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read 15590 vote 0 2005.06.03 (13:23:09)

우문(愚問) 중에 우문이겠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이라면 필시 책을 안읽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필자의 책을 읽지 않은 분이, 남의 책을 추천해 달라는 요구를 하는 것이라면 더욱 난감할 밖에.)

책은 중독성이 있다. 중독되는 것이다. 일단 중독이 되면 이책 저책을 가릴 수 없다. 그냥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나 중독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가망없다.

나는 책읽기를 권하지 않는다. 책 속에 길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책 속에 있는 길이라면, 그 길은 이미 다른 사람이 선점한 낡은 길일 확률이 높다.

필요한 것은 이면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다. 그것은 패턴을 읽는 능력이다. 그것은 사물의 밸런스를 파악하는 능력이다. 직관력은 여기서 얻어진다.

민감함이 있어야 한다. 둔감한 사람은 가망이 없다. 사물의 밸런스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언밸런스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지극히 예민한 사람이어야 한다.

언밸런스의 극치라 할 이발소 그림을 보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몸에 기계적인 반응이 와야 진짜다.(그러나 한편으로 이발소 그림에 독특한 매력이 있는 것도 사실.)

그러한 민감함의 바탕 위에 사물의 이면을 꿰뚫어보는 자기만의 논리 혹은 관점 혹은 시야를 가져야 한다. 이런 것은 어려서부터 진작에 성립하는 것이다.

주입식 교육에 중독된 사람이 뒤늦게 자기만의 논리를 구한다든가 혹은 사물의 이면을 꿰뚤어보는 시야를 원한다든가 혹은 패턴을 읽는 능력, 밸런스를 파악하는 능력, 곧 직관력과 예지력을 획득하기란 이미 늦은 것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창의적인 교육과정이다. 주입식 교육으로는 절대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간과 공간의 낭비를 줄이는 기술이다.

예컨대 바둑이라면 밸런스와 밸런스의 대결로 점철되어 있다. 보통 사람에게는 361개의 점이 보이겠지만, 밸런스를 읽어내는 사람에게는 단 하나의 전체적인 균형과 불균형이 보일 뿐이다.

밸런스를 읽지 못한다면 CPU부하가 열배로 늘어날 뿐이다. 고수가 계의 전체적인 밸런스를 결정하는 하나의 지점을 바라볼 때 하수는 361개의 지점을 일일이 검토하고 그들 상호간의 우선순위를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정보를 획득하는데 필요한 시간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필요한 정보를 물처럼 빨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만권의 책을 읽어도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가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이라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책을 읽고 정보를 얻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정보에 대한 갈증이 일어난 상태에서 그 갈증을 달래줄 수 있는 정보를 책에서 발췌하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막에서, 혹은 정글에서 보물을 찾는 것과 같다. 99.99프로의 쓰레기 속에서 1프로의 가치있는 것을 찾아내려면 처음부터 그 1프로에 대한 소구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 1프로의 소구가 갖추어 있어야 나머지 아닌 것들 99.99에서 미련없이 떠날 수 있다. 그러한 미련없는 떠남이야 말로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방법이다.

그것은 패턴의 씨앗들이다. 어떤 영화이든 스타일이 있고 어떤 코미디든 기법이 있고 어떤 글이든 문체가 있다. 그 글의, 그 소설의, 그 영화의, 그 음악의 긴장감을 90분 동안 유지하는 본질이 숨어 있다.

예컨대 영화라면 초반에 어떤 사건을 들이대어 극적인 긴장을 유발한 다음, 막판에 동일한 패턴의 사건을 한번 더 재현하여 복습하고 그 중간의 남는 시간을 멜로나 코미디로 채워넣는 수법을 쓴다.

다른 모든 분야라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일정한 시간 이상 긴장을 이어가는 것이며 거기에는 호흡이 있고 반복이 있고 재현이 있다.

그것은 최초에 심을 얻고, 다음 거기서 기둥줄기와 가지를 쳐 나가는 것이며 거기에 차차로 잎과 꽃과 열매를 더하는 것이다. 애초에 하나의 심이 확보되지 않았다면, 천성의 예민함을 갖추지 않았다면, 줄기와 가지를 획득하지 못할 것이며

가지없는 나무에 잎과 열매를 더할 수 없는 일이다.

먼저 컨셉을 잡아야 한다. 그것이 ‘심’이 된다. 패턴을 읽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거기에 논리를 부여해야 한다. 밸런스를 파악하는 훈련으로 가능하다. 시야와 관점을 획득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체계를 세우는 방법으로 거기에 살을 덧붙이는 것이다.

사유의 깊이가 담보되지 않은 즉, 주입식 교육에 중독된 사람은 패턴을 읽을 수 없는 즉 사물들 사이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없고, 밸런스를 읽을 수 없는 즉 가중치를 판단하지 못하므로.. 효율성이 저하되어 시간을 낭비하게 될 뿐이다.

그렇게 얻은 지식은 하드의 공간을 낭비할 뿐, 메모리(램)에 필요한 정보를 가져오지 못하고, CPU 부하만 잡아먹어서 창의적인 방향으로 활용되지 않을 것이다.

하드디스크는 창고와 같고, 메모리는 생산라인과 같고, CPU는 생산자와 같다. 요는 생산라인을 어떻게 합리적으로 구축할 것인가이다. 생산자 위주로 재정렬한 즉 인체공학적인 설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하드디스크에 채워넣기나 하겠다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무엇보다 생산자가 중요한 것이며 패턴을 읽는 능력, 밸런스를 파악하는 능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생산자 위주의 인체공학적인 설계로 '정보의 생산라인'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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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두 사람 이상의 별개의 질문에 대한 복합적인 답변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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