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닫는다는 것은 보는 안목이 넓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 사람들은 눈으로 뻔히 보고도 원근법을 발견하지 못했다. 원근법은 특별한 것이 아니다. 걍 눈에 보이는 그대로다. 그런데 그것을 포착하기가 쉽지 않다.
사람들은 보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부분으로 해체하여 별도로 인식한다. 인간의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극복하고 통일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에게 사람을 그리게 하면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손가락은 다섯이므로 어떻게든 다섯 개를 각각 나타내려고 한다.
조선시대의 그림평에는 산수화를 그리라고 했더니 지도를 그려놓은 것이 아니냐는 식의 비평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초등학생에게 사람을 그리라면 인체해부도를 그리려고 한다.
손과 발, 눈과 코와 귀와 목을 각 부분으로 나누어 인식한 후 이를 도화지 위에서 재결합 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인식의 조각들을 메모리로 불러와서 이를 재결합하는 방법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사물을 통일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전체적인 통일성은 밸런스의 규명에 의해 파악된다. 하나의 밸런스가 성립하는 ‘계’가 하나의 패턴이다.
안목을 넓히려면 순간적으로 밸런스의 계가 성립하는 패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직관력이다.
문제있는 한국의 TV드라마
나는 한류의 본질을 유교주의 가치관의 승리로 보기 때문에 전혀 걱정하지 않지만 천편일률적인 한국의 TV드라마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여전히 권선징악의 2항대립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과 악이 대결하고 있으며 선이 승리하고 악이 패배한다는 식이다. 성춘향과 변학도가 대결하여 성춘향이 승리한 이후 달라진 것이 없다. 그것이 늘 그 나물에 그 밥인 한국드라마의 정형화된 패턴이다.
일본 드라마는 그래도 제법 수준이 높다. 일본 드라마의 특징은 모든 등장인물이 깨달아야지만 드라마가 끝이 난다는 점이다. 주인공도 깨닫고 악역도 깨닫는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번안하여 김희선이 주연했던 ‘요조숙녀’의 경우를 참고하기로 하자. 원본 ‘야마토 나데시코’와 달리 한국에서는 악당이 등장하는 걸로 되어 있지만 일본의 원본에는 이렇다 할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야마토 나데시코’에서는 돈만 밝히는 허영심 많은 스튜어디스 ‘진노 사쿠라코(김희선)’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어 자아를 회복하고 진실한 남자 ‘나카하라 오스케(고수)’와 결합되는 것으로 종결된다.
생선가게 주인으로 전락했던 수학천재 ‘나카하라 오스케’도 문득 깨달아서 35살의 나이에 유학을 떠나 수학자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된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형성했던 부자 ‘히가시 쥬죠(문동규)’도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얻어서 두 사람의 결합을 축하해 준다.
모두가 행복해진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는 악당은 눈 씻고 봐도 없다. 우리가 헐리우드 영화를 수준이 낮다고 비판하여 말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헐리우드 영화도 한국 드라마처럼 악당은 뒈지게 얻어 맞고 두방 더 맞는 걸로 끝이 난다.
수준 좀 높이자는 말이다. 그게 뭐 그렇게 어렵냐 말이다. 아무리 타고난 악당이라지만 전여옥이 네티즌들에게 얻어맞듯, 악역이 주인공에게 줘터지는 꼴을 지켜보는 관객의 심사도 그렇게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이항대립구도를 극복하라
초등학생의 일기에는 항상 일정한 패턴이 있다. 자신이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고 반성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선과 악의 도식화된 패턴을 가진 것이다. 이는 어린이가 스스로 터득한 일기의 공식이다.
예컨대.. ‘오늘은 장난을 치다가 베란다의 화분을 깨뜨려서 아빠에게 혼이 났습니다. 다음부터는 장난을 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방학동안 미뤄둔 일기를 개학날 한꺼번에 쓰려면 무려 40개의 화분이나 유리창을 깨뜨려야 한다.
여기에 이항대립구도의 패턴이 숨어 있다. 그 선과 악의 이항대립 구도를 극복해야 한다. 일기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그리고 모든 사건은 무언가 나쁜 일을 저지르는 식으로 일어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렇듯 정형화된 패턴을 따르게 되면 결정적으로 일기에 쓸거리가 없어진다. 소재주의에 빠진 결과로 마침내 소재가 바닥나는 것이다.
일기쓰기에 성공하려면 미학을 알아야 한다. 미학이란? 밸런스의 계 안에서 내적인 완결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불완전한 것이며 완전을 지향한다. 밸런스는 무너져 있으나 스스로 이를 바로잡으려 한다.
강아지는 집을 잘 지키는 완전한 강아지가 되고자 한다. 고양이는 쥐를 잘 잡는 훌륭한 고양이가 되려고 한다. 화분의 꽃은 꽃을 이쁘게 피우는 완벽한 꽃이 되고자 한다. 자기 정체성의 회복으로 가능하다. 그것이 미학이다.
이 점을 잘 파악하면.. 모든 사물의 존재가 곧 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주위의 모든 사물은 약간씩 밸런스가 무너진 채로 불완전하게 존재하며 인간이 개입함에 따라 점차 완전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파악할 때 문득 일기에 쓸거리가 열배로 늘어나는 것이 곧 새로운 지평의 열어제침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인간들이여 수준을 높이자
한국의 드라마가 인기인 이유? 헐리우드 영화가 먹히고 있는 이유? 강한 선악의 대립구도가 매우 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대신 이야기가 천편일률적으로 되는 단점이 있다.
등장인물이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사건 속에서 부대끼면서 보다 자기다운 자기자신으로 변해가는 인간성숙의 과정을 묘사한다면 한국의 드라마는 첫째, 소재가 크게 넓어질 것이며 둘째, 천편일률적인 구도를 극복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로 드라마의 수준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위험이 있다. 일본 드라마가 확실히 수준은 높지만 대신 재미가 없다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같은 내용인데 한국의 요조숙녀가 일본의 야마토 나데시코 보다 더 재미있다. 물론 드라마의 주 시청층 기준으로.. 야마토 나데시코가 더 재미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를 조금은 아는 사람이다.)
모든 등장인물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패턴을 가진 일본 드라마의 본질은 일본 특유의 선종불교 사상이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반면 한국 드라마의 2분법적 구도에는 유교주의의 정사(正邪)론이,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의 2분법적 구도에는 기독교 사상에서 하느님과 사탄의 대결구도가 바닥에 깔려있다.
무엇인가? 한국드라마의 정형화된 패턴과 일본드라마의 정형화된 패턴이 있다. 드라마적인 재미는 착한 설까치가 나쁜 마동탁을 혼내준다는 한국드라마가 더 있고 수준은 악당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슬램덩크가 더 높다.
무엇인가?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 유교주의의 정수는 중용(中庸)에 있다. 중용의 용은 평상(平常)을 뜻한다. 이는 널리 변화를 포용하면서 주류의 큰 흐름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곧 중도(中道)의 핵심이 좌단과 우단의 양극을 아우르며 포월하고 가는 것이 진정한 유교의 중용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과 악의 대결, 곧 2분법적 구도의 한계라는 폐단을 가진 한국드라마는 선종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일본방식을 일정부분 포용할 수 있지만 일본이 한국 드라마의 높은 긴장감과 진지함을 포용하기는 불능이라는 것이다.
비주류가 주류를 칠 수는 있어도 포용할 수는 없다. 주류를 전복하여 비주류가 주류로 되는 수는 있어도, 여전히 비주류인 채로 주류를 포용하기는 불능이다. 왜인가?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아내기란 물리적으로 불능이기 때문이다.
유교주의는 중용의 길, 곧 주류의 길을 걸어왔다. 일본드라마의 저변에 깔린 불교 혹은 도교사상, 곧 일본 드라마 특유의 시니컬한 허무주의, 냉소주의는 비주류의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진지하지가 않다. 열정이 없다.
일본의 그들은 유럽을 정통으로 놓고 자기네의 위치를 주변의 비주류로 설정한다. 유럽을 본받으려 하고, 유럽을 배우려 하고, 유럽에 구색을 맞춰주려 할뿐 치려고 하지 않는다. 주류의 전복을 포기한 아웃사이더들, 그들은 영원한 마이너리거로 남을 것이다.
전여옥, 박근혜의 한계
전여옥과 박근혜 콤비 그리고 김흥국과 정몽준 콤비.. 비슷하지 않은가? 패턴이 닮아있다는 말이다. 가벼움은 결코 무거움을 이기지 못한다.
신문에 비유하자. 대부분의 독자들은 신문의 정치면을 잘 보지 않는다. 그들은 만화부터 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만화만 모아놓은 데일리줌이 포커스와 메트로를 이길 것인가? 천만에!
우리가 아침에 출근하여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신문을 펼쳐든다? 왜 긴장하기 위해서다. 한잔의 커피를 마신다. 왜? 몸의 세포들을 깨워서 긴장하기 위해서다. 좋은 아침! 하고 인사를 한다. 왜? 인사도 사람을 긴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긴장감에는 쾌감이 있고 중독성이 있다. 인간을 강하게 단련시킨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자가 결국 승리하는 법, 독자들은 정치기사 보다 만화를 더 좋아하지만 만화만 있으면 보지 않는다. 왜? 만화나 읽어서는 긴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문의 정치면은 제목만으로도 독자들을 긴장시킨다. 그 가치는 매우 크다.
왜 한류가 그 수준낮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가? 유교주의의 가장 큰 가치는 사람을 늘 깨어있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선종불교는, 또 도교사상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며 시큰둥 하다. 사람을 잠들게 한다.
무엇인가? 한나라당 디지털팀은 인터넷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딴지일보의 성공비결이 ‘디벼주마 시리즈’로 특징되는 심층분석의 파헤치기가 아니라 패러디의 가벼움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종이신문은 무겁고 인터넷은 가벼우며 요즘의 대세는 가벼움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착각하므로 패배한다. 천만의 말씀! 서프의 칼럼이 조선일보 구라칼럼보다 더 길이가 길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그 긴 글을 강한 인내심으로 읽어준다는 사실.. 인터넷이 더 무겁다는 사실 알아야 할 것이다.
유교주의는 무겁다. 무거운 자가 가벼운 자를 이긴다. 깨어있는 자가 시큰둥한 자를 이긴다. 열정적인 자가 승리하고 진지한 자가 승리한다. 까부는 자는 패배한다. 냉소하는 자도 패배한다.
김흥국과 정몽준의 시대는 갔다
태양이 빛나면 먼지도 빛나게 된다는 격일까. 노무현 태양이 전여옥 먼지를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모양이다. 노무현 정권의 탈권위주의로 하여 가장 많은 정치적 이득을 본 사람은 전여옥이다.
그들은 노무현의 탈권위주의와 전여옥의 대책없는 싸가지가 본질에서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터. 천만의 말씀!
가벼운(?) 노무현에는 싸가지 전여옥으로 맞서는 것이 제격이라고 믿고 싶은 자들이 한나라당이다. 그러나 착각이다. 노무현 원심분리기는 언제나 가벼운 것들을, 가벼워서 입만 동동 뜨는 새들을 골라내는데 성공하곤 했다.
민새가 떴고 몽새가 떴고 추새가 떴고 검새가 떴다. 덩달아 박새 또한 뜨고 있지만 박새의 전성시대는 길지 않을 터.
알아야 한다. 인터넷은 결코 가볍지 않다. 독립신문의 저급한 패러디나 알바의 욕설이 인터넷의 본질은 아니다. 한나라당은 인터넷을 오해하고 있다.
깨달아야 한다. 지구 상의 모든 것들을 질서지우는 것은 중력이다. 그들은 인터넷의 중력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인터텟이라는 독립계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중력인가? 정보의 질과 속도의 함수관계를 다 알려주면 재미없지.
사람들은 보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각 부분으로 해체하여 별도로 인식한다. 인간의 뇌가 그렇게 설계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를 극복하고 통일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들에게 사람을 그리게 하면 보이는 그대로 그리지 않는다. 손가락은 다섯이므로 어떻게든 다섯 개를 각각 나타내려고 한다.
조선시대의 그림평에는 산수화를 그리라고 했더니 지도를 그려놓은 것이 아니냐는 식의 비평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초등학생에게 사람을 그리라면 인체해부도를 그리려고 한다.
손과 발, 눈과 코와 귀와 목을 각 부분으로 나누어 인식한 후 이를 도화지 위에서 재결합 하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 속에 저장되어 있는 인식의 조각들을 메모리로 불러와서 이를 재결합하는 방법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사물을 통일적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전체적인 통일성은 밸런스의 규명에 의해 파악된다. 하나의 밸런스가 성립하는 ‘계’가 하나의 패턴이다.
안목을 넓히려면 순간적으로 밸런스의 계가 성립하는 패턴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직관력이다.
문제있는 한국의 TV드라마
나는 한류의 본질을 유교주의 가치관의 승리로 보기 때문에 전혀 걱정하지 않지만 천편일률적인 한국의 TV드라마는 확실히 문제가 있다. 여전히 권선징악의 2항대립구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선과 악이 대결하고 있으며 선이 승리하고 악이 패배한다는 식이다. 성춘향과 변학도가 대결하여 성춘향이 승리한 이후 달라진 것이 없다. 그것이 늘 그 나물에 그 밥인 한국드라마의 정형화된 패턴이다.
일본 드라마는 그래도 제법 수준이 높다. 일본 드라마의 특징은 모든 등장인물이 깨달아야지만 드라마가 끝이 난다는 점이다. 주인공도 깨닫고 악역도 깨닫는다. 여기서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 정체성을 깨닫는다는 말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번안하여 김희선이 주연했던 ‘요조숙녀’의 경우를 참고하기로 하자. 원본 ‘야마토 나데시코’와 달리 한국에서는 악당이 등장하는 걸로 되어 있지만 일본의 원본에는 이렇다 할 악역이 등장하지 않는다.
‘야마토 나데시코’에서는 돈만 밝히는 허영심 많은 스튜어디스 ‘진노 사쿠라코(김희선)’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어 자아를 회복하고 진실한 남자 ‘나카하라 오스케(고수)’와 결합되는 것으로 종결된다.
생선가게 주인으로 전락했던 수학천재 ‘나카하라 오스케’도 문득 깨달아서 35살의 나이에 유학을 떠나 수학자의 신분으로 돌아가게 된다. 심지어 그들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형성했던 부자 ‘히가시 쥬죠(문동규)’도 의미심장한 깨달음을 얻어서 두 사람의 결합을 축하해 준다.
모두가 행복해진다. 비참한 종말을 맞이하는 악당은 눈 씻고 봐도 없다. 우리가 헐리우드 영화를 수준이 낮다고 비판하여 말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헐리우드 영화도 한국 드라마처럼 악당은 뒈지게 얻어 맞고 두방 더 맞는 걸로 끝이 난다.
수준 좀 높이자는 말이다. 그게 뭐 그렇게 어렵냐 말이다. 아무리 타고난 악당이라지만 전여옥이 네티즌들에게 얻어맞듯, 악역이 주인공에게 줘터지는 꼴을 지켜보는 관객의 심사도 그렇게 편치만은 않을 것이다.
이항대립구도를 극복하라
초등학생의 일기에는 항상 일정한 패턴이 있다. 자신이 뭔가 잘못을 저질러서 선생님께 꾸지람을 듣고 반성하는 구조로 되어있다. 선과 악의 도식화된 패턴을 가진 것이다. 이는 어린이가 스스로 터득한 일기의 공식이다.
예컨대.. ‘오늘은 장난을 치다가 베란다의 화분을 깨뜨려서 아빠에게 혼이 났습니다. 다음부터는 장난을 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방학동안 미뤄둔 일기를 개학날 한꺼번에 쓰려면 무려 40개의 화분이나 유리창을 깨뜨려야 한다.
여기에 이항대립구도의 패턴이 숨어 있다. 그 선과 악의 이항대립 구도를 극복해야 한다. 일기는 사건을 기록하는 것이라는 고정관념, 그리고 모든 사건은 무언가 나쁜 일을 저지르는 식으로 일어난다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문제인가? 이렇듯 정형화된 패턴을 따르게 되면 결정적으로 일기에 쓸거리가 없어진다. 소재주의에 빠진 결과로 마침내 소재가 바닥나는 것이다.
일기쓰기에 성공하려면 미학을 알아야 한다. 미학이란? 밸런스의 계 안에서 내적인 완결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불완전한 것이며 완전을 지향한다. 밸런스는 무너져 있으나 스스로 이를 바로잡으려 한다.
강아지는 집을 잘 지키는 완전한 강아지가 되고자 한다. 고양이는 쥐를 잘 잡는 훌륭한 고양이가 되려고 한다. 화분의 꽃은 꽃을 이쁘게 피우는 완벽한 꽃이 되고자 한다. 자기 정체성의 회복으로 가능하다. 그것이 미학이다.
이 점을 잘 파악하면.. 모든 사물의 존재가 곧 일기의 소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주위의 모든 사물은 약간씩 밸런스가 무너진 채로 불완전하게 존재하며 인간이 개입함에 따라 점차 완전에 가까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파악할 때 문득 일기에 쓸거리가 열배로 늘어나는 것이 곧 새로운 지평의 열어제침이다. 그것이 깨달음이다.
인간들이여 수준을 높이자
한국의 드라마가 인기인 이유? 헐리우드 영화가 먹히고 있는 이유? 강한 선악의 대립구도가 매우 큰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대신 이야기가 천편일률적으로 되는 단점이 있다.
등장인물이 자아를 발견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 사건 속에서 부대끼면서 보다 자기다운 자기자신으로 변해가는 인간성숙의 과정을 묘사한다면 한국의 드라마는 첫째, 소재가 크게 넓어질 것이며 둘째, 천편일률적인 구도를 극복하게 될 것이며 그 결과로 드라마의 수준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위험이 있다. 일본 드라마가 확실히 수준은 높지만 대신 재미가 없다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같은 내용인데 한국의 요조숙녀가 일본의 야마토 나데시코 보다 더 재미있다. 물론 드라마의 주 시청층 기준으로.. 야마토 나데시코가 더 재미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뭔가를 조금은 아는 사람이다.)
모든 등장인물이 자기 정체성을 찾아간다는 패턴을 가진 일본 드라마의 본질은 일본 특유의 선종불교 사상이 그 배경으로 자리하고 있다. 반면 한국 드라마의 2분법적 구도에는 유교주의의 정사(正邪)론이, 그리고 헐리우드 영화의 2분법적 구도에는 기독교 사상에서 하느님과 사탄의 대결구도가 바닥에 깔려있다.
무엇인가? 한국드라마의 정형화된 패턴과 일본드라마의 정형화된 패턴이 있다. 드라마적인 재미는 착한 설까치가 나쁜 마동탁을 혼내준다는 한국드라마가 더 있고 수준은 악당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슬램덩크가 더 높다.
무엇인가? 주류와 비주류가 있다. 유교주의의 정수는 중용(中庸)에 있다. 중용의 용은 평상(平常)을 뜻한다. 이는 널리 변화를 포용하면서 주류의 큰 흐름을 따라간다는 뜻이다. 곧 중도(中道)의 핵심이 좌단과 우단의 양극을 아우르며 포월하고 가는 것이 진정한 유교의 중용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선과 악의 대결, 곧 2분법적 구도의 한계라는 폐단을 가진 한국드라마는 선종불교사상을 배경으로 하는 일본방식을 일정부분 포용할 수 있지만 일본이 한국 드라마의 높은 긴장감과 진지함을 포용하기는 불능이라는 것이다.
비주류가 주류를 칠 수는 있어도 포용할 수는 없다. 주류를 전복하여 비주류가 주류로 되는 수는 있어도, 여전히 비주류인 채로 주류를 포용하기는 불능이다. 왜인가?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아내기란 물리적으로 불능이기 때문이다.
유교주의는 중용의 길, 곧 주류의 길을 걸어왔다. 일본드라마의 저변에 깔린 불교 혹은 도교사상, 곧 일본 드라마 특유의 시니컬한 허무주의, 냉소주의는 비주류의 것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진지하지가 않다. 열정이 없다.
일본의 그들은 유럽을 정통으로 놓고 자기네의 위치를 주변의 비주류로 설정한다. 유럽을 본받으려 하고, 유럽을 배우려 하고, 유럽에 구색을 맞춰주려 할뿐 치려고 하지 않는다. 주류의 전복을 포기한 아웃사이더들, 그들은 영원한 마이너리거로 남을 것이다.
전여옥, 박근혜의 한계
전여옥과 박근혜 콤비 그리고 김흥국과 정몽준 콤비.. 비슷하지 않은가? 패턴이 닮아있다는 말이다. 가벼움은 결코 무거움을 이기지 못한다.
신문에 비유하자. 대부분의 독자들은 신문의 정치면을 잘 보지 않는다. 그들은 만화부터 보려고 한다. 그렇다면? 만화만 모아놓은 데일리줌이 포커스와 메트로를 이길 것인가? 천만에!
우리가 아침에 출근하여 제일 먼저 하는 것은? 신문을 펼쳐든다? 왜 긴장하기 위해서다. 한잔의 커피를 마신다. 왜? 몸의 세포들을 깨워서 긴장하기 위해서다. 좋은 아침! 하고 인사를 한다. 왜? 인사도 사람을 긴장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긴장감에는 쾌감이 있고 중독성이 있다. 인간을 강하게 단련시킨다.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자가 결국 승리하는 법, 독자들은 정치기사 보다 만화를 더 좋아하지만 만화만 있으면 보지 않는다. 왜? 만화나 읽어서는 긴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신문의 정치면은 제목만으로도 독자들을 긴장시킨다. 그 가치는 매우 크다.
왜 한류가 그 수준낮음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는가? 유교주의의 가장 큰 가치는 사람을 늘 깨어있게 하는 것이다. 일본의 선종불교는, 또 도교사상은..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하며 시큰둥 하다. 사람을 잠들게 한다.
무엇인가? 한나라당 디지털팀은 인터넷을 크게 오해하고 있다. 그들은 딴지일보의 성공비결이 ‘디벼주마 시리즈’로 특징되는 심층분석의 파헤치기가 아니라 패러디의 가벼움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종이신문은 무겁고 인터넷은 가벼우며 요즘의 대세는 가벼움이라고 믿는다. 그렇게 착각하므로 패배한다. 천만의 말씀! 서프의 칼럼이 조선일보 구라칼럼보다 더 길이가 길다는 사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는 그 긴 글을 강한 인내심으로 읽어준다는 사실.. 인터넷이 더 무겁다는 사실 알아야 할 것이다.
유교주의는 무겁다. 무거운 자가 가벼운 자를 이긴다. 깨어있는 자가 시큰둥한 자를 이긴다. 열정적인 자가 승리하고 진지한 자가 승리한다. 까부는 자는 패배한다. 냉소하는 자도 패배한다.
김흥국과 정몽준의 시대는 갔다
태양이 빛나면 먼지도 빛나게 된다는 격일까. 노무현 태양이 전여옥 먼지를 도드라져 보이게 하는 모양이다. 노무현 정권의 탈권위주의로 하여 가장 많은 정치적 이득을 본 사람은 전여옥이다.
그들은 노무현의 탈권위주의와 전여옥의 대책없는 싸가지가 본질에서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싶을 터. 천만의 말씀!
가벼운(?) 노무현에는 싸가지 전여옥으로 맞서는 것이 제격이라고 믿고 싶은 자들이 한나라당이다. 그러나 착각이다. 노무현 원심분리기는 언제나 가벼운 것들을, 가벼워서 입만 동동 뜨는 새들을 골라내는데 성공하곤 했다.
민새가 떴고 몽새가 떴고 추새가 떴고 검새가 떴다. 덩달아 박새 또한 뜨고 있지만 박새의 전성시대는 길지 않을 터.
알아야 한다. 인터넷은 결코 가볍지 않다. 독립신문의 저급한 패러디나 알바의 욕설이 인터넷의 본질은 아니다. 한나라당은 인터넷을 오해하고 있다.
깨달아야 한다. 지구 상의 모든 것들을 질서지우는 것은 중력이다. 그들은 인터넷의 중력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무엇이 인터텟이라는 독립계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중력인가? 정보의 질과 속도의 함수관계를 다 알려주면 재미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