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학급에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얌전한 아이를 착한 아이라 부릅니다. 물론 더 나아가 선생님 심부름도 잘하고, 친구를 잘 배려하고 공부까지 잘한다면 정말(?) 착한 아이라고 부릅니다. 동학년 선생님들의 모임시간에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착하다는 뜻이 무엇일까요? 그 아이는 정말 착한 것일까요? 어른식의 표현으로 하면 인격이 훌륭하고 선한 사람일가요?
착한 아이는 없습니다. 내성적인 아이, 남에게 피해를 잘 주지 않는 아이, 현재상태로만 보았을 때 친구를 잘 돕는아이(이유가 칭찬을 받기 위해서든, 친구를 돕는 것이 좋아서든...)가 있을 뿐입니다. 초등학교 2,3학년 때만 해도 인정욕구가 강해서 심부름을 참 잘합니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 심부름을 점점 꺼립니다. 교사의 특별한 심부름은 잘하더라도 교실봉사같은, 이미 자기에게 맡겨지지 않은 일을 갑자기 하라고 하면 인상을 찌푸립니다. 이제 서서히 독립성이 증가하고, 합리적인 사고(자기가 싫어하는 그 일을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음)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학기말이 가까워질수록 이러한 현상은 더 증가합니다. 5학년땐 선배들이 은연중에 통제(멋모르고 나내다간 한대 맞거나, 싫은 소리를 들으니까)를 했기 때문에 행동이 약간 위축되었던 것이죠.
착한 아이도 없지만, 못된 아이도 없습니다. 교육 상담사례를 보면 '되먹지 못한 아이', '나쁜 아이'라는 표현도 가끔보입니다. 대충 아이가 어떤 성향인지 알 수 있게 하는 직관적인 표현일 듯 합니다. 그럼 과연 그 아이가 나쁜 아이일까요?
지나치게 방임상태에 놓인 아이, 부모님께 과도한 통제와 감정적인 화풀이를 많이 받은 아이들은 친구들에게 공격적인 아이가 되기 쉽습니다. 상대방이 싫다는데도 장난이란 핑계로 계속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합니다. 형이나 누나가 너무 잘나서 열등감을 가진 둘째나 윗형제에게 권력적으로 눌려서 장난과 신체적 억압에 시달린 동생들, 형제관계가 없는 아이들이 왕따의 주동자가 됩니다. 나쁜 것은 당해도 학습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착하다'고 칭찬하는 것 문제가 되는 본질적 이유는 아이를 '칭찬'에 얽매이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착하지 않은데 착하다고 하니 혼란에 빠집니다. 또한 '착하다'라고 평가하는 사람이 갑이요, '착하다'라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을의 입장이기 때문에 불평등한 관계에서 내려지므로 이는 부적절한 표현입니다. 인격을 규정짓는 착하다라는 표현 대신에 '선생님을 도와줘서 고마워', '친구가 욕을 했는데도, 네가 욕을 하지 않고 참아줘서 싸움이 일어나지 않았구나, 네 덕분에 선생님 마음이 편해' 이런식으로 본대로 느낀대로 i메시지 방식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칭찬의 부작용에 대해서는 '칭찬의 역습'이란 EBS다큐나 하임기너트의 교사와 학생사이, 각종 대화법 책에 자세히 나옵니다. 칭찬도 하려면 제대로 해야 합니다. 일례로 작년에 저희반에 수학 잘하는 아이가 있어서 저는 다른 아이들의 모델링을 삼을 겸, 그 아이의 장점을 살려줄 겸해서 'oo는 수학을 참잘하는구나'라는 식으로 칭찬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 아이가 시험공부에서 유독 수학에 많이 매달린 다는 것, 어려운 문제는 잘 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수학 점수에 특히 목을 맨다는 것, 다른 아이들에 비해 못푸는 문제가 있어도 교사에게 잘 질문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그 아이는 수학을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수학을 좋아하지 않는데 남들이 잘한다고 칭찬하고, 점수가 좋으니까 수학에 어쩔 수 없이 매달리는 것이었죠. 6학년 2학기 말이 다가올수록 수학 실력이 떨어지니 아이가 좌절하였습니다. 수학적 원리로 가르치려고 했지만, 학원에서 하는 문제풀이 위주식으로 학습습관이 고착화되서 교정이 어려웠습니다. 저는 그때 그 아이에게 '문제를 참 열심히 푸는구나', '어려운 문제를 끝까지 풀어내는 것을 보니, 나중에 어려운 일들도 잘 이겨낼 수 있겠어' 라는 방식으로 칭찬했어야 합니다.
착한 아이는 없으니 나쁜 아이도 없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아이에게 우리가 윽박지르거나, 분풀이식으로 감정을 토해내기, 협박, 비아냥, 부정적인 예언, 인격적인 규정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무정부적 교실상태까지 가지 않도록 담임교사가 적절한 시스템을 마련하고 통제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필요이상으로 아이를 누르고, 반대로 잘못된 칭찬으로 규정지으면 아이를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타율적인 존재,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지나치게 끌려다니는 의존적인 존재로 만들게 됩니다.
이제 다인수 학급 경험한지 일년 반 조금 넘습니다. 그런데 보입니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눌러서 얌전해진 아이는 자기 의지는 꺾이고 강제적으로 눌려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폭발합니다. 부정적인 말과 행동만 눌려진게 아니라 아이의 자율성과 잠재적 성장동력도 눌려있습니다. 반대로 교사의 감정적이고 통제적인 방식에 반항적으로 튕겨나가는 아이도 있습니다. 이 아이는 마치 '삐뚤어질테야'라고 선언하듯 교사가 이미 규정한 '나쁜 아이'임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 문제를 일으킵니다. 자기만 망가지는게 아니라 세력을 불려서 친구들도 망가뜨립니다. 그 뿐입니까? 교사의 긍정적인 영향력도 받지 못합니다. 뭐든 되받아치기 때문에 성장의 에너지를 받지 못합니다. 반항심에 복수를 하려고 교사와 반 아이들을 더 괴롭게 만들겠지요.
학급에서 벌어지는 야생버라이티한 극한 문제에 대해
교장 교감도 모든 것을 담임교사 탓으로 모른채 하고,
동학년 선생님들도 그것은 그 학급문제로 나몰라라 하고,
학부모는 학교 핑계대고,
애들은 자기 방어하고 담임 선생님 잘못으로 돌리는 상황에서
다인수 학급으로 대표되는 열악한 교육환경과 각종 잡무에 시달리는 어두운 현실에서 모든 것을 담임교사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저도 절대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순간 아이들을 대해야 하고 좋든 싫든 아이들과 1년을 생활해야 하기 때문에, 위의 문제들이 해결되어도 교사와 아이들과의 관계의 문제는 남습니다.
선생님께서 아이를 인격적으로 대하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때문에 교사는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교사역할훈련도, 비폭력 대화법도, 상담기술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학급 집단의 생리를 이해하고 조절하고 아이들의 불만을 해소하고, 그들의 욕구를 긍정적인 교육활동으로 풀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교대에서 배운 이론적인 교육과정과 추상적인 상담교육으로는 입시위주의 과도한 사교육과 무분별한 대중문화의 홍수 속에서 괴로워하는 아이들을 교육하기에는 역부족입니다.
앞으로 교사역할훈련-비폭력대화법-상담기술에 대한 인디스쿨(초등교사 커뮤니티) 교사모임이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교육적 방향과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아이디어, 다양한 사례들이 쌓여서 자유롭게 공급하고, 그것을 연수로 풀어내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대화법을 공부하고 적용하고 있습니다. 아직도 윽박지르고 감정의 그네를 탈 때가 있지만,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재밌는 것은 화를 내고 가르칠 때나 화를 줄이고 가르칠 때나 결과는 비슷하다는 겁니다. 아니 오히려 감정적 말들을 줄이고 가르칠 때가 아이들과의 관계도 원활하고 힘도 덜들고 성취도 높았습니다. 제가 대화법으로 하니 아이들에게도 대화법을 접목시킬 수 있었고, 아이들간 갈등문제해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현재 학부모님들과 매달 1회씩 대화법을 공부하고 적용합니다. 학부모 상담은 최고라고는 말못하지만 본능적으로 문제이해의 근원적 접근을 하기 때문에 그다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상담 공부를 꾸준히 합니다.
너무 글이 길었습니다. 정리합니다. 아이들을 인격적으로 규정하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아이 발달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아이의 현재의 모습은 아이가 만난 사람들과의 관계 질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아이를 미워하거나 화낼 필요가 없다. 아이 역시 교사의 적절한 교육적 이해와 방향제시가 필요한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이의 문제행동과 학부모의 편협한 교육방식 문제는 남기 때문에 교사역할훈련, 대화법, 구체적인 상담노하우가 필요하며, 그 역할을 인디스쿨 선생님들의 모임과 결과물 공유라는 초등교육 집단지성의 연대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사족-
*교사역할훈련에도 대화법에도 상담기술에도 칼로저스라는 큰 인물로 부터 시작되었음을 봅니다. 그리고 그 제자 토마스 고든과 하임기너트, 먀살 로젠버그가 꽃을 피우고, 그들의 제자들과 그들이 쓴 책을 읽고 영향받은 현장 선생님들이 초등교육 현장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권정생작가(동화의 진면목) 와 이오덕 선생님(글쓰기교육의 선구자)이 한짝이었고, 김용택(아이 문학의 재발견), 백창우(권정생-이오덕-김용택-아이들의 문학을 노래로 승화시킨 음악의 선구자)가 함께 했음을 봅니다.
이제 우리 초등 선생님들이 할 일은 무엇일까요? 갑자기 이호철 선생님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보고 싶습니다.
좋은 글 잘 보았습니다. 아이 키우는 입장에서 칭찬의 문제가 넘 와닿네요...
현장에서 상담을 하다보니 대화법이 문제가 아니오.
보통의 선생과 부모들은 대화법을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부드러운 수단으로 쓰고 있소.
부드러워서 그것이 사실은 '강력한 통제의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감추는 그런 대화말이오.
대화법 이전에 아이들을 통제하겠다는 의도를 버려야 하오.
대화법 이전에 아이들을 자신과 대등한 인격체로 보고 그들의 욕구와 에너지를 자신의 것만큼이나 중하게 여기는 관점이 필요하오..
그게 없으면 대화법은 또다른 족쇄일뿐.
명답이요. 대화법은 구조론적으로 보면 제어에 불과합니다.
개인의 존엄- 독립된 인격체-스스로의 문제해결에 대한 전제가 먼저 성립되어야 대화법이 가능합니다.
대화법은 기술이기 이전에 철학이어야 합니다.
왜 애들을 자꾸만 가르치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되오. 아직도 학교가 뭘 가르치는 데라고 믿는 사람이 너무 많소. 어차피 배워서 남는건 없는데. 산수문제 따위를 풀어서 뭐한다는 건지? 계산기로 하면 되는데. 맞춤법 틀리면 어때? 차라리 맞춤법 맞춰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지. 공부를 왜 해? 다들 미쳤구만.
교육은 그 자체로 하나의 돌아가는 시스템이어야 하지 뭘 가르친다는건 얼빠진 생각입니다.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보여주고 애들이 자기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는게 중요한 거고, 중요한 것은 애들이 어떻게 하든 거기에 대응한다는 것입니다. 주먹구구식이 아닌 시스템적 대응이어야 하지요.
허거덕..김동렬님이 나하고 같은 생각이구랴..초등학교 국어로서 족하다고 생각하고, 학교 다니는 내내 문법을 왜 배우는지 도저히 이해 못한 1인..사회나 역사를 배우면서도 도대체 이걸 왜 배우는지 질문해도 모르는 선생들..미치는줄 알았소..
^^
'나쁜 사람은 없다'라는 어머어마한 전제를 당당히 깔아두고 시작하시군요. 좋네요.
'학교'가 울타리가 있다고 해도 사회 안에 있으니 사람 사는 모양새가 그대로 새어 들겠지요.
아이에게 나쁜 영향을 줄 지도 모르는 행태가 횡행하기도 하구요.
나쁜 영향을 줄 어른도 보이겠지요, 학부모 중에서도 교사 중에서도 그리고 내 언행 중에서도.
사람은 보이기도 하지만, 느껴지기도 합니다. 향기가 있지요, 냄새도 있고.
뭔가 다른 한 사람의 등장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한 방울을 향수가 온 집안을 채우듯이, 사람은 그런게 있더군요.
때가 되면 다 바뀔 때가 올겁니다. 그러나 다른 향기의 등장만으로도 이미 다른 시대는 시작된거지요.
Imessage기법은 대화뿐 아니라 생각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생각이 전제일 수도 있지요. 그 주장을 한 원조들과 인터뷰를 한다면 한번 짚어두고 싶은 대목입니다.
Imessage기법을 나를 살피는 생각에 적용하는 것 상대없이 언제라도 할 수있다는 장점이 있지요.
일이 풀려가는 과정을 보면, 하나가 나와 주느냐에 모든 것이 달린 경우가 있습니다. 이전에 있던 존재와는 다른 하나. 생긴 것도 모양도 그리 달라보이지 않아도 '구조'가 분명히 다른 하나가 나와주면 '계' 전체가 바뀌지요.
그런 존재를 '천적'이라 부를 수 있겠지요.
오늘까지는 절대강자라도, 그 것을 태연히 먹거리로 삼는 존재가 나온다면, 봄 볕에 눈 녹듯 사라져 버리겠지요, 그것이 시스템이든 언행이든.
한국학교교육이 천적과 조우하는 날이 얼마남지 않은 듯 하오^^
최근 중학 2학년 여학생 둘에게 수학 과외를 하면서(하나는 결국 못했고 지금은 둘다 중지) 느낀 바와 일치합니다.
한 학생은 책 읽기를 즐기는데 계산이 가끔 답답할 정도로 느렸고
다른 학생은 글 쓰기에 제법 자신감도 있고 계산도 빠른데 개념을 통 이해하질 못하더군요.
복잡한 가정사 및 성장환경과 관련 있는 것으로 추정할 뿐입니다만 밝히긴 어렵고 다만,
말씀하신 '대화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가르쳐본 결과
최근 전자의 학생은 성적이 전반적으로 제법 향상됐고 학교생활에도 보다 적극적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생에 비해 '영리한 행동'을 보인 후자의 학생은 결국 과외를 취소하더군요. (저 역시 계산이 느린 타입이다 보니..; 말하자면 애한테 무시당했습니다.ㅠㅠ)
느낀 점은 적어도 두 가지 타입의 학생이 있고 서로 다른 교수법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후자의 학생의 경우는 가정사와 관련한 이유로
'친구 같이 대화하는 선생님'보다는 '아버지 같이 권위 있는 선생님'이 필요한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칭찬하고 고양하는 친구 말고 훈육하고 계도하고 스승다운 스승 말이지요.
어쨌거나 선생의 글을 보니 더욱
현장에서 진지함을 유지하고 계신 선생님들이 연대를 꾀할 만한 큼직한 상설 조직, 전교조 이상의 무엇이 절실한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