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프로바둑 기사에게 지도대국을 청한다고 치자. 대국 후에 기사는 간단한 평을 던지는 것으로 지도해 준다.
대국을 마친 후 프로기사가 바둑돌을 한웅큼 집어들어 눈깜짝 할 사이에 몇 십여 수를 복기를 해놓고는 두어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여기가 맛이 좋지 않았지요.”
선문답 같은 두어 마디를 던져준다면 어떨까? 기원 1급의 아마추어 아저씨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리는 만무다. 더구나 그 프로기사가 말 없기로 소문난 돌부처 이창호라면 더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배우는 것이라곤 ‘아하! 프로기사는 이런 용어를 쓰는구나’ 하는 정도이다. 그럴 때 프로의 가르침은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하는 말씀과 다르지 않을 터.
그래도 그 아마추어 아저씨가 그 산과 그 물을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 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나마 소득은 될 터.
고수의 경지라면 다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바둑이라도 이창호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풍경화처럼 시원스레 펼쳐지는 것이다. 그 ‘그림’을 잡아챌 수 있어야 한다.
바둑은 밸런스의 게임이다. 흑과 백의 밸런스가 있다. 중앙과 변의 밸런스가 있다. 공격과 방어의 밸런스가 있다. 바둑은 밸런스들의 대결구도로 점철되어 있다.
밸런스와 밸런스가 만나서 50 대 50으로 팽팽해질 때 때로는 나무를 이루고 때로는 숲을 이룬다. 그 긴장된 대치에 수순의 변화가 더해질 때 마다 우당탕 퉁탕 흘러가는 급류를 이루는가 하면 도도히 흐르는 대하를 이루기도 한다.
고수라면 그 안에서 산과 물을 잡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 산과 물을 아우르는 하나의 달이 떠올라야 한다. 하수의 눈에는 361개의 점이 보이지만 고수의 눈에는 다만 하나의 달이 은은히 그 산하를 비추일 뿐이다.
장면 둘
뛰어난 연주자는 연주시의 어느 순간이 현실의 어떤 상황에 들어맞는 것인지 즉각적으로 이입하여 내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피아노 소나타라면 남성적 주제가 앞서 나가고 여성적 주제가 뒤따라 어우러지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 가는 모습이.. 마치 젊은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희롱하는 것과 같아서.. 연주자는 그 순간 자신이 경험한 현실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현실에서의 고조된 흥분과 감흥을 그대로 연주로 표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시각화’ 할 수 있느냐다. 바둑이 흑돌과 백돌의 사랑이라면.. 연주가 활과 현의 긴장된 대결이라면.. 젊은 연인들의 고조된 감정이 밀고 당기며 어우러지는.. 그 복잡다기한 여러 층위의 대립구도를 하나의 담백한 시각적 이미지로 담아낼 수 있느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 밸런스와 밸런스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긴장감의 흐름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일정한 경지에 오른 고수, 명인 혹은 달인이라고 부른다. 프로들은 그렇게 한다.
이상은 심혈을 기울여 잡아낸 하나의 극적인 이미지
글을 쓴다면.. 먼저 하나의 극적인 이미지를 잡아내고, 그 이미지가 주는 긴장감을 살려가며 그 호흡 끊이지 않게 강약을 조절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분해하여 놓고.. 그것을 부단히 해체하고 또 재결합 하면서.. 거기에 조금씩 살을 붙여가는 방법으로 그 느낌을 글로 재현해 내는 과정이 된다.
그 아른아른한 이미지가.. 뚜렷한 그림으로 떠오를 때 까지.. 선명한 모습을 나타내일 때 까지 생각하고 또 그것을 풀어낸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긴장의 끈을 살금살금 이어가는 것이다.
조금만 거칠게 다루면 그 이미지의 끈은 툭 끊어지고 만다. 긴장은 흩어지고 만다. 밸런스는 무너지고 만다. 그 아쉽고 간절한 느낌이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뿌듯한 충일감으로 차오를 때 까지 나는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도 마지막 한 줄을 보태어야만 한다.
이상은 보석의 결을 찾아가기
비전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염두(念頭)에 살짜기 떠오른 마음 속의 그림이다. 그 그림을 놓쳐서 안 된다.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데서 오는 긴장감과의 대결이다.
이상(理想)이 있어야 한다. 이상은 시각적으로 형상화 된 하나의 ‘그림’일 수 있다. 그 그림은 ‘정상에서 본 풍경’을 가리킨다. 완전한 곳의 모습을 나타내인다.
이상을 잃었을 때 인간은 그만 생동감을 잃고 만다. 그 존재는 광채를 잃고 희미하게 빛이 바래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理)에는 ‘옥을 갈다’는 뜻이 있다. 옛 사람이 보석의 원석을 가공할 때 돌의 결을 따라 원석을 쪼개었던가 보다. 나무에 나이테를 따라 결이 있듯이 돌에도 석수장이만이 알 수 있는 결이 있다는 거다.
법(法)은 물(水)이 가는(去) 길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그것이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이치(理致)는 무엇일까? 이치는 다스림의 법(法)이다. 다스림은 무엇을 따라 가는가? 결을 따라 간다. 보석의 결을 따라 원석을 가공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진리(眞理)다. 그 다스림의 결을 그르친다면 그 보석은 그만 빛을 잃고 만다.
나무에는 나무의 결이 있다. 돌에는 돌의 결이 있다. 사람에게는 숨결이 있다. 그렇다면 천하 대중의 마음에는 무슨 결이 있겠는가? 그 대중의 마음결을 따라가는 것이 이상적인 다스림이 된다.
무릇 서로 다른 둘이 만날 때는 반드시 하나의 결이 성립한다. 보석을 가공하고자 하는 세공사의 마음과 다듬어져야 할 원석의 마음이 마주칠 때 결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결을 바로 따라가고서야 보배는 얻어지는 것이다.
이상주의의 유래
결은 ‘가는 순서’다. 세공사의 칼이 원석에 임하여 나아가는 방향과 순서다.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디로 나아가는가?
문명에는 시간의 결이 있다.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은 대개 과거로부터 빌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재현은 그 나라의 전성기 때의 방법으로 나타나곤 한다.
르네상스는 고대 희랍의 것에 15세기의 옷을 입혀서 재현한 바 된다. 이상적인 모델은 과거에서 찾지만 그 옷은 언제나 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옷이어야 한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었지만, 기사도가 건재하여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의 이상주의를 담고 있다. 과거의 사람을 현재로 불쑥 데려온 거다. 언제나 그런 식이다.
세익스피어 역시 부단히 과거의 사람을 현재의 무대로 데려오곤 했다. 영국이 가장 잘나가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옷을 입혀서 말이다. 리어왕도 그렇고 맥베스도 그렇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과거의 순진하고 담백한 인물을 문득 현재로 데려와서 그 시대의 옷을 입혀서 재현하여 보이는 것이다. 그것으로 알게 되는 것은 문명의 가는 결이다.
우리의 이상주의는 무엇인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언제나 출발점을 되돌아보게 된다. 순진하고 담백하였던 우리의 원형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일찍이 원효성사가 있었고 그로부터 우리의 나아가는 결이 성립하였다. 퇴계와 율곡이 있었고 정다산과 최혜강이 있었다. 그 결이 전개하여 동학도 나오고 백범도 나오고 장준하도 나오고 노무현도 나온 것이다.
더 나아가 보아야 한다.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호령하기 이전에, 여왕 소서노가 반도를 순행하기 이전에, 단군 할아버지가 신시를 열기 이전에 우리의 본래 모습을 찾아보아야 한다.
현생인류의 조상은 먼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한다. 홍해를 건너 사막을 가로지르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와 아랄해를 우회하여 고비사막을 넘어 중국의 북부를 거쳐 그 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온 것이다.
그들은 왜 그 많은 땅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을까?
먼 신천지 찾아왔을까?
그 하나의 그림.
우리의 먼 조상이 포기하지 않고 예까지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이상인지도.
무엇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임무 전달해주기 위해.
쉬지않고 걸어서 예 까지 왔을까?
다른 모든 민족들이 혹은 아랍에서 혹은 인도에서 혹은 중국에서 주저앉을 때 그 까마득한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도무지 무엇을 탐하여 그 먼 길을 쉼없이 걸어서 예까지 이르렀을까?
우리 한국인의 원형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그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에서 우리의 이상이 찾아지는 거다.
모든 문화 예술에는 그 시대의 이상주의가 숨어 있다. 그것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시각화된 하나의 그림, 이미지다.
기독교문명이 에덴동산의 완전함에서 그 그림을 찾으려 했고 중국의 유교문명이 요순시절의 완전함에서 그 그림을 찾으려 했다면 우리에겐 별도로 우리의 신화에서 그 완전함이 찾아져야 한다.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이상은 대개 단순하고 소박한 원형의 모습, 그 완전함에서 뼈대를 빌어 발달한 현대의 옷, 과학과 문명의 옷을 빌어 입혀 장식하여 내는 방식으로 그것을 재현하여 보이는 것이다.
깨어 있는 모든 순간.. 그 하나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항상 떠올리고 있다면 당신의 프로의 방식을 아는 사람이다. 고수의 시야(視野), 달인의 경지는 적어도 그러하다.
프로바둑 기사에게 지도대국을 청한다고 치자. 대국 후에 기사는 간단한 평을 던지는 것으로 지도해 준다.
대국을 마친 후 프로기사가 바둑돌을 한웅큼 집어들어 눈깜짝 할 사이에 몇 십여 수를 복기를 해놓고는 두어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여기가 맛이 좋지 않았지요.”
선문답 같은 두어 마디를 던져준다면 어떨까? 기원 1급의 아마추어 아저씨가 그 말의 의미를 이해할 리는 만무다. 더구나 그 프로기사가 말 없기로 소문난 돌부처 이창호라면 더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배우는 것이라곤 ‘아하! 프로기사는 이런 용어를 쓰는구나’ 하는 정도이다. 그럴 때 프로의 가르침은 성철스님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로다’ 하는 말씀과 다르지 않을 터.
그래도 그 아마추어 아저씨가 그 산과 그 물을 하나의 시각적 이미지로 형상화 하는데 성공한다면 그나마 소득은 될 터.
고수의 경지라면 다르다.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된 바둑이라도 이창호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풍경화처럼 시원스레 펼쳐지는 것이다. 그 ‘그림’을 잡아챌 수 있어야 한다.
바둑은 밸런스의 게임이다. 흑과 백의 밸런스가 있다. 중앙과 변의 밸런스가 있다. 공격과 방어의 밸런스가 있다. 바둑은 밸런스들의 대결구도로 점철되어 있다.
밸런스와 밸런스가 만나서 50 대 50으로 팽팽해질 때 때로는 나무를 이루고 때로는 숲을 이룬다. 그 긴장된 대치에 수순의 변화가 더해질 때 마다 우당탕 퉁탕 흘러가는 급류를 이루는가 하면 도도히 흐르는 대하를 이루기도 한다.
고수라면 그 안에서 산과 물을 잡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 산과 물을 아우르는 하나의 달이 떠올라야 한다. 하수의 눈에는 361개의 점이 보이지만 고수의 눈에는 다만 하나의 달이 은은히 그 산하를 비추일 뿐이다.
장면 둘
뛰어난 연주자는 연주시의 어느 순간이 현실의 어떤 상황에 들어맞는 것인지 즉각적으로 이입하여 내는 능력이 있다고 한다. 피아노 소나타라면 남성적 주제가 앞서 나가고 여성적 주제가 뒤따라 어우러지면서 서로 밀고 당기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해 가는 모습이.. 마치 젊은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희롱하는 것과 같아서.. 연주자는 그 순간 자신이 경험한 현실의 장면을 떠올리면서.. 현실에서의 고조된 흥분과 감흥을 그대로 연주로 표현해 낼 수 있어야 한다.
‘시각화’ 할 수 있느냐다. 바둑이 흑돌과 백돌의 사랑이라면.. 연주가 활과 현의 긴장된 대결이라면.. 젊은 연인들의 고조된 감정이 밀고 당기며 어우러지는.. 그 복잡다기한 여러 층위의 대립구도를 하나의 담백한 시각적 이미지로 담아낼 수 있느냐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 밸런스와 밸런스가 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긴장감의 흐름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일정한 경지에 오른 고수, 명인 혹은 달인이라고 부른다. 프로들은 그렇게 한다.
이상은 심혈을 기울여 잡아낸 하나의 극적인 이미지
글을 쓴다면.. 먼저 하나의 극적인 이미지를 잡아내고, 그 이미지가 주는 긴장감을 살려가며 그 호흡 끊이지 않게 강약을 조절하면서.. 여러 각도에서 분해하여 놓고.. 그것을 부단히 해체하고 또 재결합 하면서.. 거기에 조금씩 살을 붙여가는 방법으로 그 느낌을 글로 재현해 내는 과정이 된다.
그 아른아른한 이미지가.. 뚜렷한 그림으로 떠오를 때 까지.. 선명한 모습을 나타내일 때 까지 생각하고 또 그것을 풀어낸다. 그것은 아슬아슬한 긴장의 끈을 살금살금 이어가는 것이다.
조금만 거칠게 다루면 그 이미지의 끈은 툭 끊어지고 만다. 긴장은 흩어지고 만다. 밸런스는 무너지고 만다. 그 아쉽고 간절한 느낌이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뿌듯한 충일감으로 차오를 때 까지 나는 내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라도 마지막 한 줄을 보태어야만 한다.
이상은 보석의 결을 찾아가기
비전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염두(念頭)에 살짜기 떠오른 마음 속의 그림이다. 그 그림을 놓쳐서 안 된다.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데서 오는 긴장감과의 대결이다.
이상(理想)이 있어야 한다. 이상은 시각적으로 형상화 된 하나의 ‘그림’일 수 있다. 그 그림은 ‘정상에서 본 풍경’을 가리킨다. 완전한 곳의 모습을 나타내인다.
이상을 잃었을 때 인간은 그만 생동감을 잃고 만다. 그 존재는 광채를 잃고 희미하게 빛이 바래어지고 마는 것이다.
이(理)에는 ‘옥을 갈다’는 뜻이 있다. 옛 사람이 보석의 원석을 가공할 때 돌의 결을 따라 원석을 쪼개었던가 보다. 나무에 나이테를 따라 결이 있듯이 돌에도 석수장이만이 알 수 있는 결이 있다는 거다.
법(法)은 물(水)이 가는(去) 길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그것이 결코 거스를 수 없는 자연의 법칙이다.
이치(理致)는 무엇일까? 이치는 다스림의 법(法)이다. 다스림은 무엇을 따라 가는가? 결을 따라 간다. 보석의 결을 따라 원석을 가공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진리(眞理)다. 그 다스림의 결을 그르친다면 그 보석은 그만 빛을 잃고 만다.
나무에는 나무의 결이 있다. 돌에는 돌의 결이 있다. 사람에게는 숨결이 있다. 그렇다면 천하 대중의 마음에는 무슨 결이 있겠는가? 그 대중의 마음결을 따라가는 것이 이상적인 다스림이 된다.
무릇 서로 다른 둘이 만날 때는 반드시 하나의 결이 성립한다. 보석을 가공하고자 하는 세공사의 마음과 다듬어져야 할 원석의 마음이 마주칠 때 결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 결을 바로 따라가고서야 보배는 얻어지는 것이다.
이상주의의 유래
결은 ‘가는 순서’다. 세공사의 칼이 원석에 임하여 나아가는 방향과 순서다. 어디서부터 시작하여 어디로 나아가는가?
문명에는 시간의 결이 있다. 과거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상은 대개 과거로부터 빌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재현은 그 나라의 전성기 때의 방법으로 나타나곤 한다.
르네상스는 고대 희랍의 것에 15세기의 옷을 입혀서 재현한 바 된다. 이상적인 모델은 과거에서 찾지만 그 옷은 언제나 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옷이어야 한다.
세르반테스의 돈 키호테는 우스꽝스럽게 묘사되었지만, 기사도가 건재하여 있었던 그때 그 시절의 이상주의를 담고 있다. 과거의 사람을 현재로 불쑥 데려온 거다. 언제나 그런 식이다.
세익스피어 역시 부단히 과거의 사람을 현재의 무대로 데려오곤 했다. 영국이 가장 잘나가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옷을 입혀서 말이다. 리어왕도 그렇고 맥베스도 그렇다.
인간의 원초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던 과거의 순진하고 담백한 인물을 문득 현재로 데려와서 그 시대의 옷을 입혀서 재현하여 보이는 것이다. 그것으로 알게 되는 것은 문명의 가는 결이다.
우리의 이상주의는 무엇인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언제나 출발점을 되돌아보게 된다. 순진하고 담백하였던 우리의 원형의 모습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일찍이 원효성사가 있었고 그로부터 우리의 나아가는 결이 성립하였다. 퇴계와 율곡이 있었고 정다산과 최혜강이 있었다. 그 결이 전개하여 동학도 나오고 백범도 나오고 장준하도 나오고 노무현도 나온 것이다.
더 나아가 보아야 한다. 광개토대왕이 요동을 호령하기 이전에, 여왕 소서노가 반도를 순행하기 이전에, 단군 할아버지가 신시를 열기 이전에 우리의 본래 모습을 찾아보아야 한다.
현생인류의 조상은 먼 아프리카에서 왔다고 한다. 홍해를 건너 사막을 가로지르고 파미르고원을 넘어 카스피해와 아랄해를 우회하여 고비사막을 넘어 중국의 북부를 거쳐 그 먼 길을 터벅터벅 걸어서 온 것이다.
그들은 왜 그 많은 땅 마다하고 여기까지 왔을까?
먼 신천지 찾아왔을까?
그 하나의 그림.
우리의 먼 조상이 포기하지 않고 예까지 터벅터벅 걸어오는 모습.
어쩌면 그것이 우리의 이상인지도.
무엇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어떤 임무 전달해주기 위해.
쉬지않고 걸어서 예 까지 왔을까?
다른 모든 민족들이 혹은 아랍에서 혹은 인도에서 혹은 중국에서 주저앉을 때 그 까마득한 옛날 우리의 선조들은 도무지 무엇을 탐하여 그 먼 길을 쉼없이 걸어서 예까지 이르렀을까?
우리 한국인의 원형의 모습이 거기에 있다. 그 단순하고 소박한 모습에서 우리의 이상이 찾아지는 거다.
모든 문화 예술에는 그 시대의 이상주의가 숨어 있다. 그것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시각화된 하나의 그림, 이미지다.
기독교문명이 에덴동산의 완전함에서 그 그림을 찾으려 했고 중국의 유교문명이 요순시절의 완전함에서 그 그림을 찾으려 했다면 우리에겐 별도로 우리의 신화에서 그 완전함이 찾아져야 한다.
이상주의가 있어야 한다
이상은 대개 단순하고 소박한 원형의 모습, 그 완전함에서 뼈대를 빌어 발달한 현대의 옷, 과학과 문명의 옷을 빌어 입혀 장식하여 내는 방식으로 그것을 재현하여 보이는 것이다.
깨어 있는 모든 순간.. 그 하나의 그림을 염두에 두고, 항상 떠올리고 있다면 당신의 프로의 방식을 아는 사람이다. 고수의 시야(視野), 달인의 경지는 적어도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