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만 잘 해도 인생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것이오.
세상살이 이야기 들어보면 대부분 남의 고민을 자기가 고민하고 있소.
내가 공을 정확히 던졌는가만 신경쓰면 그 뿐
저쪽에서 내 공을 제대로 받았는가는 확률에 넘기면 그 뿐.
예컨대 얇은 주머니에서 1백만원을 빼 쓴다면 큰 고민이 되지만
인생전체의 총 수익 10억에서 빼 쓴다고 하면 고민이 안 되는 것이오.
이런 일이 인생에 몇 번 일어나는가 확률만 챙기면 되니까.
상부구조로 보면 간단히 정리가 되오.
나의 문제와 타인의 문제가 한데 뒤섞여 있었던 적이 있었소.
어쩌면 모든 괴로움의 시작은 한데 엉켜있다는 라는 것인것 같소.
분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래도 지금은 많이 좋아졌다고 해야 하나..ㅋㅋ^^;
그런데 어디까지가 나의 몫이고 어디까지가 타인의 몫인지 쉽사리 구분이 안될 때도 있소.
자신이 선택해야 될 부분이 자신의 몫이고 자신의 선택권을 넘어서 버리는 부분은 나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구분해야 할 때... 어찌보면 인간이 냉정하다. 라는 지점이기도 하여, 그렇게 타인에게 보여지기도 하지만, 타인이 냉정해 보인다라고 하는 것과 자신이 냉철하게 선택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것인데...이 부분에서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경우가 많소. 또한 그러한 것들은 타인의 시선들이 간섭을 하려 드는 지점이기도 하다고 생각되오.
분리하고, 구분하려는 것과 뭉덩거려 섞여 버리려고 하는 것에서, 시선의 차이가 나타난다고 보이며, 대체로 뭉덩거려 버리려는 시선들은 끈적거리는 유대감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어서, 자신의 문제를 타인에게 전가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고 생각되오.
내 문제와 타인의 문제를 분리해서 머릿속으로 정해야 한다면, 기냥 냅두는게 편할지도.
이건 기냥 유전자가 정하는거요.
생각으로 정한다는게 넘 신기하오.
유전자가 정한다는 것을 좀 더 풀어서 설명해주시오. ^^
그런 성향으로 태어난다는 거요.
그렇게 안태어났다면, 뭔가 깨달음이 필요한데,
그게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오.
예를들어 엄마가 죽었다.
나는 엄마의 상실로 인한 슬픔을 느낄 것이나 그 슬픔은 간결한 것이요.
내안의 다른 슬픔을 작동시키는 요소들과 합체시켜 슬픔덩어리를 키워서 즐기거나 하지 않는 것.
엄마의 죽음 자체는 나의 문제가 아닌것이요.
엄마가 왜 죽었을까 부터 시작해서, 엄마에게 조금 더 잘해주지 못했던 아빠나 형제들에 대한
미움이나 평가따위를 내가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런건 그냥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성향으로 정해진다는 거요.
'
그런 성향으로 태어난다는 거요.
그렇게 안태어났다면, 뭔가 깨달음이 필요한데,
그게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오.
예를들어 엄마가 죽었다.
나는 엄마의 상실로 인한 슬픔을 느낄 것이나 그 슬픔은 간결한 것이요.
내안의 다른 슬픔을 작동시키는 요소들과 합체시켜 슬픔덩어리를 키워서 즐기거나 하지 않는 것.
엄마의 죽음 자체는 나의 문제가 아닌것이요.
엄마가 왜 죽었을까 부터 시작해서, 엄마에게 조금 더 잘해주지 못했던 아빠나 형제들에 대한
미움이나 평가따위를 내가 할 필요가 없다는 것.
이런건 그냥 태어나면서부터 그런 성향으로 정해진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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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장들 전체가 많은 이들이 고민하는 혹은 알고자 하는 것들이라고 생각되네요.
이러한 것이 자동으로 되는 사람은 그런 성향이 이미 발현되어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잠재되어 있는 것이라고 보이오.
거기에 깨달음이 가교 역할을 하겠지만....
이러한 상황을 보는 것에서 냉정과 냉철이 같이 존재하고 있다고도 보이오.
행위하는 자의 입장에서의 냉철과 그 행위를 지켜보는 자의 입장에서 보는 냉정하다고 느끼는 것은 사실 같은 것을 다르게 전달 받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되오.
그리고 냉철과 냉정의 차이를 가르는 것은 감정이 지나치게 개입하는가? 하지 않는가?의 차이라고 생각도 되오.
감정의 절제를 의식적으로 하는 사람과 자동으로 되는 사람의 차이가 될 수도 있고...,
그런데 사람은 어느 순간에 상대의 감정의 선을 자기도 모르게 읽어버릴 때가 있다고 보이오.
그러나 상대의 마음을 읽어버리게 되는 것과 자기 감정에 천착하는 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다고 보이오.
이것 역시 구별이 되어야 하는데, 자동으로 구별되어 감정이 서로 섞이는 것을 막을 수 있으나, 얽혀버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보이오.
어쨌든 그 감정의 선을 읽어버리게 되었을 때, 그 읽혀진 감정이 자기 감정이 될 때도 있고 거리를 유지하고 보는 경우도 있다고 보이오. 이건 조절의 문제라고 보이오. 조절의 밸런스를 맞춰주면 되오. 그런데 이 역시 깨달음의 문제일 수도 있소.
자신이 생각했다라고 생각할 겨를이 없이 바로 자동으로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겠으나, 결대로 가면 자동으로 일어난다고 생각되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 반드시 생각을 하고 교통정리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되오.
보통의 사람은 태어나면서 이미 정해진 것, 그것이 제대로 발현이 안되는 경우가 더 많다고 보이오. 이것은 지나치게 자신의 감정에 집착한다던가? 혹은 감정을 속이거나 혹은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에 혹은 환경과의 교감이 안좋을 때라고 생각되기도 하오.
그리고 때로는 발현이 안되어야 좋은 경우들도 있을 수도 있다고 보이지만...
타고난 성향으로 정해진 것들은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발현되는가가 중요한 것이라고 보이고, 타고난 성향에서 자동적으로 발현되는 것들이 환경과의 교감에서 그 교감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는 고립되는 성향으로 흐를 확률도 있다고 보이오. 그러나 긍정적인 경우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끌고 가기 때문에 환경과의 교감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있다고 보이오.
태어날때부터 세상과의 주도권을 유리하게 갖고 있는 것과 후천적인 각성 혹은 자각을 통하여 세상과의 주도권을 자기쪽으로 돌리는 것에서...., 주도권은 선택권을 자기가 행사한다는 것이므로..., 선천적인 것의 발현의 시기에서 어떤 계기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소. 그것이 사막을 건너는 문제일 수도 있고, 살면서 뭔가를 선택해야 할 때 자신의 성향을 자각할 수도 있다고 보이오. 누구나 다 깨닫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못 깨닫는다고 할 수도 없소. 단지..조금의 차이는 있다고 보이오. 그래서 관점의 중요성이 대두되는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출근 전에 똥을 싸야 좋다는 말씀은 정말 공감 100%입니다! 도중에 밖에서 똥싸면 정말 피곤합니다...!!!
'일시적인 반동에 속지말자!!!' 머리로는 항상 이렇게 생각해도 막상 매번 그대로 실행하기가 정말 어려운 문제입니다. 마음은 벌써 그 반동을 느끼고 몸은 이미 반응을 하고 있더군요.
좀 더 멀리 앞을 내다보고 운전을 하라는, 운전학원 강사의 가르침이 생각나는 글이었습니다!
반동이 나쁜게 아네요.
반동을 합리화 정당화 하고 논리를 만들어 내는게 나쁘죠.
실용이 반동인데 실용도 필요합니다.
급할때는 비상한 결단도 요령도 속임수도 가능해요.
문제는 그 속임수를 참이라고 사기치고 거기서 머무르는 겁니다.
일회용으로 반동하고 밸런스 잡고 얼른 빠져나오면 되는데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잘 없죠. 유시민 정도나 그렇게 하고.
정동만 하면 센터가 붕괴되는 문제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정기적으로 센터를 교체합니다.
강남이 지고 신도시가 뜨는거죠.
구문명이 망하고 신문명이 뜨고 서구가 망하고 동양이 뜨고.
아니면 이보전진후 일보후퇴를 합니다.
계속 진보하려면 이보전진후 센터교체라는 고차방정식을 써야합니다.
그러므로 제한된 구역에서는 일시적인 반동도 필요합니다.
문제는 관성의 법칙, 인간은 한번 한 짓을 반복하는 습성이 있다는거.
계속 반동하며 정당화 논리를 만드는거.
그러므로 필요한 반동은 바보들에게 시키고 우리는 정동만 하는거죠.
"할 일(마이너스)만 신경쓰고 그 보답(플러스)은 신경쓰지 말자. 보답은 받으면 좋고 못 받으면 확률의 형태로 어딘가 저축된 거다" 좋은 말씀 입니다..^^
ps의 나의 문제와, 타인의 문제를 확실히 구분하는거. 이거 어쩜 이렇게 나랑 똑같지? 나도 글케 살아왔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