 개인의 양심에 맡겨야 할 사적 영역에 무차별로 개입한다. 개인을 억압하여 이 사회를 중세의 감옥으로 만들려고 한다.

박정희와 그 일당의 독재를 형률을 앞세운 법가(法家)의 억압에 비견할 수 있다면, 오늘날 좌파들의 억압은 예(禮)를 빙자한 유가(儒家)의 억압과도 같다. 나는 일체의 인간의 존엄에 대한 부당한 공격에 반대한다.

서프의 경쟁력은 무엇인가?

서프가 세 돌을 맞이하고 있다. 그동안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다. 시련이 적었던 것은 아니다. 험난한 가시밭길을 헤쳐왔다. 서프를 여기까지 오게 한 원동력은 무엇이던가? 서프만의 차별화된 경쟁력은 무엇인가?

서프의 힘은 조직하지 않는 방식의 조직, 이심전심에 의한 무위의 힘이라고 필자는 믿어왔다. 우리는 명령하지 않고, 지시하지 않고, 강제하지 않는다. 다만 가슴 밑바닥의 숨겨진 열정을 끌어낼 뿐이다.

우리들 가슴 밑바닥 깊은 곳에 자리한 원초적인 에네르기를 분출시킨다. 더 큰 꿈을 꾸고 더 높은 가치를 열망하게 하기다. 그 욕망이 만드는 갈증에 따라 개인이 스스로 나서서 행동하게 하는 것이라고 나는 주장해 왔다.

통제하지 않아도, 저절로 지켜지는 룰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이 유(柔)가 강(剛)을 이기는 힘이다.

그것은 논리도 아니고 조직도 아니고 시스템도 아니다. 그것은 체험의 공유다. 체험은 공감을 낳고, 공감은 소통을 낳는다. 보이지 않으나 이심전심으로 전해지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호흡이고 열정이고 밑바닥의 에네르기다.

MBC들의 칼과 서프의 불

진실은 밝혀지고야 만다. 무엇이 진실인가? 그들 MBC들의 가슴에 ‘인간에 대한 사랑’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진실이다. 좌파들은 인간의 애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그들은 법가와 같이 차가왔고 유가와 같이 집요하였다.

윤리가 인간을 억압하는 수단이 되어서 안 된다. 무위(無爲)에 맡겨야 한다. 강령과 교리와 이론은 폐기해야 한다. 그들의 강령이 칼이라면 서프의 이심전심은 불과 같다. 칼은 나무토막을 자를 수 있지만 불은 모든 것을 태워버린다.

그들의 칼은 아무 때나 휘둘러지지만, 서프의 불은 발화점을 넘길 때 까지 인내한다. 인내하고 인내하고 또 인내한다. 기어이 폭발한다.

참된 대안은 무엇인가? 21세기가 요구하는 대안은 ‘스타일’이다. 밝고 낙관적이고 명랑하고 상큼발랄하고 깜찍요염한 우리의 행동방식이 우리의 이념이고 우리의 가치고 우리의 강령이다.

우리는 서로의 영역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는 되도록 개입하지 말아야 한다. 간섭하지 말고 충고하지 말고 끼어들지 말고 딴죽걸지 말아야 한다. 남이야 동성애를 하든, 남이야 마광수짓을 하든, 남이야 자기네 침실에서 무슨 짓을 하든 우리 인내하고 함부로 나서지 말아야 한다.

개인의 영역은 되도록 크게 잡고, 조직과 집단의 영역은 되도록 줄여야 한다. 역사의 요구에 의해 이제는 그런 시대가 된 것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향촌사회에서는 꼴보기 싫은 인간을 피할 방법이 없다. 시골의 공기가 그러하다. 논밭을 떠매고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 좁은 바닥에서 공존하기 위하여는 예(禮)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이제는 인터넷 시대이다. 인터넷은 넓다. 개인과 개인의 간격은 커져만 간다. 이제는 아무리 소수자라 해도 어디에선가 자신과 마음이 맞는 친구를 찾아낼 수 있다. 꼴보기 싫으면 떠나면 된다.

바야흐로 꼴보기 싫은 인간 안보고 살 수 있는 좋은 세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간섭하지 말라. 참견하지 말라. 당신은 나서지 말라. MBC는 쥐죽어라. 그것이 시대의 요구이고 문명의 진보이고 역사의 흐름이다.

이론은 가고 스타일이 온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강령이 아니라 스타일이다. 스타일은 이미지에 기초한다. 이미지는 체험의 공유에 기초한다. 체험은 공감을 낳고, 공감은 소통을 낳는다. 소통은 이심전심으로 전해진다.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울림과 떨림으로 공명한다. 불처럼 타오른다. 요원의 들불을 일으킨다. 기어이 세상을 바꾼다.  

차기 대선도 그러한 방향으로 간다. 이론과 조직과 강령과 집단의 힘을 내세우는 자는 패퇴할 것이다. 오직 스타일을 내세우는 자는 승리할 것이다.

스타일이 이미지를 낳고, 이미지가 체험의 공유를 낳고, 체험이 공감을 낳고, 공감이 소통을 낳고, 소통이 거대한 파도의 힘을 만든다. 그것은 그 들판의 모든 것을 태워버리는 불의 힘과도 같다.

널리 대중과 소통하는 이가 승리하고 음습한 뒷골목에서 모의하여 조직을 건설하는 자는 패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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