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자들은 나눗셈을 쓰지 않고 대신 분수를 곱한다. 나눗셈은 곱셈에 포함된다. 방향이 바뀌었을 뿐 본질은 같다. 곱셈의 짝인 나눗셈은 없는데 왜 덧셈의 짝인 뺄셈은 있을까? 이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원래 하나인 것을 보는 위치에 따라 제각각 다르게 보므로 세상이 혼란한 것이다. 덧셈과 뺄셈 역시 하나의 기준으로 한 줄에 꿰어서 보아야 한다. 한 줄에 꿰어서 보면 세상은 마이너스 뿐이다. 플러스는 없다. 수학자의 셈에 나눗셈이 없듯이 구조의 세계에 덧셈은 없다. 나눗셈은 곱셈에 포함되고 덧셈은 뺄셈에 포함된다. 사물들을 낱낱으로 쪼개서 보지 말고 서로 연계시켜서 통짜 덩어리로 보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 덩어리로 보면 곱셈과 방향전환, 뺄셈과 방향전환이 있을 뿐이다. 플러스는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서 마이너스 뒤를 따라다닌다. 그러나 그림자와 같아서 무시해도 불편함이 없다. 오히려 번잡하지 않고 명료해진다.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하나의 사건 안에서 연속적인 과정으로 이해해야 한다. 세상은 마이너스로 간다. 그러려면 마이너스 할 무엇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곱하기에 의해 달성된다. 곱하기는 짝짓기다. 세상의 가치창출은 언제나 짝짓기로 일어난다. 그 다음엔 가치실현 그리고 가치전달이다. 가치창출은 짝짓기로, 가치실현은 마이너스로, 가치전달은 플러스로 나타난다. ◎ 가치창출(짝짓기) - 곱셈 ◎ 가치실현(펼치기) - 뺄셈 ◎ 가치전달(바꾸기) - 덧셈 우리가 더하기로 아는 것은 실로 가치전달이다. 그것은 배달될 뿐 창조되지 않는다. 더하기로 가치가 창출되는 예는 없다. 중국집에서는 볶은 짜장과 삶은 면과 양파, 단무지를 짝지어 짜장면을 완성함으로써 가치를 창출한다. 그 과정은 곱셈이다. 면에 짜장을 부으면 덧셈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덧셈은 같은 것의 반복이다. 짜장에 짜장을 더하고, 면에 면을 더하고, 단무지에 단무지를 더하는 것이 덧셈이다. 요리는 곱셈이다. 무엇이 곱해지는가? 가치가 곱해진다. 밀가루 300원어치와 춘장 300원어치가 짝지으면 4천원짜리 짜장면이 된다.
◎ 남자+남자= 가치없음, 축구나 한 판 하고 저녁 되면 기어들어옴. ◎ 남자*여자=가치창출=>결혼성공, 아기탄생, 가족번창, 세계평화. 가치는 팀원들을 짝지어 팀을 완성하는 데서 얻어진다. 그 과정은 덧셈이 아니라 곱셈이다. 왜냐하면 짝짓기는 토대의 공유로 인하여 얻어지기 때문이다. 반면 덧셈은 토대가 공유되지 않는다. 남자와 남자는 한 집에서 살지 않는다. 이득이 없다. 남자와 여자는 한 집에서 산다. 월세를 절약하여 이득을 얻는다. 아기는 저절로 생겨난다. 행복도 따라온다. 이득이 매우 크다. 곱장사다. 곱셈이다. 축구팀원 11명이 축구장 하나를 공유하는 것이다. 토대의 공유가 짝짓기의 의미다. 네거리와 같다. 두 길을 교차하면 1+1은 2가 되어야 하지만 네거리의 교통경찰은 사방을 동시에 커버해야 한다. 1+1=2가 아니라 2*2=4가 된 것이다. 토대의 공유에 의한 포지션의 겹침은 항상 곱으로 간다.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이 아니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그만큼 효율이 있고 그 효율에서 에너지가 나온다. 양 둘이 운동 하나가 되고, 운동 둘이 힘 하나가 된다. 이때 2단겹침이 일어났는데 힘 하나가 양 넷을 커버한다. 구조의 포지션 겹침은 항상 곱으로 간다. 겹치는 것이 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곱하기는 가로 곱하기 세로다. 가로와 세로가 겹치는 것이다. 가로 3, 세로 3이 겹치면 면적은 9가 된다. 곱셈이 가로 곱하기 세로로 토대를 공유하여 이득을 얻는다는 점을 분명히 이해하는 것이 좋다. 팀을 꾸리는 것은 곱셈이지만, 팀이 꾸려졌다고 해서 곧 골이 터진 것은 아니다. 그 팀원들 중에 누구 한 명이 골을 넣는 것이며 나머지는 지원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마이너스로 이루어진다. 패스하는 거다. 그렇게 얻어진 점수가 전광판에 기록될 때는 플러스로 기록이 된다. 단지 표기가 그렇게 될 뿐이다. 전광판의 점수는 플러스가 되지만 실제로 그라운드에서 선수들이 한 것은 빼기다. 자기 공을 상대편 골대로 뺀다. 투수는 자기 공을 타자에게로 빼고, 타자는 자기에게 온 공을 외야로 뺀다. 그라운드 밖으로 빼버리면 홈런이 된다. 뺄셈을 전개하여 공을 많이 잃어먹을수록 이득이 된다. 세상은 곱하기와 빼기로 되어 있다. 더하기는 없다. 더하기는 단지 전달되고 전시될 뿐이다. 곱하기는 역시 외부의 개입에 의해 일어나고 더하기 역시 외부의 스코어보드에서 일어나므로 자기가 결정하는 것은 빼기 뿐이다. 활과 화살을 곱하는 것은 궁수다. 즉 바운더리 바같에서 외부의 사람이 개입한 것이다. 과녁 역시 외부에 있는 것이다. 순수하게 활이 할 수 있는 것은 활에서 화살을 빼내는 것 뿐이다. 밭에서 곡싱을 키우는 것은 외부의 태양이다. 밭에서 농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밭에서 그루어진 곡식을 빼오는 것 뿐이다. 그리고 그 수확된 곡식을 가져가는 것은 주인양반이다. 외부의 엉뚱한 자가 플러스하여 간다.
노동자가 공장에서 자동차를 신차로 빼도 그 자동차를 가져가는 것은 소비자다. 뺄셈은 노동자가 하고 덧셈은 외부의 소비자가 하는 것이다. 소비자는 공장 바깥의 사람이므로 바운더리 밖이다. 논외다. ◎ 곱셈(짝짓기)은 세상을 만들고 ◎ 뺄셈(펼치기)은 세상을 움직이고 ◎ 덧셈(바꾸기)은 세상을 전시한다.
밭은 곱셈의 짝짓기 방법으로 햇볕과 물과 밭을 곱하여 곡식을 그루고, 농부는 뺄셈의 방법으로 밭에서 수확을 빼오고, 다시 방앗간에서 백미를 빼온다. 주인은 덧셈으로 그것을 곳간에 쟁여놓는다. 주인의 덧셈은 수확된 곡물을 저장하는 창고의 위치만 바꾸었을 뿐, 실제로 가치를 창출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농사를 짓는 것은 태양이다. 태양은 곱셈의 방법 곧 짝짓기 방법으로 농사를 짓는다. 곱셈은 겹침셈이며 모든 가치의 창출은 짝짓기에 의한 포지션 겹침에서 얻어진다. 겹치면 곱으로 증가한다. 사과든 상자든 겹치게 두겹, 세겹으로 쌓아보면 그게 곱셈임을 알 수 있다. 겹침은 한계가 있다. 무한히 겹칠 수 없다. 가로 한 벌 겹칠 때 세로 한 벌 겹쳐야 한다. 겹셈은 항상 곱으로 간다. 곱과 겹의 어원이 같다. 한 알씩 가져오면 덧셈이고 한 줄씩, 한 겹씩 가져오면 곱셈이다. 태양에너지를 많이 투입한다고 해서 수확이 늘어나는 것은 아니다. 태양에너지와 물과 산소의 거름과 씨앗이 적당한 조합을 이루어야 한다. 겹은 항상 가로세로 혹은 가로세로높이의 비례가 맞아야 한다. ◎ 곱셈의 짝짓기 – 창의, 발명, 발견, 조직, 창업, 예술(무언가 겹친다) ◎ 뺄셈의 펼치기 – 기계나 도구로 노동하여 경작한다.(무언가 뺀다.) ◎ 덧셈의 바꾸기 – 수렵, 채집은 있는 것의 위치를 바꾼다.(줍는다.) 인생의 가치있는 것은 모두 짝짓기에 의해 일어난다. 겹침에 의해 일어난다. 곱셈에 의해 일어난다. 교육, 취업, 결혼 등으로 공동체나 시스템, 조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팀을 결성하는 것이다. 교육은 뇌와 지식을 짝짓는다. 취업은 일자리와 노동을 짝짓는다. 결혼은 부부로 짝짓는다. 발견과 발명, 예술, 창의, 창업은 모두 짝짓기다. 겹쌓기다. 짝짓기야말로 모든 가치창출의 근원이다. 그러나 짝을 짓는 것은 단지 팀을 꾸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축구팀을 결성했다고 해서 득점을 올리고 경기에 승리하는 것은 아니다. 팀을 결성한 다음에는 다시 경기를 벌여야 한다. 결혼을 한 다음에는 다시 살림을 꾸려야 한다. 직업을 구한 다음에는 다시 노동을 해야 한다. 팀의 결성, 부부의 결혼, 직장의 구직은 모두 짝짓기다. 겹셈이다. 그 다음에 오는 경기의 진행, 부부생활의 지속, 직장에서의 노동은 뺄셈이다. 덧셈은 그 결과로 얻어지는 경기의 승리, 가정의 행복, 직장의 월급 등이다. 그러나 그러한 승리와 행복과 월급은 이미 실현한 가치를 위치만 바꾸어서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최선을 다하여 경기하면 승리는 따라오는 것이고, 가정을 잘 유지하면 행복은 따라오는 것이고, 직장에서 일하면 월급은 따라오는 것이다. 덧셈은 거울에 비친 상처럼 좌우가 바뀌어 나타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세상을 움직여가는 것은 모두 마이너스다. 경기를 진행하고, 가정생활을 하고, 회사에서 일하는 것은 모두 뭔가 빠져나가는 것이다. 마이너스다. 플러스는 그 마이너스가 교환한 것이다. 경기의 활동으로 승리를, 가정의 생활로 행복을, 회사의 노동으로 월급을 바꿔온 것이다. 위치를 바꾸었을 뿐 뭔가 이루어낸 것은 아니다. 월급이 통장 안에 있거나 내 호주머니에 있거나 단지 위치만 바뀌는 것이다. 결국 남의 호주머니로 가고 만다. 내가 하는 것은 회사 계좌의 것을 내 통장 계좌로, 내 통장의 것을 내 호주머니로 빼오는 것이다. 구조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있다. 상부구조의 질->입자는 곱셈과정 곧 짝짓기로 일어나며, 하부구조의 힘->운동은 뺄셈과정 곧 펼치기로 일어난다. 덧셈은 없다. 그것은 외부에서 보여지는 것이다.
궁수는 활과 화살을 짝지어준다. 궁수는 외부에 있다. 순수하게 활이 하는 것은 화살을 빼는 것 뿐이다. 그 화살은 과녁에 더해지지만 역시 외부의 사정이다. 화살을 쏘는 것으로 이미 활의 역할은 끝난 것이다. 내가 총을 쏘면 총알이 적의 가슴에 더해진다. 그 덧셈은 적의 사정이다. 내 사정은 아니다. 내 사정은 내 총에서 총알을 빼는 것이다. 적과 나를 짝지은 것도 내 사정은 아니다.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이다. 나에게 더해진 가치는 모두 타인에게 있다. 내가 사랑을 더해봤자 타인의 마음 속에 그 사랑은 쌓여 있고, 내가 명성을 더해봤자 타인의 기억 속에 그 명성 쌓여있고, 내가 재산을 더해봤자 은행의 금고 속에 그 돈은 쌓여있다. 덧셈은 항상 남이 가지고 있다. 나의 식구를 더해봤자 그 몸들은 모두 타인이 소유한다. 나의 재물을 더해봤자 그 재물은 모두 지구가 소유한다. 모든 덧셈은 결국 남이 가진 것이다. 남에게 더해준 것이다. 나의 행복, 나의 기쁨, 나의 즐거움은 모두 나의 외부에서 나에게로 쏘아진 것이다. 그것은 내 몸에 쌓여있지만 모두 외부에서 내게로 빼돌려진 것이다. 인간은 오직 마이너스만 결정할 수 있다. 인간은 오직 마이너스만 결정한다. 주는 것은 내가 결정한다. 받는 것은 나의 결정사항이 아니다. 받는다는 말은 손을 벌려 물건을 받치고 있다는 말이다. 나는 손으로 받치고 있을 뿐이고 그 물건을 내게로 옮기는 것은 타인이다. 환자는 엉덩이를 까고 누웠을 뿐이고 주사바늘은 간호사가 찌른다. 모든 플러스는 타인이 결정하고 모든 마이너스는 내가 결정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상부구조의 짝짓기, 곱셈, 토대의 공유, 포지션의 겹침에 의해 일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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