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파동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사람은 박근혜다.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이 없는 반인권적인 인물로 낙인이 찍혀버렸다. 당장은 피해가 없겠지만 2년 후 대선에서는 반드시 문제가 된다.
토론회의 패널들은 한결같이 질문할 것이다. 뻔뻔스런 인간사냥에 나선 동기가 무엇이냐고. 인간사냥에 동조한 행위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전면부정이 아니냐고. 박근혜씨야 말로 사상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사악한 만행에 동조한 것이다.
왜 이회창이 졌는가를 생각하라. 당시 이회창은 한나라당 입장에서 최선의 후보였다. 이회창이 패배한 이유는 하나다. 강력한 반이회창 세력의 결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도 반이회창에는 대거 동의했다. 왜?
이회창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의 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강력했던 것이다. 반면 노무현은 너무나 약했다. 이 선명한 대비를 보라. 이회창은 너무 강해서 비토세력이 생겨났고 노무현은 약해서 동정세력이 생겨났다.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면 누구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왠지 이회창이 싫다고 말한다. 왜 이회창이 싫은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냥 싫은 것이다. 그 ‘그냥’의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말이다.
진실을 말하자. 인간 이회창이 싫었던 것이 아니다. 이회창은 비열했을지언정 그렇게 사악한 인물은 아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의 배후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깡패 조선일보, 깡패 재벌, 깡패 기득권들이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회창의 강력함은 그들 깡패들을 대표하고 상징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다. 이회창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이 싫었던 것이다. 이회창이 살기 위해서는 한사코 피하여 상징이 되지 말았어야 했다. 누가 이회창에게 그런 상징성을 부여했는가를 생각하라. 조선일보다.
무엇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권위 비우기, 정권의 약함에 올라타는 기득권의 끝없는 오버질, 이에 대한 국민의 응징이라는 3박자의 패턴이 있다. 조선일보가 존재하는 한 이 패턴은 반복된다.
DJ정권 말기의 허약함, 한나라당의 기세등등, 깡패 조중동의 호가호위, 이에 불안을 느낀 국민들의 반이회창 정서, 그리고 유권자의 응징. 이 패턴이 2002년 대선 판도를 가름했고 2003년 탄핵의 후폭풍을 낳았다.
결국 이회창은 조선이 죽인 것이다. 특히 호가호위하는 조선일보의 오버질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 결과로 이회창이 죽은 것이다. 그렇다. 이회창은 조선일보가 죽였다. 깡패언론, 깡패재벌, 깡패 기득권 그리고 그들 악당들의 대표자 이회창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죽였다.
이회창이 야당의 대표일 때는 그런 점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는 높은 지지를 받았고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는 힘 없는 야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5년 내내 이기다가 막판 한달을 졌다. 왜인가?
막상 이회창 대통령의 그림이 현실화 되자 모두가 불안해진 것이다. 실정을 일삼은 여당에 대한 견제세력의로서의 이회창은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깡패 조선, 깡패 재벌, 깡패 기득권의 대표자 이회창은 비토를 받은 것이다. 왜? 너무나 강력해서. 너무나 두려워서.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나라당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강정구 교수를 감옥에 보내지 못해서 안달난 조중동의 저 깡패짓을 보라. 이런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은 거대한 먹구름을 만든다.
국민은 불안하다. 박근혜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박근혜 뒤의 깡패 전여옥, 박근혜 뒤의 깡패 조선일보가 무서운 것이다. 백주대낮에 태연히 생사람을 잡아 감옥에 보내려 하는 폭력배 조선일보 말이다.
사실이지 국민들은 진짜 깡패를 별로 두려워 하지 않는다. 신창원은 반영웅으로 인기를 끌기도 한다. 탈옥수 지강헌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평화시에는 오히려 그들이 귀엽다. 지금 약자(?)인 야당지(?) 조선일보가 극우들에게 귀염을 받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힘을 가진다면? 그들이 여당이 된다면? 사정은 180도로 달라진다. 이건 뻔하게 반복되는 패턴이다. 조선일보가 박근혜들의 거품을 만든다. 박근혜들은 오판한다. 박근혜 대세론이 만들어진다. 박근혜 자리에 이명박이 와도 마찬가지다. 불안을 느낀 국민들이 어느 시점에 일제히 돌아선다.
그리고 지금은 별것 아닌 일 처럼 여겨지는 강정구 교수에 대한 그들의 사악한 테러행위가 그 시점에는 박근혜, 이명박들의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지금은 강정구 교수의 발언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들도 더러는 있지만 2년 후는 달라진다. 예전에도 그랬다. 독재의 사냥개였던 검찰에 의해 조작된 조직사건이 일어나면 모두들 화를 내고 그들을 비난하며 독재자를 찬양했다.
그러나 바로 그 국민들이 그들을 국회로 보냈다. 누가 그 사람들을 국회로 보냈는지를 생각하라. 그들이 투옥될 때 잘됐다고 환호하고 독재자를 칭찬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미안해서 그들을 국회로 보냈던 것이다.
왜? 그때는 검찰에서 이적행위라고 발표하니 무서웠던 것이다. 무서우니 죄 없는 그들을 감옥에 보내는 일에 찬성한다. 양심에 찔리지만 찬성한다. 세월이 흐르면 다시 생각해 본다. 찔린 양심의 가시가 아프다. 다시 생각해 보면 미안하다. 미안하니 그때의 그 죄수(?)들을 국회로 보낸다. 이것이 우리 국민이다.
지금 강정구 교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목청 높이는 그 유권자들이, 나중에는 미안해서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금뺏지의 영광을 주는 것이다.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지금 국민들은 조중동의 겁주기에 넘어가서 강정구를 비난하지만 나중에는 모두가 미안해 한다. 이것이 심성 착하고 정 많은 한국인이다. 우리 그 한국인들을 믿어야 한다.
불행이다. 참으로 불행이다. 대통령이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연정을 제안하며 몸을 낮추면 그들도 같은 비례로 몸을 낮추어 주어야 한다. 당연히 그러하다. 그러나 보라! 현실은 어떤가? 그들은 결코 깡패기질을 버리지 못한다.
이쪽에서 강하게 나가면 눈치를 보다가도, 이쪽에서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대번에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서슴없이 올라타고 발로 마구 밟아댄다. 짐승의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다.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국민들은 생각한다. 지금은 여당을 감시할 때라고 믿는다. 지금은 여당이 강하고 야당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년 후에는 180도로 달라진다.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노무현의 탈권위주의, 조선을 앞세운 기득권의 오바질, 분노한 국민들의 응징이라는 3박자 패턴이다. 이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화로 가는 성장통이자 반드시 한번은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우리 모두가 참된 민주주의에 익숙해질 때 까지, 조선일보가 사라질 때 까지 이 게임은 계속된다.
토론회의 패널들은 한결같이 질문할 것이다. 뻔뻔스런 인간사냥에 나선 동기가 무엇이냐고. 인간사냥에 동조한 행위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전면부정이 아니냐고. 박근혜씨야 말로 사상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자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사악한 만행에 동조한 것이다.
왜 이회창이 졌는가를 생각하라. 당시 이회창은 한나라당 입장에서 최선의 후보였다. 이회창이 패배한 이유는 하나다. 강력한 반이회창 세력의 결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도 반이회창에는 대거 동의했다. 왜?
이회창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의 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 강력했던 것이다. 반면 노무현은 너무나 약했다. 이 선명한 대비를 보라. 이회창은 너무 강해서 비토세력이 생겨났고 노무현은 약해서 동정세력이 생겨났다.
유권자들에게 물어보면 누구도 확실한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다만 왠지 이회창이 싫다고 말한다. 왜 이회창이 싫은지는 누구도 모른다. 그냥 싫은 것이다. 그 ‘그냥’의 진정한 이유가 무엇인가 말이다.
진실을 말하자. 인간 이회창이 싫었던 것이 아니다. 이회창은 비열했을지언정 그렇게 사악한 인물은 아니다.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그의 배후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깡패 조선일보, 깡패 재벌, 깡패 기득권들이 싫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회창의 강력함은 그들 깡패들을 대표하고 상징함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다. 이회창은 하나의 상징이었다. 그 상징이 싫었던 것이다. 이회창이 살기 위해서는 한사코 피하여 상징이 되지 말았어야 했다. 누가 이회창에게 그런 상징성을 부여했는가를 생각하라. 조선일보다.
무엇인가?! 노무현 대통령의 권위 비우기, 정권의 약함에 올라타는 기득권의 끝없는 오버질, 이에 대한 국민의 응징이라는 3박자의 패턴이 있다. 조선일보가 존재하는 한 이 패턴은 반복된다.
DJ정권 말기의 허약함, 한나라당의 기세등등, 깡패 조중동의 호가호위, 이에 불안을 느낀 국민들의 반이회창 정서, 그리고 유권자의 응징. 이 패턴이 2002년 대선 판도를 가름했고 2003년 탄핵의 후폭풍을 낳았다.
결국 이회창은 조선이 죽인 것이다. 특히 호가호위하는 조선일보의 오버질이 국민을 불안하게 만든 결과로 이회창이 죽은 것이다. 그렇다. 이회창은 조선일보가 죽였다. 깡패언론, 깡패재벌, 깡패 기득권 그리고 그들 악당들의 대표자 이회창이라는 상징성을 부여하는 방법으로 죽였다.
이회창이 야당의 대표일 때는 그런 점이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다. 그는 높은 지지를 받았고 큰 인기를 누렸다. 당시는 힘 없는 야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5년 내내 이기다가 막판 한달을 졌다. 왜인가?
막상 이회창 대통령의 그림이 현실화 되자 모두가 불안해진 것이다. 실정을 일삼은 여당에 대한 견제세력의로서의 이회창은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깡패 조선, 깡패 재벌, 깡패 기득권의 대표자 이회창은 비토를 받은 것이다. 왜? 너무나 강력해서. 너무나 두려워서.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나라당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는 국민은 없다. 그러나 강정구 교수를 감옥에 보내지 못해서 안달난 조중동의 저 깡패짓을 보라. 이런 작은 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은 거대한 먹구름을 만든다.
국민은 불안하다. 박근혜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박근혜 뒤의 깡패 전여옥, 박근혜 뒤의 깡패 조선일보가 무서운 것이다. 백주대낮에 태연히 생사람을 잡아 감옥에 보내려 하는 폭력배 조선일보 말이다.
사실이지 국민들은 진짜 깡패를 별로 두려워 하지 않는다. 신창원은 반영웅으로 인기를 끌기도 한다. 탈옥수 지강헌의 이야기는 영화로도 만들어지고 있다. 평화시에는 오히려 그들이 귀엽다. 지금 약자(?)인 야당지(?) 조선일보가 극우들에게 귀염을 받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들이 힘을 가진다면? 그들이 여당이 된다면? 사정은 180도로 달라진다. 이건 뻔하게 반복되는 패턴이다. 조선일보가 박근혜들의 거품을 만든다. 박근혜들은 오판한다. 박근혜 대세론이 만들어진다. 박근혜 자리에 이명박이 와도 마찬가지다. 불안을 느낀 국민들이 어느 시점에 일제히 돌아선다.
그리고 지금은 별것 아닌 일 처럼 여겨지는 강정구 교수에 대한 그들의 사악한 테러행위가 그 시점에는 박근혜, 이명박들의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어떤 경우에도 대통령이 될 수 없다.
지금은 강정구 교수의 발언에 불안을 느끼는 국민들도 더러는 있지만 2년 후는 달라진다. 예전에도 그랬다. 독재의 사냥개였던 검찰에 의해 조작된 조직사건이 일어나면 모두들 화를 내고 그들을 비난하며 독재자를 찬양했다.
그러나 바로 그 국민들이 그들을 국회로 보냈다. 누가 그 사람들을 국회로 보냈는지를 생각하라. 그들이 투옥될 때 잘됐다고 환호하고 독재자를 칭찬하던 바로 그 사람들이 미안해서 그들을 국회로 보냈던 것이다.
왜? 그때는 검찰에서 이적행위라고 발표하니 무서웠던 것이다. 무서우니 죄 없는 그들을 감옥에 보내는 일에 찬성한다. 양심에 찔리지만 찬성한다. 세월이 흐르면 다시 생각해 본다. 찔린 양심의 가시가 아프다. 다시 생각해 보면 미안하다. 미안하니 그때의 그 죄수(?)들을 국회로 보낸다. 이것이 우리 국민이다.
지금 강정구 교수를 처벌해야 한다고 목청 높이는 그 유권자들이, 나중에는 미안해서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금뺏지의 영광을 주는 것이다. 이 이치를 알아야 한다. 지금 국민들은 조중동의 겁주기에 넘어가서 강정구를 비난하지만 나중에는 모두가 미안해 한다. 이것이 심성 착하고 정 많은 한국인이다. 우리 그 한국인들을 믿어야 한다.
불행이다. 참으로 불행이다. 대통령이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여 연정을 제안하며 몸을 낮추면 그들도 같은 비례로 몸을 낮추어 주어야 한다. 당연히 그러하다. 그러나 보라! 현실은 어떤가? 그들은 결코 깡패기질을 버리지 못한다.
이쪽에서 강하게 나가면 눈치를 보다가도, 이쪽에서 조금이라도 약한 모습을 보이면 대번에 달려들어 물어뜯는다. 서슴없이 올라타고 발로 마구 밟아댄다. 짐승의 이빨을 드러내는 것이다.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그리고 국민들은 생각한다. 지금은 여당을 감시할 때라고 믿는다. 지금은 여당이 강하고 야당이 약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2년 후에는 180도로 달라진다.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똑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노무현의 탈권위주의, 조선을 앞세운 기득권의 오바질, 분노한 국민들의 응징이라는 3박자 패턴이다. 이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화로 가는 성장통이자 반드시 한번은 거쳐야 할 통과의례다. 우리 모두가 참된 민주주의에 익숙해질 때 까지, 조선일보가 사라질 때 까지 이 게임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