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이해하려면 ‘게임의 법칙’을 알아야 한다. 필자가 늘 말하곤 하는 ‘우선순위 판단의 원리’에 따르면..
고수는 나쁜 카드와 좋은 카드가 있을 경우 나쁜 카드를 먼저 실험해서 그것으로 정보를 얻고, 그렇게 얻은 정보를 토대로 결정적인 시기에 좋은 카드를 내밀어 승부를 본다.
그러나 좋은 카드는 딱 한번 밖에 써먹을 수 없다. 수를 남발하면 적에게 이쪽의 정보를 역으로 제공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고수는 되도록 수를 쓰지 않는다. 일이 잘 풀리면 끝내 안써먹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좋은 카드 아끼다가 판이 아슬아슬하게 가는 것이 노무현식 롤러코스터 정치다.
당장 지지율 높이기는 쉽지만 더 좋은 선택을 위한 일말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 지지율 저하를 감수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노무현은 언제라도 최선을 포기하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차선을 선택했을 때라도 최선을 위한 약간의 가능성은 남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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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데일리에.. ‘대통령이라면 민노당과의 연정 못할 것 없다’는 요지의 칼럼을 올렸는데.. 오늘 뉴스에 “노대통령 민노당등과 연정이라도 해야"는 제목의 글이 뜨는 것을 보니..
역시 필자의 예견이 맞은 것. 문,염 카드는 노무현 대통령이 쓸 수 있는 카드들 중 하나지만 버리는 카드다. 이걸 빨리 써먹어버려서 이들이 나중 뻘짓 못하게 명토를 박아놓는 것이 대통령의 목적이었다.
고수가 수를 쓰는 것은 무슨 공작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적정을 파악하려는 의도다. 정치가 수를 써서 된다고 믿는다면 하수다.
고수는 단지 흐름을 따라갈 뿐이며.. 흐름을 읽기 위한 정보수집에 에너지의 9할을 투입한다. 문,염은 정보수집용 버리는 카드. 아껴둔 진짜는 따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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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문,염으로 민주당에 대한 응수타진을 했다. 정보수집을 한 것이다. 그것으로 역할 끝이다. 역할은 끝났지만 당장 폐기되지는 않는다.
필자가 지난 금요일에 쓴 ‘전여옥의 전성시대’를 대문에 올리지 않은 이유는 그 때문이다.
박근혜가 전여옥 대변인 노릇을 해주니 전여옥이 맘에도 없는 사표를 쓰듯이, 대통령이 문을 위해 변명해주었다는 것은, 문에 대한 사실상의 사망통지서다.
그러나 형이 당장 집행되지는 않는다. 왜? 이미 정치적인 사망선고를 내렸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당장 사형을 집행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문은 조금 더 오래 가도 된다. 왜? 문을 제껴놓고 그 빈자리를 대통령이 직접 메우고 있기 때문이다.
보라! 지난 1주일간 대통령이 어떤 일을 했는지를!
● 27일 당원동지 여러분께 보내는 편지
● 28일 윤장관 관련 국민여러분께 드리는 글
● 29 여야지도부 오찬에서 윤장관 해임안을 한나라당 정치공세로 규정
이건 눈부신 거다.
이는 단지 해임안을 한나라당의 공세로 규정한 것이 아니라 민노당과 민주당을 불러서 역으로 한나라당을 포위해버린 것이다.
박근혜는 그 무대에 나가지 않는 방법으로.. 빼다가.. 오히려 포위당해 버렸다. 박근혜가 갔다면 그렇게는 말하지 않았을 것인데도 말이다. 노무현과 박근혜의 차이는 크다.
일주일 사이에 상전벽해다. 공공기관 이전에 대한 반발, 낙하산 논란, 총기사건, 부동산 폭등, 지지율 저하 등.. 난마처럼 얽힌 문제를 한 방으로 해결해 버렸다.
무엇인가? 이건 다 문의 소임이다. 당정분리로 대통령이 정치를 안하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문을 제쳐버리고 대통령이 안하겠다던 정치를 재개하는가?
당원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문을 사살해 버렸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불가피하게 대통령이 직접 정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정치를 했다. 그러나 굵고 짧은 한 방이었다.
물론 필자는 대통령이 계속 정치를 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건수를 모아놓았다가 일괄타결하는.. 치고빠지기식 행보가 대통령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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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대통령은 처음부터 큰 그림을 그렸으며.. 우리당 의장 경선 당시부터 민노당과 민주당에 대한 연정 가능성을 구상하고 있었으며..
우리당에 강한 지도부가 들어설 경우 오히려 연정의 가능성은 약해진다는 사실을 판단하고.. 약한 지도부를 용인하는 방법으로.. 일단 문을 바보로 만들어 놓고 염을 써서 민주당에 대한 정보를 획득한 후..
그렇게 얻은 정보를 국민들에게 전달한 후, 왜 민주당과의 연대가 물리적으로 안되게 되어 있는지를 국민들이 충분히 납득할 만큼의 시간을 벌은 후.. 민노당 쪽을 지속적으로 노크하는 방법으로
우리당의 정체성 확보와 공간 벌리기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사냥한다.
결론적으로.. 대통령이 감추어둔 좋은 패는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있다. 유시민이 이 과정에서 대통령의 마음을 읽고 침묵한 것이 그 증거. 필자가 대통령의 마음을 읽었기에 ‘전여옥의 전성시대’를 대문에 올리지 않았듯이.
과거 대통령이 김혁규를 두둔한 것이 김을 총리직에서 내린다는 예고였듯이, 이기명선생께 ‘선생님’이라는 좋은 호칭을 선물하는 방법으로.. 좀 뒤로 물러나 있으라고 눈치를 줬듯이..
안희정 등을 ‘동지’로 대접하는 방법으로 퇴직금 주어 내보냈듯이.. 당원들에게 보낸 편지는 문에게 주는 전별금이었던 것이다.
하여간 박근혜는 문을 살려서 잠재적 라이벌인 정과 김을 끌어내는 수법을 써야 했는데 어리석게 대통령을 파트너로 선택하는 우를 범했다. 이회창이 늘 했던 그 뻘짓. 소총 든 넘이 탱크하고만 싸우겠다는 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