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13058 vote 0 2011.06.17 (00:00:15)

 

선이 굵은 그림
한 공간에 둘을 집어넣으면 아이디어가 나온다.

 

창의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저 선이 굵은 그림을 그리기만 하면 된다. 그림이 아닌 다른 어떤 장르라도 마찬가지다. ‘선이 굵다’는 것은 계의 내부가 균일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구조론의 질이다. 질은 밀도다. 그저 밀도를 높이기만 하면 된다. 어떻게 밀도를 높일 것인가? 그게 창의다.

 

모든 창의는 하나 안에 둘을 집어넣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 속에 둘을 집어넣을 수 있는가? 사슴과 호랑이가 하나의 우리 안에 있을 수는 없다.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슴이 진흙탕 수렁에 빠져 있다면 어떨까? 호랑이가 사슴을 잡아먹으려다가 같이 수렁에 빠지고 만다. 이때 지나가던 포수가 이 장면을 목격하고 사슴과 호랑이 둘 다 한꺼번에 잡으려다가 같이 빠지고 만다.

 

나무꾼과 호랑이와 사슴은 균일해진다. 셋 사이에 강자와 약자의 서열구분은 사라진다. 서로 대등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셋이 다 함께 수렁에 빠져서 꼼짝 못하는 신세, 질의 균일한 밀도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이렇듯 둘이나 셋을 하나의 공간에 가두어 두려면 끈적끈적한 물질이 필요하다. 동작을 느려지게 하는 진흙탕이 필요하다. 수렁에 빠지면 꽉 차서 밀도가 높아지는 것이며, 동작이 굼떠져서 슬로우비디오가 된다. 선이 굵다.

 

무릇 창의한다는 것은 하나 안에 둘을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이다. 모든 창의가 그러하다. 춘향과 몽룡은 신분의 차이로 같은 건물에 공존할 수 없다. 둘을 하나의 공간에 밀어넣는 것은 사랑이라는 수렁이다.

 

둘은 사랑이라는 수렁에 빠져 같은 침대 위에 공존하게 된다. 스트로스 칸 IMF사무총장과 호텔여직원을 하나의 공간에 밀어넣는 것은 돈이라는 수렁, 혹은 욕정이라는 수렁이다.

 

어떻게 이질적인 존재를 하나의 공간에 붙잡아둘 수 있는가? 그것은 에너지다. 계에 에너지가 걸리면 스트레스가 작동하여 동작은 굼떠지고 내부는 균일해진다. IMF사무총장과 호텔직원이 대등해지고, 춘향과 몽룡이 대등해진다. 모든 사람이 대등해지면 그때부터 드라마는 시작된다.

 

강자와 약자, 남자와 여자, 빈자와 부자, 백인과 흑인 그 서로 다른 존재, 이질적인 존재의 차별성이 클수록 더 끈적끈적한 시멘트가 필요하다. 초강력 본드로 접착해 두어야 둘이 한 곳에 붙어 있다.

 

선이 굵다는 것은 서로 긴밀하게 얽혀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게 이렇게 되면 저게 저렇게 된다’는 것이다. 고양이 두 마리가 싸운다면 순식간에 후다닥 해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

 

두 마리 고양이는 상대방의 행동 하나하나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끼리 두 마리가 느리게 싸운다면 어떨까? 검도 고수가 진검으로 대결하듯이 팽팽해져서 상대방의 작은 행동에도 일일이 반응한다.

 

말하자면 팽팽한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 팽팽한 긴장이 끈적한 수렁과 같다. 동작 하나하나가 다 이유가 있어야 한다. 바둑고수가 대결한다면 하나하나에 다 이유가 있다. 끈적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나 하수끼리 놓았다면 어느 지점에 돌을 놓든 반드시 거기에 놓아야 하는 이유가 없다.

 

바둑을 해설하는 사람이 해설할 내용이 없다. 그냥 아무렇게나 놓아본 것이다. 이건 선이 가는 것이다. 만원 버스라면 어떨까? 내가 조금만 움직여도 누군가 비명을 지른다. 바로 반응이 온다. 내가 방귀를 뀌면 누군가 코를 틀어막는다. 그것이 밀도가 높은 상태, 선이 굵은 것이다.

 

텅 빈 버스라면 어떨까? 방귀를 뀌어도 반응이 없다. 소리를 질러도 반응이 없다. 생쇼를 해도 반응이 없다. 이건 밀도가 낮은 상태, 구조론의 질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 내부가 균일하지 않은 상태이다. 균일해야만 정보가 전달된다. 소통이 일어난다. 촛불의 밀도를 계속 높여서 명박산성을 넘어 청와대까지 가득 채워야 명박에게서 약간의 반응이 온다. 그 상태에서 명박과 여고생은 균일해진다. 우열이 사라져서 똑같아져 버리는 것이다.

 

장인이 가구를 만들 때 못을 사용하면 안 된다. 나무를 깎아서 나무끼리 결합시켜야 한다. 못은 강하고 나무는 약하다. 밀도가 다르므로 부분에서 힘이 전달되지 않고 반사되어 되돌아온다. 그 부분에서 삐꺽거리기 시작한다. 이는 선이 가는 상태, 불균일한 상태이다.

 

여자 하나에 남자가 둘이면 삼각관계다. 곧 밀도가 높은 상태다. 그러므로 드라마가 탄생한다. 밀도는 에너지에 의해 형성되며 그것은 끈적한 물질이거나 심한 스트레스거나 분노이거나 어떻든 서로간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선이 굵다는 것은 상황을 단순화 시킨다는 것이며 그 방법으로 대칭구조의 긴장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수렁에 빠지면 단순화 된다. 진흙탕 색깔로 통일된다. 흑인과 백인의 피부색 차이가 사라진다.

 

전쟁이라는 수렁에 빠지면 죽느냐 사느냐만 남는다. 그 외의 모든 것은 지워진다. 전쟁통에 수도권대냐 지방대냐, 전라도냐 경상도냐 따질 겨를이 없는 거다.

 

아이디어는 생각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단순화된 구조 속에서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아이디어는 부품을 모아서 조립하는 것이 아니라 풍선에 물을 채워넣고 바늘로 뚫어주면 저절로 쏟아져 나오는 것이다.

 

계에 밀도를 채워놓고 한쪽만 살짝 열어주면 아이디어는 우르르 쏟아진다. 마빡이가 웃긴 것은 상황을 단순화 시켰기 때문이다. 계속 마빡을 타격하는 방법으로 밀도를 높였기 때문이다. 스스로 자신을 꼼짝없이 수렁에 빠뜨린 것이다.

 

말하자면 무대를 엘리베이터 안과 같은 비좁은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계속 힘들게 마빡을 강타하고 있으면, 상대의 작은 행동에도 곧바로 반응하게 된다. 상대가 혀만 낼름해도 사태가 발생한다.

 

김병만이 철봉에 매달려 피곤한 상태에서 노우진과 류담이 작은 행동에도 바로 반응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매달려서 떨어지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상태, 밀도가 극도로 높아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는 살짝만 건드려줘도 바로 웃음이 터진다.

 

오른쪽에 호랑이가 있고 왼쪽에 사자가 있어 어느 쪽으로도 움직일 수 없는 곤란한 상황에 빠뜨리는 것이다. 꽉 낀 상태, 정보가 바로 전달되는 상태, 저쪽에서 일어난 일이 이쪽까지 바로 알게되는 상태.

 

일본식 목조건물은 벽이 얇아서 한 건물에 열 명이 하숙한다면 다 들린다. 말하자면 열 명의 식구가 한 집에 사는 셈이 되어버린 것이다. 한 명이 화장실에서 들어가서 푸덩덩 하면 저쪽 끝방에서까지 알고 비명을 지른다.

 

어떤 하나에 전체가 연동된 상태, 하나가 전체를 결정하는 상태, 서로 긴밀하게 관계를 주고받는 상태, 숨 막히는 상태, 에너지가 잘 전달되는 상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바로 알 수 있는 상태. 매달려서 대롱대롱한 상태.

 

 

 

http://gujoron.com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1.06.17 (17:10:38)

이 글을 읽으면서 문득 다시..아..!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예술이 왜 사람을 한데 모으는 힘이 있는가? 하는 것에서 예술 그 자체는 둘을 잇는 강력한 접착제라는 것...

그런 접착제 역할을 하는 것들은 잘 찾아보면 많이 있다는 생각도 드네요.

[레벨:12]김대성

2011.06.18 (05:20:21)

전송됨 : 페이스북

 접착제 따위는 없소. 동일한 질이 있어서 동류의 입자가 되었을 뿐이오. 누가 불러 모이는 것이 아니고, 한사람이 있어 미리 가 있을 뿐이오.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1.06.18 (06:20:07)

이른 아침에 그냥 갈까하다 로그인 하네요.

 

본문에서 접착제라 썼기에 그 말을 그대로 일단은 인용한 것입니다.

 

입자를 얘기함이 아니고 질을 얘기함이니...여기서 한 사람이란 입자는 반드시 질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면 그 질이 무엇이 되느냐? 는  질을 취함에 있어서 질은 그 사람과 연결된 것이므로...

질 그 자체가 접착제라는 것이지요.

즉 질이 높을수록 입자를 붙들어 놓는 힘이 강해진다는 것이지요. 끌림이 크다는 것이지요.

사람 자체의 질이 높을 수도 있으나...그 말은 그 사람의 정신 혹은 가지고 있는 재능을 포함하는 것이므로,

그 사람 자체의 질은 반드시 외부의 질과 만나게 되어 있으므로,

이 역시 질과 질을 잘 붙들어 놓을 수 있는 이유는 질이 균일해야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질과 질의 상태가(혹은 관계가) 대등해져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질 그 자체가 이미 접착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요.

질 역시 입자로서 존재하기도 하므로, 즉 질이 높은 입자들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이지요.

 

여기는 구조론 사이트이니 구조론을 예로 든다면,

김동렬님이란 질과 구조론이란 질이 만났는데...이 둘은 서로 질이 균일한 상태라서 잘 서로 붙들고 있지요.

구조론이란 질을 동렬님이 발견한 것이지, 없는 것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니므로 구조론이란 질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므로, 구조론을 발견할 대등한 조건의 김동렬님이란 질이 그 가치를 알아본 것이지요.

구조론도 입자고 김동렬님도 입자이나 만날때는 질로 만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질 그 자체가 접착제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질만이 서로를 잘 붙들고 있을 수 있으므로, 우리 주변에

문화나 예술 등의 형태는 그런 입자의 형태로 보여지나 만날때는 질로 만나기 때문에,

문화 예술 역시 질이 접착제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불러 모으는 것은 , 혹은 모여드는 것은 입자라는 어떤 보여지는 형태가 있으나,

보여지지 않는 부분은 질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통해서 부르거나 모이므로,

보이는 입자를 보고 모인다고 착각을 하게되지만, 실상은 보이지 않는 부분이 이 모두를 붙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붙들고 있는 힘의 본질은 질이라는 것이지요.

붙들고 있기 때문에 접착제라 표현하는 것이지 않을까 합니다.

그러니 여기서 질의 어떤 성질을 접착제라 표현했다고 보시면 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한 사람이 미리 가 있는 그것 역시 질과 질이 만나서 붙들고 있기에 가 있는 것이고, 먼저 가게 된 것이지, 그 사람이 입자 자체로 알아서 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끌림이 있고, 붙들어 매는 그것에 매혹되었기에 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도 들구요. 그것이 질의 힘이라고 생각되는군요.

 

그래서 질 자체가 있는 것이지만, 질 자체도 품질이 좋은 질이 있고 낮은 질이 있으므로,

낮다는 것은 질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므로, 질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으나, 그래도 질은 질이겠지요.

질에 따라서 서로 붙들고 있는 수준의 상태가 결정되므로 , 높은질로 높은 수준, 낮은질로 낮은 수준..뭐..그렇게 말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진리의 결을 따라서 흐르는 질을 보자라는 것이 구조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구요.

아무리 좋은 질이 있어도 모여드는 입자들의 질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면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주거니 받거니가 안되므로.... 질 그 자체로서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질을 접촉하는 입자들의 수준이 문제인 것이라고 생각도 되구요.

그러므로 질을 드러내는 것도 결국 입자들의 문제인 것이라고 생각되네요.

입자의 질이 좋을 수록 질 그자체를 보고 만나게 되니 질의 결이 잘 드러난다고 생각도 되구요.

 

여기서 입자를 존재라고 생각해도 좋겠고, 눈에 보여지는 것, 표현되어지는 것..등등이라 해도 좋겠지요.

그러므로 질이나 문화 혹은 예술을 포괄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이유는...어떤 입자로서 한 개의 작품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질은 독립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것과 같아서, 입자로서의 개체 혹은 양이 만나는 접점에서의 질의 결을 표현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시면 될듯합니다.  

입자 혹은 양이 질과 만나서 결합하는 것이므로, 입자나 양을 꽉 붙들고 있는 것은 질이되기 때문에,

입자나 양은 홀로 질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이 되겠지요.

그러므로 한 사람도 질이 붙잡고 있는 것과 같아서 혼자가 아니고, 혼자 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입자로서는 혼자일지라도 입자인 개체와 질 그 자체인 질과 같이 있으므로 결코 홀로일 수는 없고, 한 사람일 수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제가 생각하는 바가 잘 설명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질을 접착제로 얘기한다해도 하자가 없다는 얘기이고,

접착제라 표현하는 것을 질의 성질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면, 붙들고 있다라는 것이고,

질은 반드시 홀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라는 것이고, 만남(혹은 접촉, 관계, )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러한 질을 발견할 거리는 의외로 많다는 것이고,

우리는 모여있는, 혹은 모이게하는 것은 질이 결정한다는 것이고,

그 질은 입자로서 보여질 수도 있어서 매개체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이미 매개체 역할을 하는 그 자체의 질의 역량에 따라 모이게 되는 또는 모이게 하는 것들의 질을 다시 결정한다는 것이고,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도 질이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매개체 역할의 질이 입자로 보여지는 것은 한정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보여지지 않는 부분의 질이 그것을 결정한다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얘기가 길어졌네요. 나름대로 제 생각을 표현한다고 했지만....잘 모르겠네요. 잘 되었는지는....

 

 

.

 

 

 

 

 

 

[레벨:12]김대성

2011.06.18 (07:28:16)

전송됨 : 페이스북

 ~역할을 한다. 는건 비유일 뿐이고, 하여간 접착제라는것은 없는데, 붙어 있으므로 질이 작용하는걸 유추해서 파악하는 거고. 별로 논쟁할 거리도 없소. 질에서 입자로 이어지는 과정에도 접착제는 없고, 입자와 입자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건, 붙어 있건 간에도 접착제는 없소.

 

  내가 거슬리는건 요소가 많아 지는게 싫기 때문이지 다른건 없소. 질입자힘운동양이, 사건이나 존재, 독자적인 영역에 따라 어울리는 어휘는 있겠으나,  단순한것이 좋소.

프로필 이미지 [레벨:20]아란도

2011.06.18 (15:33:41)

단순한 것이 좋다 하시면서..별로 서로에게 도움 안되는 말들만 나열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독립된 입자 형태로는 의미가 없소.

독립된 입자들을 한데 묶거나 연결하거나 붙들어 놓는 것이 질의 상태이므로...질은 그런 상태에서만 질이 외부로 보여진다고 생각되오.

하지만 보여진다고 말해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이므로..여기서 질에 대해, 질을 보는 것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오.

입자가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질을 필요로 하오.

질에서 비롯되어 입자가 독립해 있으나, 입자가 입자 자체만으론 도약이 안되므로 다시 질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보오.

 

입자인 구조론 사이트 회원들이 서로 독립해 있으나, 이들을 한데 붙들고 있는 것이 구조론이라는 질이오.

이것은 구조를 발견한 동렬님이 사이트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구조가 붙들고 있는 것과 같고,

그렇지만 입자에 질이 침투되어 있으므로 , 또한 입자(구조)와 입자(동렬님)사이가 균일하므로 결국 구조의 질이 곧 동렬님이란 결론도 나오게 되오.

 

이것이 우리눈에 보이는 것이고, 동렬님으로 비롯되어 표현된 구조는 다시 입자로서 우리눈에 보이게 되나 우리를 붙잡고 있는 구조는 입자로서가 아니라 질로서의 구조이므로, 이 구조 역시 사이트 회원들에게 침투되므로, 곧 침투된 구조의 질이 회원들이란 결론이 나오게 되므로... 1차적으로 구조의 질은 동렬님이란 입자로 표현되었고, 2차적으로 구조의 질은 사이트 회원들이란 입자들로 표현되고, 3차적으로 구조의 질은 눈팅족의 입자 단계를 건너뛰어 양으로 표현된다고 생각되오.

 

여기서 침투라고 썼으나 교섭하는 과정에 이미 침투가 생겨난다고 보오. 입자와 입자가 만나면 사건이 생기고, 그 사건은 질로서 우리눈에 보여져 어떤 판단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이미 침투된 것과 같다고 보오. 그리고 확산이 일어나는 것이고 보면, 입자와 입자가 만나서 질을 형성하면 이미 순식간에 힘 운동 양은 나타나게 된다고 보오. 단지 질의 강도에 따라서 그 확산이 결정된다는 것이오.

 

그러므로 질의 상태는 동렬님> 회원들> 눈팅족으로 갈수록 약해지는 것이라고 보오.

그렇다고 구조 자체가 갖고 있는 질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오.

단지 질은 어떤 만남(결합)에 의해 그 존재를 입증하는 것과 같으므로, 입자인 상태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오.

사람이 혼자서 아무리 잘난들..무인도에서는 질이 의미가 없다는 것이오. 물론 혼자서 질을 높이기 위해 질 그 자체와 만날 순 있어도, 굳이 표현하거나 표현될 필요는 없다는 것이지요.

 

질이 드러나는 과정에서 질 입자 힘 운동 량으로 쫙 나타나지만, 그 사이사이에 어떤 작용들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이 질 입자 힘 운동 양에 대해 더 잘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오.  

 

 

[레벨:12]김대성

2011.06.18 (22:25:38)

전송됨 : 페이스북
하여간 존재론적 시각이면 좋소.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7047 한글의 기적 김동렬 2024-10-10 2643
7046 제프리 힌턴과 천경자 콤플렉스 김동렬 2024-10-10 2248
7045 독일철학의 허실 김동렬 2024-10-10 1834
7044 자의식 과잉 한동훈 김동렬 2024-10-08 2782
7043 프랑스의 악행 김동렬 2024-10-08 2126
7042 프랑스 철학은 사기다. 1 김동렬 2024-10-08 2108
7041 구조의 구조 김동렬 2024-10-07 1874
7040 구조의 발견 김동렬 2024-10-06 1824
7039 지식혁명의 구조 3 김동렬 2024-10-05 2383
7038 양수, 음수, 허수 김동렬 2024-10-04 2147
7037 개천절 유감 김동렬 2024-10-03 3188
7036 한국인이 착해졌다 image 김동렬 2024-10-03 3113
7035 의심은 쉽고 해명은 어렵다 1 김동렬 2024-10-03 2523
7034 게이가 존재하는 이유 김동렬 2024-09-30 3994
7033 자연선택설의 오류 김동렬 2024-09-29 3564
7032 진리와의 대면 3 김동렬 2024-09-29 3600
7031 세기말의 검은 구름 김동렬 2024-09-28 3957
7030 위선보다 위악이 낫다 6 김동렬 2024-09-27 4680
7029 전체주의와 결탁한 좌파 김동렬 2024-09-26 4635
7028 신의 문제 김동렬 2024-09-26 40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