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이 벌어진다. 용기있는 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한다. 최후의 수단으로
무력을 대비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철저한 힘의 우위에 기초하기, 그러면서도 무력의 사용을 최소화 하기..
필부의 용맹과는 다른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의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김정일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필부의 용맹을 가진 자는? 총을 들고 싸움판에 달려가기를 주저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용감히 싸우기는 하지만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다. 싸움은 그 자체로 엄청난 스트레스다.
필부의 용맹은 자기 스트레스의 과부하를 겁낸 것일 때가 많다. 진정한 승리자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를 말한다. 돌부처 이창호가 그렇듯이 마지막 순간까지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김탁환 원작의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이순신과 원균을 다 같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순신은 무력을 갖추고서도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로, 원균은 필부의 용맹을 가진 자로 각각 묘사하고 있다.
보통 사람은? 눈치를 본다. 그들은 남들이 하는 데로 따라서 움직인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대세에 편승하는 것이다. 이것도 나쁜 것은 아니다.
겁장이는? 도망간다. 부시처럼 전선에서 이탈하여 안전한 후방으로 숨는다.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뒤늦게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나타나서 적군이 아닌 아군을 향해 그 더러운 칼끝을 겨눈다.
그들은 적군에게 겁탈을 당하여 울고 있는 죄 없는 아녀자를 잡아와서 ‘적군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를 두어 추궁한다. 무죄한 아녀자를 살해하고는 그걸로 자기의 전공을 삼으려 한다.
만화나 소설이나 영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이다. 실제로 역사의 무수히 많은 장면들에 등장하곤 한다. 적들이 패주하여 도망가고 난 다음 뒤늦게 나타나서 ‘다 덤벼!’ 하고 고함을 지르는 비겁자의 공식 말이다.
전형적인 비겁자 이문열
이문열.. ‘시대와의 불화’라는 묘한 말을 찾아내었다. 모두가 시대와 불화하여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달아났다. 싸움이 끝나고 뒤늦게 나타나서 때늦은 시대와의 불화를 시도한다. 아군을 향해 칼을 겨눈다. 그는 비겁자이다.
진정 용기있는 사람이라면 전두환, 노태우를 향해 칼을 겨누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인간 이문열! 그때 그 시절 남들 다 가는 구치소 한번 못가 본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문열이 또 이데올로기 공세를 편다. 좌우의 이분법에 숨는 방법으로 50점 공짜로 먹고 들어가려는 비겁한 수작이 아닌가? 이념의 방패 뒤에 숨지 말고 인간을 증명하라. 이문열 너는 이념을 논하기 전에 인간실격이다.
불알이 없어서 슬픈 이문열
아멜리 노통의 출세작 ‘살인자의 건강법’에 등장하는 논리를 빌리면.. 진정한 작가에게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나는 불알이고 둘은 자지다. 아멜리 노통의 비유에 의하면 ‘빅토르 위고’는 자지는 있었는데 불알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문학적 발기에 실패한 것이다.
불알이란 무엇인가? 참을 수 없는 주변의 역겨운 것들에 대한 저항의 지점으로서 세상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다. 장정일 식으로 말하면 “뭐하고 있어?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걸지 않고.” 이런 것이다.
문학은 세상과의 날선 부딪힘이며 각자에게는 그러한 부딪힘의 지점이 있다. 거기서 상처와 고름이 생겨나는 법이며 문학인은 부단히 그 상처를 핥는 방법으로 그 고통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해체된 가족을 등장시켜 현대사회의 위기상을 표현하는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의 그것과 같다. 노통 역시 마찬가지다. 비로소 삶과 문학이 일체가 된다. 그 삶 자체가 문학이 아니고서는 그 작품 역시 문학이 아니다.
그런데 빅로트 위고.. 그는 세상에 아부한 자이다. 장발장? 까놓고 이야기 하면 잘 쓴 동화책에 불과하다. 그는 서구문명의 한계라 할 기독교의 원죄설이라는 감옥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용기있게.. 넘어가서 안되는 금을 넘어가는 방법으로 문학의 지평을 확대한 많은 진짜 작가들과는 다르다.
각설하고 노통의 비유한 바 자지란 무엇인가? 작가적 재능이다. 작가가 되려면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있어야 한다. 재능이 있거나 아니면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는 용기 말이다.
재능만 가지고는 기껏해야 잘 팔리는 소설가가 될 뿐이다. 장안의 지가를 올리는 장사꾼은 될지언정 ‘인간이라는 존재의 내면을 탐구하는 과학’으로서의 문학인은 못된다는 말이다.
이문열의 인간실격
불알이 있어야 한다. 자지만 가지고는? 그저 싸댈 뿐이다. 확실히 이문열은 많이 싸댄 편에 속한다. 그는 싸고 또 싸대곤 했다. 줄기차게 싸질러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분량이 많다.
그러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가주는 것이다. 그의 최고작은 아마도 그의 데뷔작일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문학인이 마땅히 해야할 역할은 인간에게 금제된 금기의 성역을 깨고 인간에게 허용된 자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일이어야 한다.
예전에 인간에게는 많은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보다 많은 것이 허용되었다. 인간의 자유의 영역은 점차 넓혀지고 있다. 그 영역넓히기의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불알이 없다면? 발기가 안된다. 그러므로 사정하지 못한다. 사정하지 못하므로 잉태되지 않는다. 그의 발기는 헛발기였던 것이다. 사숙을 두어 숙생을 모집하고 있지만 부악문원 출신으로 성공한 작가는 아직 없는듯 하다.
마지막 환관 이문열 나으리
아직도 세상은 당신의 푸념에 귀 기울여줄 인정을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는 건재하다. 당신은 세상을 향해 말을 걸 수도 있다. 나는 이렇듯 당신의 가엾은 호소에 반사신공을 날릴 아량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노통이 묘사한 위대(胃大)한 추물 프레텍스타 타슈의 겉모습은 너무나 당신을 닮지 않았는가? 마지막 순간에 타슈는 다급히 여기자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타슈의 목을 졸라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내게는 왜 당신이 주장하는 ‘시대와의 불화’가 니나에 대한 타슈의 - 그 가엾기만 한 - 고백처럼 들리는가? 사랑한다구? 웃기지 마셔! 난 너를 사랑 안해. (노통의 처녀작 살인자의 건강법은 통째로 문학 그 자체에 대한 야유다. 그런데 이문열이 마침내 꿈에 그리던 노벨상을 수상하고 그 작품에 등장한다.)
필부의 용맹과는 다른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의 방식이다. 그것은 우리가 김정일의 변덕에도 불구하고 햇볕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필부의 용맹을 가진 자는? 총을 들고 싸움판에 달려가기를 주저하지는 않는다. 이 경우 용감히 싸우기는 하지만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다. 싸움은 그 자체로 엄청난 스트레스다.
필부의 용맹은 자기 스트레스의 과부하를 겁낸 것일 때가 많다. 진정한 승리자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 자를 말한다. 돌부처 이창호가 그렇듯이 마지막 순간까지 스트레스를 감내하며 최선을 다할 수 있어야 한다.
김탁환 원작의 KBS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은 이순신과 원균을 다 같이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순신은 무력을 갖추고서도 모든 경우의 수에 대비하는 진정한 용기를 가진 자로, 원균은 필부의 용맹을 가진 자로 각각 묘사하고 있다.
보통 사람은? 눈치를 본다. 그들은 남들이 하는 데로 따라서 움직인다. 시대의 흐름을 읽고 대세에 편승하는 것이다. 이것도 나쁜 것은 아니다.
겁장이는? 도망간다. 부시처럼 전선에서 이탈하여 안전한 후방으로 숨는다.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에 뒤늦게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나타나서 적군이 아닌 아군을 향해 그 더러운 칼끝을 겨눈다.
그들은 적군에게 겁탈을 당하여 울고 있는 죄 없는 아녀자를 잡아와서 ‘적군과 내통하였다‘는 혐의를 두어 추궁한다. 무죄한 아녀자를 살해하고는 그걸로 자기의 전공을 삼으려 한다.
만화나 소설이나 영화에 흔히 나오는 장면이다. 실제로 역사의 무수히 많은 장면들에 등장하곤 한다. 적들이 패주하여 도망가고 난 다음 뒤늦게 나타나서 ‘다 덤벼!’ 하고 고함을 지르는 비겁자의 공식 말이다.
전형적인 비겁자 이문열
이문열.. ‘시대와의 불화’라는 묘한 말을 찾아내었다. 모두가 시대와 불화하여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달아났다. 싸움이 끝나고 뒤늦게 나타나서 때늦은 시대와의 불화를 시도한다. 아군을 향해 칼을 겨눈다. 그는 비겁자이다.
진정 용기있는 사람이라면 전두환, 노태우를 향해 칼을 겨누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못했다. 인간 이문열! 그때 그 시절 남들 다 가는 구치소 한번 못가 본 사람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 않은가?
이문열이 또 이데올로기 공세를 편다. 좌우의 이분법에 숨는 방법으로 50점 공짜로 먹고 들어가려는 비겁한 수작이 아닌가? 이념의 방패 뒤에 숨지 말고 인간을 증명하라. 이문열 너는 이념을 논하기 전에 인간실격이다.
불알이 없어서 슬픈 이문열
아멜리 노통의 출세작 ‘살인자의 건강법’에 등장하는 논리를 빌리면.. 진정한 작가에게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한다. 하나는 불알이고 둘은 자지다. 아멜리 노통의 비유에 의하면 ‘빅토르 위고’는 자지는 있었는데 불알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문학적 발기에 실패한 것이다.
불알이란 무엇인가? 참을 수 없는 주변의 역겨운 것들에 대한 저항의 지점으로서 세상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다. 장정일 식으로 말하면 “뭐하고 있어? 세상을 향해 싸움을 걸지 않고.” 이런 것이다.
문학은 세상과의 날선 부딪힘이며 각자에게는 그러한 부딪힘의 지점이 있다. 거기서 상처와 고름이 생겨나는 법이며 문학인은 부단히 그 상처를 핥는 방법으로 그 고통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해체된 가족을 등장시켜 현대사회의 위기상을 표현하는 재일동포 작가 유미리의 그것과 같다. 노통 역시 마찬가지다. 비로소 삶과 문학이 일체가 된다. 그 삶 자체가 문학이 아니고서는 그 작품 역시 문학이 아니다.
그런데 빅로트 위고.. 그는 세상에 아부한 자이다. 장발장? 까놓고 이야기 하면 잘 쓴 동화책에 불과하다. 그는 서구문명의 한계라 할 기독교의 원죄설이라는 감옥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였다.
용기있게.. 넘어가서 안되는 금을 넘어가는 방법으로 문학의 지평을 확대한 많은 진짜 작가들과는 다르다.
각설하고 노통의 비유한 바 자지란 무엇인가? 작가적 재능이다. 작가가 되려면 적어도 둘 중에 하나는 있어야 한다. 재능이 있거나 아니면 시대의 부조리에 맞서는 용기 말이다.
재능만 가지고는 기껏해야 잘 팔리는 소설가가 될 뿐이다. 장안의 지가를 올리는 장사꾼은 될지언정 ‘인간이라는 존재의 내면을 탐구하는 과학’으로서의 문학인은 못된다는 말이다.
이문열의 인간실격
불알이 있어야 한다. 자지만 가지고는? 그저 싸댈 뿐이다. 확실히 이문열은 많이 싸댄 편에 속한다. 그는 싸고 또 싸대곤 했다. 줄기차게 싸질러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분량이 많다.
그러나 그 나물에 그 밥이다. 도무지 진도가 안 나가주는 것이다. 그의 최고작은 아마도 그의 데뷔작일 것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 대한 탐구이다. 문학인이 마땅히 해야할 역할은 인간에게 금제된 금기의 성역을 깨고 인간에게 허용된 자유의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는 일이어야 한다.
예전에 인간에게는 많은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보다 많은 것이 허용되었다. 인간의 자유의 영역은 점차 넓혀지고 있다. 그 영역넓히기의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불알이 없다면? 발기가 안된다. 그러므로 사정하지 못한다. 사정하지 못하므로 잉태되지 않는다. 그의 발기는 헛발기였던 것이다. 사숙을 두어 숙생을 모집하고 있지만 부악문원 출신으로 성공한 작가는 아직 없는듯 하다.
마지막 환관 이문열 나으리
아직도 세상은 당신의 푸념에 귀 기울여줄 인정을 가지고 있다. 조선일보는 건재하다. 당신은 세상을 향해 말을 걸 수도 있다. 나는 이렇듯 당신의 가엾은 호소에 반사신공을 날릴 아량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노통이 묘사한 위대(胃大)한 추물 프레텍스타 타슈의 겉모습은 너무나 당신을 닮지 않았는가? 마지막 순간에 타슈는 다급히 여기자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타슈의 목을 졸라 버렸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내게는 왜 당신이 주장하는 ‘시대와의 불화’가 니나에 대한 타슈의 - 그 가엾기만 한 - 고백처럼 들리는가? 사랑한다구? 웃기지 마셔! 난 너를 사랑 안해. (노통의 처녀작 살인자의 건강법은 통째로 문학 그 자체에 대한 야유다. 그런데 이문열이 마침내 꿈에 그리던 노벨상을 수상하고 그 작품에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