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일까? 세상이 온통 먹빛이었던 박독재 시절 이야기다. 어떤 사람이 다방에서 친구와 말다툼을 벌였다.
“에끼! 이 김일성 보다 더 나쁜 놈아!”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그는 달려온 순경들 앞에서 고발을 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은 김일성이오. 그런데 저기 저 사람은 김일성 보다 더 나쁜 놈이 세상에 있다고 말했소. 이는 명백히 김일성에 대한 고무 찬양이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순경은 그 가엾은 아저씨를 체포했다. 그는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장기간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이건 실화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날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회의 다수가 이런 시스템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왜 동의하는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유시민은 솔직한 사람이다. 나는 그 솔직함이 약간의 비겁함 뒤에 숨은 솔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의원 유시민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실로 말하면 이 글은 유시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다. 유시민은 그나마 괜찮은 편에 속한다. 괜찮은 유시민 조차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당신의 문제는 얼마나 큰지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왜인가? 방관자이기 때문이다. 그 다방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을 수 있다. 김일성보다 더 나쁜놈이라며 고발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머리가 돈 것이 아니다. 그를 잡아간 순경만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을 재판한 법원만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 사회 전체가 이상한 것이다. 그 사회에 속한 일분자로서의 당신도 마찬가지다. 지만원만 탓할 일이 아니고 조갑제만 탓할 일은 아니다.
지적(知的)인 용기가 진정한 용기다. 당신은 진리 앞에서의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신 앞에서의 진정한 용기를 가졌는가?
대책없이 솔직한 건 좋은 태도가 아니다. 총체적으로 위험을 관리할 수 있어야 진짜다.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약한 군중에서 벗어나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역시 암울했던 독재 시절 이야기다. 한 여고생이 담임 선생님을 고발한 사건은 들어서 아실 것이다. 수업 중에 선생님이 한 말을 잘못 알아들은 학생은 하교 후 조중동식 따움표로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선생님을 고발한 것이다.
그 교사가 죄없이 처벌받았음은 물론이다. 교사에게 죄가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당국은 사건이 접수되면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한다. 잘못이 없더라도 교사는 처벌될 수 밖에 없다.
논쟁을 일으켜 사회문제로 되면 더 큰 일이 되기 때문이다. 당국은 교사를 희생시키는 편리한 결정을 내린다. 사회의 다수는 그 문제에 있어서 교사가 잘못했느냐를 판단하기 보다는 잘못했을 경우 ‘처벌되느냐’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심이 더 큰 문제로 되어서 당국은 ‘그 경우 처벌된다’는 판례를 남기는 쪽으로 사건을 가져간다. 앞에서의 ‘김일성 보다 나쁜 놈’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잘잘못은 애초에 판단대상이 아니다.
당국이 판결을 통하여 과시하려 하는 것은 이런 사건은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판단한다는 점이다.
보안법은 산 속의 늑대와도 같이, 또 바다 속의 암초와도 같이, 또 거리에 방치된 맨홀뚜껑과 같이 일상적인 위험으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잘못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지 않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렇다. 보안법은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한다. 역대 독재정권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매우 노력했다. 왜 그들은 잘못을 처벌하지 않고 ‘부주의(?)’를 처벌하는가?
국민들을 ‘긴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두기 위함이다. 즉 그들은 잘못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하지 않음’을 처벌하고 ‘평화로움’을 처벌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라면 어떻겠는가? 제자가 선생을 고발한다는 것은 천륜을 어긴 것이다. 그 제자가 도리어 처벌받는다. 그러나 암울했던 이 나라의 독재는 선생님을 고발하라고 가르쳤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김인규 교사의 경우도 그러하다. 자녀의 이야기를 들은 학부모가 당국에 고발한 것이다. 선생님의 일을 어머니께 일러바친 그 학생은 아마 평생동안 인간 구실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양심의 살인이다.
무엇인가? 용기를 내야 한다. 용기는 ‘지적’인 용기다. 용기는 진리 앞에서의 용기이고 신 앞에서의 용기다.
위험은 도처에 있다. 그 중 어떤 위험들은 소리없이 다가온다. 위험을 소리쳐 알리면 오히려 더 큰 사건이 벌어진다. 상주에서의 참사를 기억하라! 때로는 침묵하여 위험을 비밀에 부쳐야 한다.
늑대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늑대가 온다’고 소리치면 놀란 양떼는 폭주한다. 늑대가 온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용기다. 때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것이 용기다.
기어이 겁을 집어먹고 늑대가 온다고 소리를 질러서 그 양떼를 폭주하게 한 다음에 ‘난 단지 진실을 말했을 뿐이야. 폭주한 너희들이 잘못이야.’ 하고 변명해서는 안된다. 위험은 관리되어야 하고 그러한 관리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총체적인 관리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격이다.
유시민은 솔직하다. 그러나 그 솔직은 용기있는 솔직이 아닐 수도 있다. 유시민을 비판하자는건 아니다.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자는 거다. 무엇이 ‘인간실격’인지를 논하자는 거다.
당신이 믿는 친구가 잘못을 저질렀다 치자. 선생님께 일러바쳐 비뚤어진 친구를 바로잡는 것이 용기인가? 아니면 친구와의 사사로운 의리(조폭의 의리일 수도 있는)를 지켜 고발하지 않는 것이 용기인가?
진정한 용기는 부담을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백프로 자신이 감당하는 것이다. 사건을 중간에 끊지 말라. 끝까지 지켜보라. 그 사건의 전체과정에 책임을 지라. 시스템에 의존하지 말라. 끝까지 인간의 몫을 다하라.
초원의 사슴떼는 사자와 공존한다. 사자는 사납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배가 부르다. 그 사자가 배고파질 때 사슴들은 뛰기 시작한다. 그러나 빨리 뛸 필요는 없다. 무리들 중에 가장 약한 사슴보다 빠르면 된다.
으레 그러하듯이 늙고 병든 사슴 한 마리가 희생된다. 사자는 배가 부르고 사슴떼들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그들은 그리도 비겁해서 행복하다.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나약한 군중이 될 때 오직 늙고 병든 동료 사슴보다 빨리 뛰기만 하면 되는 비겁한 사슴이 된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성을 잃고 짐승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시스템이다. 시스템에 의존하지 말라. 스스로 강해져라. 김일성 보다 더 나쁜놈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이웃을 고발한 사람, 선생님을 고발한 학생, 인간성을 잃어버린 그 짐승들은 그 초원의 사슴이었던 것이다. 생태계라는 시스템에 안주하는 한 마리 사슴 말이다.
그 사슴된 심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격은 단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이 우주 전체의 무게를 책임지는 것이어야 한다. 손쉽게 동료를 희생시키는 방법, 단지 늙고 병든 동료사슴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되는 방법, 시스템에 안주하는 방법을 버려야 한다.
마귀에게 해마다 마을의 처녀 한 사람을 공양하면 다 해결되는 방법, 그것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김인규 처녀를 희생물로 바치고 부족해서 지금 강정구 처녀를 바치려고 한다. 그 악마에게.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도 모르면서.
그 사악한 짐승의 방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스템에의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덧글.. 독자들 중에 몇 프로나 이 글을 이해할까? 죽어도 이해를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설명..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해서 매년 처녀 한 사람을 희생물로 바치는 방법으로 악귀를 달래었다는 전설따라 삼천리식 설화는 많이 들었을 것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는가?
집단의 어떤 시스템에 의존하려는 심리 때문이다. 그 시스템은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작동할 때 사람들은 도리어 안심한다. 희생의 심지뽑기에 나만 안걸리면 된다는 심리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는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얻은 것이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심리 말이다.
그 악귀를 처단하고 그 희생제를 중단시켜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어떻게든 다시 악귀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사악한 희생제를 다시 시작하고야 만다. 그것이 사회에 긴장을 불어넣고 공중의 일체감을 조성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엾은 사슴떼가 진화과정에서 터득한 생존비결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인간은 약한 존재이다. 나약한 군중이다. 앞을 바라볼 뿐 뒤는 볼수 없는 군중이다. 뒤에서 늑대울음소리가 들리면 놀라서 절벽으로 폭주하고 마는 가엾은 양떼 말이다.
묻도니 당신은 인간실격이 아닌가?
유시민류의 솔직함 역시 그 시스템에 안주하려는 심리라는 점에서 최선은 아니다. 진리 앞에서의 맹세가 필요하다. 신과의 고독한 대면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주 전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강한 개인이 필요하다.
이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내 필력이 딸려서 요점을 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노무현 정도면 이해할 텐데.
“에끼! 이 김일성 보다 더 나쁜 놈아!”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이 경찰서에 신고를 했다. 그는 달려온 순경들 앞에서 고발을 했다.
“세상에서 제일 나쁜 놈은 김일성이오. 그런데 저기 저 사람은 김일성 보다 더 나쁜 놈이 세상에 있다고 말했소. 이는 명백히 김일성에 대한 고무 찬양이오!”
듣고 보니 일리가 있다. 순경은 그 가엾은 아저씨를 체포했다. 그는 말 한마디 잘못한 죄로 장기간 감옥살이를 했다고 한다.
이건 실화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날까? 결론부터 말하면 사회의 다수가 이런 시스템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왜 동의하는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유시민은 솔직한 사람이다. 나는 그 솔직함이 약간의 비겁함 뒤에 숨은 솔직일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의원 유시민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실로 말하면 이 글은 유시민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당신에 대한 이야기다. 유시민은 그나마 괜찮은 편에 속한다. 괜찮은 유시민 조차 약간의 문제가 있다면 당신의 문제는 얼마나 큰지를 생각하라는 말이다.
왜인가? 방관자이기 때문이다. 그 다방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을 수 있다. 김일성보다 더 나쁜놈이라며 고발한 사람 그 한 사람이 머리가 돈 것이 아니다. 그를 잡아간 순경만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 사건을 재판한 법원만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 사회 전체가 이상한 것이다. 그 사회에 속한 일분자로서의 당신도 마찬가지다. 지만원만 탓할 일이 아니고 조갑제만 탓할 일은 아니다.
지적(知的)인 용기가 진정한 용기다. 당신은 진리 앞에서의 용기가 있는가? 당신은 신 앞에서의 진정한 용기를 가졌는가?
대책없이 솔직한 건 좋은 태도가 아니다. 총체적으로 위험을 관리할 수 있어야 진짜다. 고독한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자가 되어야 한다.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나약한 군중에서 벗어나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역시 암울했던 독재 시절 이야기다. 한 여고생이 담임 선생님을 고발한 사건은 들어서 아실 것이다. 수업 중에 선생님이 한 말을 잘못 알아들은 학생은 하교 후 조중동식 따움표로 아버지에게 말했고 아버지는 선생님을 고발한 것이다.
그 교사가 죄없이 처벌받았음은 물론이다. 교사에게 죄가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당국은 사건이 접수되면 어떻게든 처리를 해야한다. 잘못이 없더라도 교사는 처벌될 수 밖에 없다.
논쟁을 일으켜 사회문제로 되면 더 큰 일이 되기 때문이다. 당국은 교사를 희생시키는 편리한 결정을 내린다. 사회의 다수는 그 문제에 있어서 교사가 잘못했느냐를 판단하기 보다는 잘못했을 경우 ‘처벌되느냐’에만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심이 더 큰 문제로 되어서 당국은 ‘그 경우 처벌된다’는 판례를 남기는 쪽으로 사건을 가져간다. 앞에서의 ‘김일성 보다 나쁜 놈’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 잘잘못은 애초에 판단대상이 아니다.
당국이 판결을 통하여 과시하려 하는 것은 이런 사건은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판단한다는 점이다.
보안법은 산 속의 늑대와도 같이, 또 바다 속의 암초와도 같이, 또 거리에 방치된 맨홀뚜껑과 같이 일상적인 위험으로 존재하는 것이어서, 잘못한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지 않는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점을 확실히 인식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졌던 것이다.
그렇다. 보안법은 잘못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조심하지 않는’ 사람을 처벌한다. 역대 독재정권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매우 노력했다. 왜 그들은 잘못을 처벌하지 않고 ‘부주의(?)’를 처벌하는가?
국민들을 ‘긴장’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두기 위함이다. 즉 그들은 잘못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긴장하지 않음’을 처벌하고 ‘평화로움’을 처벌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똑똑히 알아야 한다.
조선시대라면 어떻겠는가? 제자가 선생을 고발한다는 것은 천륜을 어긴 것이다. 그 제자가 도리어 처벌받는다. 그러나 암울했던 이 나라의 독재는 선생님을 고발하라고 가르쳤다.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김인규 교사의 경우도 그러하다. 자녀의 이야기를 들은 학부모가 당국에 고발한 것이다. 선생님의 일을 어머니께 일러바친 그 학생은 아마 평생동안 인간 구실 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양심의 살인이다.
무엇인가? 용기를 내야 한다. 용기는 ‘지적’인 용기다. 용기는 진리 앞에서의 용기이고 신 앞에서의 용기다.
위험은 도처에 있다. 그 중 어떤 위험들은 소리없이 다가온다. 위험을 소리쳐 알리면 오히려 더 큰 사건이 벌어진다. 상주에서의 참사를 기억하라! 때로는 침묵하여 위험을 비밀에 부쳐야 한다.
늑대 한 마리가 슬금슬금 다가온다. ‘늑대가 온다’고 소리치면 놀란 양떼는 폭주한다. 늑대가 온다는 사실을 알리지 않는 것이 용기다. 때로는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입을 다무는 것이 용기다.
기어이 겁을 집어먹고 늑대가 온다고 소리를 질러서 그 양떼를 폭주하게 한 다음에 ‘난 단지 진실을 말했을 뿐이야. 폭주한 너희들이 잘못이야.’ 하고 변명해서는 안된다. 위험은 관리되어야 하고 그러한 관리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총체적인 관리여야 한다.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자격이다.
유시민은 솔직하다. 그러나 그 솔직은 용기있는 솔직이 아닐 수도 있다. 유시민을 비판하자는건 아니다. 진정한 용기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고민하자는 거다. 무엇이 ‘인간실격’인지를 논하자는 거다.
당신이 믿는 친구가 잘못을 저질렀다 치자. 선생님께 일러바쳐 비뚤어진 친구를 바로잡는 것이 용기인가? 아니면 친구와의 사사로운 의리(조폭의 의리일 수도 있는)를 지켜 고발하지 않는 것이 용기인가?
진정한 용기는 부담을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백프로 자신이 감당하는 것이다. 사건을 중간에 끊지 말라. 끝까지 지켜보라. 그 사건의 전체과정에 책임을 지라. 시스템에 의존하지 말라. 끝까지 인간의 몫을 다하라.
초원의 사슴떼는 사자와 공존한다. 사자는 사납지만 다행히도 지금은 배가 부르다. 그 사자가 배고파질 때 사슴들은 뛰기 시작한다. 그러나 빨리 뛸 필요는 없다. 무리들 중에 가장 약한 사슴보다 빠르면 된다.
으레 그러하듯이 늙고 병든 사슴 한 마리가 희생된다. 사자는 배가 부르고 사슴떼들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그들은 그리도 비겁해서 행복하다.
강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 나약한 군중이 될 때 오직 늙고 병든 동료 사슴보다 빨리 뛰기만 하면 되는 비겁한 사슴이 된다. 그렇게 인간은 인간성을 잃고 짐승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시스템이다. 시스템에 의존하지 말라. 스스로 강해져라. 김일성 보다 더 나쁜놈이라고 말했다는 이유로 이웃을 고발한 사람, 선생님을 고발한 학생, 인간성을 잃어버린 그 짐승들은 그 초원의 사슴이었던 것이다. 생태계라는 시스템에 안주하는 한 마리 사슴 말이다.
그 사슴된 심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격은 단련되어야 한다. 그것은 한 개인이 우주 전체의 무게를 책임지는 것이어야 한다. 손쉽게 동료를 희생시키는 방법, 단지 늙고 병든 동료사슴보다 빨리 달리기만 하면 되는 방법, 시스템에 안주하는 방법을 버려야 한다.
마귀에게 해마다 마을의 처녀 한 사람을 공양하면 다 해결되는 방법, 그것이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김인규 처녀를 희생물로 바치고 부족해서 지금 강정구 처녀를 바치려고 한다. 그 악마에게. 그것이 잘못이라는 사실도 모르면서.
그 사악한 짐승의 방법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스템에의 의존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성을 회복해야 한다.
덧글.. 독자들 중에 몇 프로나 이 글을 이해할까? 죽어도 이해를 못하겠다는 사람들을 위한 친절한 설명..
마을 사람들이 회의를 해서 매년 처녀 한 사람을 희생물로 바치는 방법으로 악귀를 달래었다는 전설따라 삼천리식 설화는 많이 들었을 것이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는가?
집단의 어떤 시스템에 의존하려는 심리 때문이다. 그 시스템은 이성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작동할 때 사람들은 도리어 안심한다. 희생의 심지뽑기에 나만 안걸리면 된다는 심리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는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얻은 것이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를 희생시켜야 한다는 심리 말이다.
그 악귀를 처단하고 그 희생제를 중단시켜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결국 어떻게든 다시 악귀를 만들어내고야 만다. 사악한 희생제를 다시 시작하고야 만다. 그것이 사회에 긴장을 불어넣고 공중의 일체감을 조성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엾은 사슴떼가 진화과정에서 터득한 생존비결이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인간은 약한 존재이다. 나약한 군중이다. 앞을 바라볼 뿐 뒤는 볼수 없는 군중이다. 뒤에서 늑대울음소리가 들리면 놀라서 절벽으로 폭주하고 마는 가엾은 양떼 말이다.
묻도니 당신은 인간실격이 아닌가?
유시민류의 솔직함 역시 그 시스템에 안주하려는 심리라는 점에서 최선은 아니다. 진리 앞에서의 맹세가 필요하다. 신과의 고독한 대면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주 전체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강한 개인이 필요하다.
이 글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내 필력이 딸려서 요점을 전달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래도 노무현 정도면 이해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