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업님은 시금석이다. 그 인간의 본질을 감정할 수 있다. 김대업님을 못마땅해 하는 인간은
설사 노무현대통령 지지를 표방한다 해도 결국은 배반하게 된다. 종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른거 없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무리가 있다. 하나는 독립적 인격을 가진 자유인들이다. 그들은 대등한 개인들의 수평적 네트워크가 가진 공명(共鳴)효과의 폭발력을 중시한다.
둘은 노예와 마름 및 노예주들이다. 그들은 계급의 사다리를 만들어놓고 위에서 끌어주고 아래에서 밀어주며, 한편으로는 동료와 경쟁하며 동료의 머리 꼭대기를 밟고 은밀히 상승하기를 원한다.
노예들은 김대업님을 싫어한다. 그들은 노무현대통령도 싫어한다. 이유는 하나다. 내가 저런 변방의 인간을 왜 섬기느냐 이거다. 거기에 대한 나의 응수는 이렇다.
“누가 너더러 김대업님을 섬기라고 했냐?”
아무도 김대업님을 섬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이 노예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섬길만한 주군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들은 돼지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그들은 뛰어난 후각으로 섬길만한 주군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금방 감별해내곤 한다. 그들은 김대업님이 한번 섬겨볼만한 주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화를 낸다. 마찬가지다. 아무도 노무현대통령을 주인님으로 모시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각이 발달된 노예들은 본능적으로 주군감이 되는지 알아본다.
“아으 우리의 회창님에 비하면 노무현은 참으로 섬길만 하지 못해!” 하고 화를 낸다.
큰 솥의 밥을 함께 먹어야
조선시대 관아의 점심시간은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다. 12시에 원님이 먼저 먹고 그 밥상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준다. 그렇게 전달전달 해서 맨 아래 종놈들 차례까지 내려가면 오후 4시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식사를 마칠 때 반찬을 조금씩 남기는 것이 예의가 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종놈들의 바가지밥에 주인어른이 먹다 남긴 생선 한토막이라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종놈들에게도 신분상승이 있다. 처음 오후 4시에서 먹던 밥이 짬밥이 오를수록 점점 앞당겨져서 언젠가는 12시 30분에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그들의 사는 보람이요 희망이다.
민주주의란 큰 솥의 밥을 함께 먹는 것이다. 모두가 같이 밥을 먹게 되면 짬밥의 상승에서 얻어지는 쾌감을 누릴 수 없다. 고참이 먹던 밥을 신참에게 은혜로이 내려주는 아량을 베풀 기회를 박탈 당한다.
민주주의는 노예로 부터 많은 것을 앗아가는 것이다.
선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우리의 공동체가 독립적 인격을 가진 자유인의 수평적 연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노예와 마름과 노예주의 계급 피라미드로 갈것인가이다.
우리는 선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발달한 돼지의 후각을 사용하여 본능적으로 주인감을 찾아내는 찌질이와 꼴통은 격리해야 한다. 우리는 종자가 다른, 그러므로 어차피 설득되지 않는 그들을 교화하는데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들의 부아를 돋우기 위해,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사고를 가지고, 다른 세계에 살며, 다른 가치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에게 노예의 딱지를 붙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김대업님을 강조한다.
단지 대통령이 궁중에서 통하는 왕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내는 김민웅류 사이비 진보들, 대통령 얼굴 생긴 것이 암만 봐도 고종황제도 닮지 않고 순종황제도 닮지 않았고 히로히또도 닮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수구꼴통들.. 그들과 우리를 분리해야 한다.(젊은 시절의 히로히또와 김영삼을 합성하면 이회창이 된다.)
유비의 포용과 조조의 배척
유비는 항복한 적장을 대개 포용하고 있다. 그 중 많은 장수들이 배신을 저질렀다. 반면 조조는 항복한 적장을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번 주군을 배신한 넘은 또 배신한다는 거다. 어느 쪽이 옳을까?
먹물 서림은 임꺽정을 배신했다. 문제는 그가 먹물이었다는 거다. 하사 김대업과 같은 변방의 사람들은 배신하지 않는다. 또 배신한다 해도 이쪽이 입을 타격은 없다. 이전에 과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변방의 사람들이라면 일단 포용해야 한다. 그러나 한번 배신한 먹물은 포용해서 안된다.
선비가 지조를 꺾은 즉 끝난 것이다. 딴나라에서 날아왔다는 독수리 오형제는 먹물인가 병사인가? 그들이 병사라면 포용해야 하고 먹물이라면 모가지를 꺾어버려야 한다.
이부영, 김홍신, 김부겸, 이우재, 김영춘, 안영근.. 먹물로 처신하는지 병사로 처신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대응도 달라져야 한다.
나는 비위가 좋지 못하다
나는 뭐 그렇게 비위가 좋은 사람은 못된다. 어딜 가더라도 못마땅한 자리라고 생각되면 눈치 보지 않고 그냥 일어선다. 요즘은 전략을 바꿔서 찜찜한 자리라고 생각되면 아예 가지않는 방법을 쓴다.
내게 있어서 미국은 한국인 300만명을 학살한 집단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미국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은 없다. 다만 나는 어떤 이유에서이든 내 가족을 살해한 백정들과 옆에서 태연히 대화할 수 있을 만큼 비위가 좋지 않을 뿐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들이 있다. 그 중에는 비위가 좋은 인간들도 있다. 그런 인간들과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방법을 쓴다. 부시의 비린내가 여기까지 틈입해온다. 창을 닫아거는 수 밖에 없다는 말인가?
다른거 없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무리가 있다. 하나는 독립적 인격을 가진 자유인들이다. 그들은 대등한 개인들의 수평적 네트워크가 가진 공명(共鳴)효과의 폭발력을 중시한다.
둘은 노예와 마름 및 노예주들이다. 그들은 계급의 사다리를 만들어놓고 위에서 끌어주고 아래에서 밀어주며, 한편으로는 동료와 경쟁하며 동료의 머리 꼭대기를 밟고 은밀히 상승하기를 원한다.
노예들은 김대업님을 싫어한다. 그들은 노무현대통령도 싫어한다. 이유는 하나다. 내가 저런 변방의 인간을 왜 섬기느냐 이거다. 거기에 대한 나의 응수는 이렇다.
“누가 너더러 김대업님을 섬기라고 했냐?”
아무도 김대업님을 섬기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본질이 노예이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섬길만한 주군을 선택하려고 한다. 그들은 돼지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는다.
그들은 뛰어난 후각으로 섬길만한 주군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금방 감별해내곤 한다. 그들은 김대업님이 한번 섬겨볼만한 주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화를 낸다. 마찬가지다. 아무도 노무현대통령을 주인님으로 모시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각이 발달된 노예들은 본능적으로 주군감이 되는지 알아본다.
“아으 우리의 회창님에 비하면 노무현은 참으로 섬길만 하지 못해!” 하고 화를 낸다.
큰 솥의 밥을 함께 먹어야
조선시대 관아의 점심시간은 12시부터 오후 4시까지다. 12시에 원님이 먼저 먹고 그 밥상을 그대로 아래로 내려준다. 그렇게 전달전달 해서 맨 아래 종놈들 차례까지 내려가면 오후 4시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식사를 마칠 때 반찬을 조금씩 남기는 것이 예의가 된 이유는 그 때문이다. 종놈들의 바가지밥에 주인어른이 먹다 남긴 생선 한토막이라도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종놈들에게도 신분상승이 있다. 처음 오후 4시에서 먹던 밥이 짬밥이 오를수록 점점 앞당겨져서 언젠가는 12시 30분에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이 그들의 사는 보람이요 희망이다.
민주주의란 큰 솥의 밥을 함께 먹는 것이다. 모두가 같이 밥을 먹게 되면 짬밥의 상승에서 얻어지는 쾌감을 누릴 수 없다. 고참이 먹던 밥을 신참에게 은혜로이 내려주는 아량을 베풀 기회를 박탈 당한다.
민주주의는 노예로 부터 많은 것을 앗아가는 것이다.
선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우리의 공동체가 독립적 인격을 가진 자유인의 수평적 연대로 갈 것인가 아니면 노예와 마름과 노예주의 계급 피라미드로 갈것인가이다.
우리는 선민의식을 가져야 한다. 발달한 돼지의 후각을 사용하여 본능적으로 주인감을 찾아내는 찌질이와 꼴통은 격리해야 한다. 우리는 종자가 다른, 그러므로 어차피 설득되지 않는 그들을 교화하는데 시간을 허비할 이유가 없다.
나는 그들의 부아를 돋우기 위해, 그들이 우리와는 다른 사고를 가지고, 다른 세계에 살며, 다른 가치를 지향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그들에게 노예의 딱지를 붙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김대업님을 강조한다.
단지 대통령이 궁중에서 통하는 왕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화를 내는 김민웅류 사이비 진보들, 대통령 얼굴 생긴 것이 암만 봐도 고종황제도 닮지 않고 순종황제도 닮지 않았고 히로히또도 닮지 않았다고 화를 내는 수구꼴통들.. 그들과 우리를 분리해야 한다.(젊은 시절의 히로히또와 김영삼을 합성하면 이회창이 된다.)
유비의 포용과 조조의 배척
유비는 항복한 적장을 대개 포용하고 있다. 그 중 많은 장수들이 배신을 저질렀다. 반면 조조는 항복한 적장을 함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번 주군을 배신한 넘은 또 배신한다는 거다. 어느 쪽이 옳을까?
먹물 서림은 임꺽정을 배신했다. 문제는 그가 먹물이었다는 거다. 하사 김대업과 같은 변방의 사람들은 배신하지 않는다. 또 배신한다 해도 이쪽이 입을 타격은 없다. 이전에 과오가 있었다 하더라도 변방의 사람들이라면 일단 포용해야 한다. 그러나 한번 배신한 먹물은 포용해서 안된다.
선비가 지조를 꺾은 즉 끝난 것이다. 딴나라에서 날아왔다는 독수리 오형제는 먹물인가 병사인가? 그들이 병사라면 포용해야 하고 먹물이라면 모가지를 꺾어버려야 한다.
이부영, 김홍신, 김부겸, 이우재, 김영춘, 안영근.. 먹물로 처신하는지 병사로 처신하는지에 따라 우리의 대응도 달라져야 한다.
나는 비위가 좋지 못하다
나는 뭐 그렇게 비위가 좋은 사람은 못된다. 어딜 가더라도 못마땅한 자리라고 생각되면 눈치 보지 않고 그냥 일어선다. 요즘은 전략을 바꿔서 찜찜한 자리라고 생각되면 아예 가지않는 방법을 쓴다.
내게 있어서 미국은 한국인 300만명을 학살한 집단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미국에 대해서 특별한 감정은 없다. 다만 나는 어떤 이유에서이든 내 가족을 살해한 백정들과 옆에서 태연히 대화할 수 있을 만큼 비위가 좋지 않을 뿐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인간들이 있다. 그 중에는 비위가 좋은 인간들도 있다. 그런 인간들과는 되도록 마주치지 않는 방법을 쓴다. 부시의 비린내가 여기까지 틈입해온다. 창을 닫아거는 수 밖에 없다는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