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진중권들과 카우치들
지난해 봄 탄핵반대 촛불시위 때다. 많은 사람들이 마이크 앞에서 그리고 방송 카메라 앞에서 외쳤다. 우리는 노사모가 아니라 선량한 시민이라고. 그들은 노사모가 무슨 범죄집단이라도 되는 듯이 ‘나는 아니야’를 외쳤던 것이다. 슬프게도 말이다.
덧붙여 ‘너흰 아니야.’라는 노래도 울려퍼졌다. 거기에는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가 숨어 있었다. ‘노무현도 아니지만.’ .. 슬픈 일이다. 노사모가 무슨 죄라도 된다는 말인가? 노무현이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다는 말인가?
역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큰 싸움에 임하여서는 시시한 꼬리표를 붙이지 말아야 한다. 그건 비겁한 짓이다. 생각이 다르다고? 견해가 다르다고? 왜 그 점이 문제로 되지? 누가 물어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누가 당신들을 그 광장에 불렀나? 노무현이? 노사모가? 아니지 않은가? 역사의 부름을 받아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렵다는 말인가? 무엇을 부끄러워 한다는 말인가? 왜 떳떳하지 못하는가? 왜 용기있게 진실을 말하지 못하는가?
럭스의 카우치들의 헛소동 때도 그랬다. 많은 안다하는 사람들이 카우치들을 비난하고 나섰다. 자기는 피해 안보겠다는 식의 태도였던 것이다. 내 옷에 불똥이라도 떨어질라 기겁을 했다. 심지어는 홍대앞의 인디 밴드들도 배신했다. 용기있게 카우치들의 편을 들어준 사람은 참으로 극소수였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겠다.”
이 부끄러운 말을 앞세운 임종인, 정동영, 진중권들이 나는 슬프다. 왜인가? 나는 이 말이 지난해 탄핵반대의 현장에서 ‘나는 노사모가 아니지만’ 하고 말머리를 붙여 발언을 시작하는 선량한(?) 시민들의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이들에게는 허슬러의 발행인 ‘래리 플린트’의 명언을 들려주고 싶다.
“수정헌법 제 1조가 나같은 쓰레기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주면 그 누구라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받을 것이다.”
이 말은 아름답다. 그러나 영화 ‘래리 플린트’에서 극중 변호사가 던진 이 한 마디는 결코 아름답지가 않다.
“나도 당신 잡지를 좋아하지 않아요.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아야 하죠.”
좋아하지 않는다고? 누가 물어봤나. 정말 그는 허슬러를 본 적이 없을까? 그렇다 치고 허슬러를 보는 일이 죄라도 된다는 말인가? 허슬러를 좋아하면 안된다는 말인가? 왜 당당하지 못하는가? 나는 그 변호사의 위선이 역겹다.
무엇인가? 탄핵반대를 위하여 싸울 때는 누구라도 영광의 노사모가 되어야 한다. 노사모가 아닌 사람들에게 노사모라는 누명을 씌운다면 그것은 불명예가 아니라 도리어 영광이다. 그 자랑스러운 오해를 덥썩 받아들여야 한다.
카우치가 박해받을 때는 누구라도 카우치가 되어야 한다. 다수의 선량한 홍대 앞의 인디 음악가와 극소수의 물을 흐려놓는 미꾸라지 카우치들을 분별해서는 안된다. 진정 양심있는 인디음악가라면 내가 카우치요 하고 나서주어야 한다.
왜인가? 카우치가 용서받고 사회에 받아들여질 때 누가 이익을 보는가? 홍대 앞의 인디밴드들이 아닌가? 이익은 자기네가 볼것이면서 불똥은 피해가겠다? 이건 비겁한 태도가 아닌가?
마찬가지다. 나는 강교수가 벌여놓은 전선의 최전선에 한 명의 이름없는 병사로 서고 싶다. 그것이 나의 의(義)다.
조갑제도 입은 있다. 강교수의 말이 틀렸다면 조갑제가 반론하면 된다. 조갑제의 표현의 자유가 허용된다면 강교수의 표현의 자유도 허용되어야 한다. 강교수가 표현의 자유를 획득할 때 우리 모두는 보이지 않는 이득을 얻는다.
우리는 더 떳떳하게 어깨 펴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게 된다. 우리 자신있게 대놓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이 나라가 ‘우리나라’ 맞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그 얻을 이익은 이렇게도 큰데 ‘나는 아니야’의 알리바이를 들이댈 필요가 있다는 말인가?
‘나는 노사모가 아니야.’ ‘우리 인디밴드들은 한 마리 미꾸라지 카우치가 아니야.’ ‘나는 강교수와 의견이 다르지만’ .. 이런 꼬리표들이 추하다. 누가 물어보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변명하지 말라. 움츠리지 말라. 알리바이 만들지 말라.
알아야 한다. 여기는 전장이고 지금은 전시다. 전쟁에서는 적 아니면 아군이다. 중립지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의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 함께 싸우겠다.”
이렇게 알리바이 부터 확인하고 넘어가는 볼테르의 말은 아름답지가 않다.
“나는 언제라도 역사의 편이다. 당신의 말할 권리가 나의 말할 권리의 신장으로 이어진다면 이 순간 역사 앞에서 당신과 나는 한 편이다. 나는 다만 역사의 진실을 위해 싸울 것이다.”
이건 나의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