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대해서는 문외한인데,
그래도 할말은 있습니다.
WBC를 통해서 한국 엘리트들이 세계의 엘리트들과
어떻게 경쟁해나가는지가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WBC를 이끄는 동력은
병역혜택입니다.
이글에서 그 혜택의 잘잘못을 논하는것이 아니라,
높은 연봉의 선수들이 혜택이나 애국심이라는 공공성의 영역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류현진은 초고교급 투수였죠. 억대 연봉으로 프로에 입단하기전에
그의 눈빛은 살아있었습니다.
여러번의 아시안게임으로 이미 병역혜택을 받아서였을까요.
이미 몸은 불어있었고, 무엇보다 눈빛이 죽어있었습니다.
반면, 정현욱은 병역비리 파동으로 실형과 군입대 합쳐서
3,4년간의 공백을 가지고, 선동렬감독에게 혹독하게 훈련받았다고 봅니다.
하긴 정현욱에게 WBC는 자신과 다른 세계의 강팀들과의 싸움이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죠.
여기서 욕망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일류경쟁 > 애국심 > 병역혜택.
어떻게 보면, WBC는 국내 일진의 프로야구선수들에게는 기회입니다.
물론 정규시즌전에 가족과 시간보내고, 친구들 만나 몸도 푸는 휴식을
갖고 싶을겁니다. 어쩌면 그게 시즌을 위해서도 낳을수 있죠.
하지만, 국내 프로야구의 수준을 위해서도, 이러한 세계화의 역량에서
스스로의 기량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꼭이, 국내리그 이후에 메이저리그에 가지 않더라도 말이죠.
그런면에서 정현욱이나 김인식감독의 욕망의 수준이 더 높다고 보여집니다.
실은 국내에서 어느정도 자리잡은 프로선수들은 퇴행을 하게 되더군요.
그냥 정수근이 나오는게 아니라, 연봉 주어지지. 경쟁은 막혀있지.
그렇게 되면, 스스로 퇴물이 되어가는겁니다.
한국 야구를 통해, 욕망의 단계를 엮어봤습니다.
그래도 할말은 있습니다.
WBC를 통해서 한국 엘리트들이 세계의 엘리트들과
어떻게 경쟁해나가는지가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WBC를 이끄는 동력은
병역혜택입니다.
이글에서 그 혜택의 잘잘못을 논하는것이 아니라,
높은 연봉의 선수들이 혜택이나 애국심이라는 공공성의 영역을
어떻게 해결하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류현진은 초고교급 투수였죠. 억대 연봉으로 프로에 입단하기전에
그의 눈빛은 살아있었습니다.
여러번의 아시안게임으로 이미 병역혜택을 받아서였을까요.
이미 몸은 불어있었고, 무엇보다 눈빛이 죽어있었습니다.
반면, 정현욱은 병역비리 파동으로 실형과 군입대 합쳐서
3,4년간의 공백을 가지고, 선동렬감독에게 혹독하게 훈련받았다고 봅니다.
하긴 정현욱에게 WBC는 자신과 다른 세계의 강팀들과의 싸움이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죠.
여기서 욕망의 수준이 결정됩니다.
일류경쟁 > 애국심 > 병역혜택.
어떻게 보면, WBC는 국내 일진의 프로야구선수들에게는 기회입니다.
물론 정규시즌전에 가족과 시간보내고, 친구들 만나 몸도 푸는 휴식을
갖고 싶을겁니다. 어쩌면 그게 시즌을 위해서도 낳을수 있죠.
하지만, 국내 프로야구의 수준을 위해서도, 이러한 세계화의 역량에서
스스로의 기량을 보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꼭이, 국내리그 이후에 메이저리그에 가지 않더라도 말이죠.
그런면에서 정현욱이나 김인식감독의 욕망의 수준이 더 높다고 보여집니다.
실은 국내에서 어느정도 자리잡은 프로선수들은 퇴행을 하게 되더군요.
그냥 정수근이 나오는게 아니라, 연봉 주어지지. 경쟁은 막혀있지.
그렇게 되면, 스스로 퇴물이 되어가는겁니다.
한국 야구를 통해, 욕망의 단계를 엮어봤습니다.
눈내리는 마을
김동렬
우승하면 30억이라는데..
게다가 환율효과까지 더하면
몇몇 젊은선수들은 잘하면
거의 1년 연봉 절반에 가까운 상금을 나눠받을 수도 있겠소.
이 정도면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겠고.
르페
욕망의 단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있는지 모르지만 확실히 단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격적 수준은 그의 욕망의 수준과 비례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저도 이미 스무살 무렵에 무엇을 욕망하고 싶은지 결정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뜬구름잡듯이 막연하고 비현실적이었다는게 문제였지만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품었던 욕망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한편으론 절망스럽기조차 하죠.
욕망이 진화한다면 그것은 결심이나 의지의 힘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침투와 상호작용에 의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뭔가를 바꾸고 싶다고 해서 저절로 바꿔지지 않는다는..
오히려 내가 나를 가두는 감옥이라는 인식이 생긴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경쟁이 없이는 성장도 없다는 말은, 국가나 기업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어떤 사람의 인격적 수준은 그의 욕망의 수준과 비례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듭니다.
제 경우를 말씀드리자면, 저도 이미 스무살 무렵에 무엇을 욕망하고 싶은지 결정되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이 뜬구름잡듯이 막연하고 비현실적이었다는게 문제였지만요.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때 품었던 욕망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한편으론 절망스럽기조차 하죠.
욕망이 진화한다면 그것은 결심이나 의지의 힘이 아닌, 외부로부터의 침투와 상호작용에 의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뭔가를 바꾸고 싶다고 해서 저절로 바꿔지지 않는다는..
오히려 내가 나를 가두는 감옥이라는 인식이 생긴것은 최근의 일입니다.
경쟁이 없이는 성장도 없다는 말은, 국가나 기업뿐 아니라 개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진리가 아닐까 생각해봤습니다.
인문사회계열의 엘리트들은 죄송하지만 제외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판단기준이 서구 강단에 있고, 그 서구 인문강단또한
제대로된 기준을 갖지 못하기때문이죠.
이공계 강단을 기준으로 볼때,
세계와의 경쟁에 배제된 그룹들은 경쟁원리로 물러나야 합니다.
그게 그들을 위해서도 공동체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이건 엘리트그룹의 상벌체계인데, 이지점에서 국가가 개입해야하지 않나합니다.
학술원을 노인네들 경로 잔치로 만들지 말고,
국내외 석학으로 이뤄진 판단기준을 명기해야합니다.
전기공학이나 화학공학쪽은 이거 가능합니다.
그렇게, 이공계전반에 기준을 세우고, 튼튼한 학문의 물적토대를 갖춰야합니다.
학문의 물적토대란, 이론을 바탕으로 한 기술적 접근이
현실에서 잉여를 창조하는 것이겠죠.
불가능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공계 강단 엘리트들에게는 시련의 기간이겠지만,
그 시련만큼, 강해진다는것을 깨닫는다면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