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여옥의 질투
전여옥은 노무현이 무섭다.
전여옥이 노무현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이 본인의 서민적 정체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들기 때문이다. 필자가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바 노무현 정권의 계급적 성격 말이다.
80년대 이후 심화된 계급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이건 DJ시절 국민의 정부와도 다른 것이다.
80년대를 관통해 온 이 나라 모든 중장년층이 공통적으로 체험한 농어촌의 해체와 달동네 증가 그리고 도시빈민의 대두 말이다. 이 역사의 흐름을 읽어야 노무현이 보인다.
많은 사건들이 불과 10여년 사이의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기존의 향촌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되고 전혀 성격이 다른 새로운 사회가 건설된 것이다. 그 여파가 길게 가는 것은 당연하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 그러나 여전히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아가서 새로 장만한 신형 승용차를 사촌들에게 뽐내고 싶어 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진 상실감을 돌아보아야 한다. 바로 그곳에 2005년 대한민국호를 움직여가는 저변의 에네르기가 고여 들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몸은 도시에 두고 있지만 마음은 고향의 부모 곁에 가 있다. 이러한 한국인들에게 서구 위주의 계급적 잣대를 들이댄다거나 혹은 전여옥식 출세지향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허무할 뿐이다.
한국인들이 가진 꿈은 잃어버린 가족의 복원이다. 그것은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아우르는 것이다. 또는 명절날 사촌들에게 큰소리 한번 쳐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고향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다.
향촌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아파트가 새로운 공동체의 대안은 될 수 없다. 한국인들이 유독 아파트를 선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인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공동체의 단위로 보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에게 공동체는 거주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휴대폰 전화번호부 속에 있다. 전화로 연결되고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안에 오히려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진실한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인들에게 들이대어지는 전여옥의 출세주의야 말로 맹랑한 것이다. 어렵게 돈 모아서 장만한 신형자동차로 명절날 고향을 찾아가서 누구에게 자랑할 것인가? 여전히 한국인들에게는 형제가 중요하고 친척이 중요하며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삶의 목적이요 보람인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전여옥의 망언에 분노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비록 자신은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고향에 있는 동생들과 사촌들을 잊지 않고 있는 그 마음을 전여옥은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알아야 한다. 한국인들이 보수적 성향을 가진다는 조중동의 평은 오판일 수밖에 없다. 80년대를 관통하여 온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사건은 고향의 상실이며 향촌 공동체의 해체이다. 그 아픔, 그 상처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잃어버린 공동체를 복원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 아파트는 다만 몸을 의탁하는 곳일 뿐 그들의 두고 온 정은 휴대폰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안에 있다. 그들은 돈을 벌어서 강남으로 진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서 고향의 형제와 사촌들에게 인심을 쓰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그러한 열정이 남아있는 한 당분간 한국에서는 중도진보 성향의 정당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 이 원리를 알아야 한다. 고향을 해체시켜, 자신의 성공을 인정받을 수 있는, 또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갈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엄청난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흐름이 적어도 백년은 가는 흐름이다.
정체성은 자기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다. 따져보기로 하면 노무현 역시 엘리트다. 권영길은 노동자가 아니지만 민노당은 노동자정당을 표방하고 있듯이 노무현은 서민이 아니지만 서민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왜인가? 인간 노무현이 자신의 기억 속에서 두고 온 고향을 지워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여옥이 말끔히 지워버린 그 기억을 노무현은 여전히 지우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의 서민적 정체성은 노무현이 스스로 자기규정한 것이다.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좌파들이 말하는 계급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노무현에게는 대통령으로서 성공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공모델을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득권과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성공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타협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성공한 제왕 세종임금이 아닌 세종을 키운 태종임금이 되겠다는 노무현의 다짐과 같다.
아웃사이더 정치인 전여옥
이 나라 전체로 보면 전여옥도 이른바 이회창류의 메인 스트림에 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분야로 범위를 좁혀놓고 본다면 전여옥은 비주류다. 그는 이렇다 할 민주화 운동 경력이 없다.
전여옥은 남들 다 가는 감방에도 한번 못 가본 사람이다. 그리고 이 나라 정치는 당분간 민주화운동 세대가 지배하게 되어 있다. 이 흐름이 못해도 백년은 간다.
그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신이 겉돌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배역이라고는 늘 악역 뿐이다. 뺑덕어멈의 역할이거나 팥쥐 역할 아니면 신데렐라의 두 언니 정도가 고작이다. 뺑덕어멈 전여옥이 신데렐라 노무현을 질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전여옥은 노무현이 무섭다.
전여옥이 노무현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노무현 대통령이 본인의 서민적 정체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들기 때문이다. 필자가 오래전부터 주장해온 바 노무현 정권의 계급적 성격 말이다.
80년대 이후 심화된 계급갈등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지 않으면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본질을 이해할 수 없다. 이건 DJ시절 국민의 정부와도 다른 것이다.
80년대를 관통해 온 이 나라 모든 중장년층이 공통적으로 체험한 농어촌의 해체와 달동네 증가 그리고 도시빈민의 대두 말이다. 이 역사의 흐름을 읽어야 노무현이 보인다.
많은 사건들이 불과 10여년 사이의 짧은 기간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기존의 향촌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되고 전혀 성격이 다른 새로운 사회가 건설된 것이다. 그 여파가 길게 가는 것은 당연하다.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 그러나 여전히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아가서 새로 장만한 신형 승용차를 사촌들에게 뽐내고 싶어 하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가진 상실감을 돌아보아야 한다. 바로 그곳에 2005년 대한민국호를 움직여가는 저변의 에네르기가 고여 들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몸은 도시에 두고 있지만 마음은 고향의 부모 곁에 가 있다. 이러한 한국인들에게 서구 위주의 계급적 잣대를 들이댄다거나 혹은 전여옥식 출세지향적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허무할 뿐이다.
한국인들이 가진 꿈은 잃어버린 가족의 복원이다. 그것은 한 집안의 가장이 되어 동생들을 아우르는 것이다. 또는 명절날 사촌들에게 큰소리 한번 쳐보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거의 고향으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공동체의 성원으로서의 소속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이다.
향촌 공동체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도시의 아파트가 새로운 공동체의 대안은 될 수 없다. 한국인들이 유독 아파트를 선호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국인들은 자신이 거주하는 지역을 공동체의 단위로 보지 않고 있음을 의미한다.
한국인들에게 공동체는 거주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휴대폰 전화번호부 속에 있다. 전화로 연결되고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안에 오히려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진실한 공동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한국인들에게 들이대어지는 전여옥의 출세주의야 말로 맹랑한 것이다. 어렵게 돈 모아서 장만한 신형자동차로 명절날 고향을 찾아가서 누구에게 자랑할 것인가? 여전히 한국인들에게는 형제가 중요하고 친척이 중요하며 그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이 삶의 목적이요 보람인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전여옥의 망언에 분노하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비록 자신은 좋은 대학을 나왔지만 고향에 있는 동생들과 사촌들을 잊지 않고 있는 그 마음을 전여옥은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알아야 한다. 한국인들이 보수적 성향을 가진다는 조중동의 평은 오판일 수밖에 없다. 80년대를 관통하여 온 한국인들에게 가장 큰 사건은 고향의 상실이며 향촌 공동체의 해체이다. 그 아픔, 그 상처는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들은 고향을 그리워한다. 잃어버린 공동체를 복원하고자 하는 갈망을 가지고 있다. 아파트는 다만 몸을 의탁하는 곳일 뿐 그들의 두고 온 정은 휴대폰으로 연결되는 네트워크 안에 있다. 그들은 돈을 벌어서 강남으로 진출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서 고향의 형제와 사촌들에게 인심을 쓰겠다는 작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들에게 그러한 열정이 남아있는 한 당분간 한국에서는 중도진보 성향의 정당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 이 원리를 알아야 한다. 고향을 해체시켜, 자신의 성공을 인정받을 수 있는, 또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공동체를 갈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엄청난 사건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 흐름이 적어도 백년은 가는 흐름이다.
정체성은 자기 스스로 규정하는 것이다. 따져보기로 하면 노무현 역시 엘리트다. 권영길은 노동자가 아니지만 민노당은 노동자정당을 표방하고 있듯이 노무현은 서민이 아니지만 서민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왜인가? 인간 노무현이 자신의 기억 속에서 두고 온 고향을 지워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여옥이 말끔히 지워버린 그 기억을 노무현은 여전히 지우지 않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의 서민적 정체성은 노무현이 스스로 자기규정한 것이다.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좌파들이 말하는 계급개념과는 다른 것이다. 노무현에게는 대통령으로서 성공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공모델을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기득권과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겠지만 좋은 성공모델을 만들기 위해서는 타협이 불가능하다. 그것이 성공한 제왕 세종임금이 아닌 세종을 키운 태종임금이 되겠다는 노무현의 다짐과 같다.
아웃사이더 정치인 전여옥
이 나라 전체로 보면 전여옥도 이른바 이회창류의 메인 스트림에 속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분야로 범위를 좁혀놓고 본다면 전여옥은 비주류다. 그는 이렇다 할 민주화 운동 경력이 없다.
전여옥은 남들 다 가는 감방에도 한번 못 가본 사람이다. 그리고 이 나라 정치는 당분간 민주화운동 세대가 지배하게 되어 있다. 이 흐름이 못해도 백년은 간다.
그가 두려워하는 이유는 여전히 자신이 겉돌고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배역이라고는 늘 악역 뿐이다. 뺑덕어멈의 역할이거나 팥쥐 역할 아니면 신데렐라의 두 언니 정도가 고작이다. 뺑덕어멈 전여옥이 신데렐라 노무현을 질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