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某 기자회견장에 갈 일이 있었다. 초청된 취재기자는 약 50명, 그리고 카메라 기자 수십명이 왔다. 발표와 질의응답이 끝나고 포도주를 곁들인 5만원 상당의 중식이 제공된다. 돌아가는 손에는 25만원 상당의 선물봉투가 쥐어졌다.
기자 50여명 중 촌지를 거절한 사람은 단 한명이다. 그는 조중동 기자도 아니고 한경대도 아니고... 젊은 미국계 외신기자 하나.
"회사 규정상 받을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조중동과 한경대가 규정이 없어서 받은 것은 아닐 것이다. 젊은 외신기자가 더 정의로와서 그런 것도 아닐 것이다. 조직에서 그 규정이 실행되는지 사문화되었는지의 차이일 뿐이다.
촌지거부가 사규의 문구수준을 떠나 실제로 조직의 문화로 체화되고 있는지, 그 조직문화가 구성원 개개인에게 내면화되어 실천으로 반영되고 있는지의 차이다.
그 차이를 결정짓는 것은 구성원 개인과 그가 속한 조직과 더 나아가 그 조직이 속한 사회의 윤리적 진화 수준이다. 이 가운데 더 지배적 변수는 상위 조직의 집단 윤리다.
촌지를 거부한 미국계 외신기자의 경우 아마 지금까지 기자회견을 갈 때 마다 "회사 규정상 받을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를 연발해야 했을 것이다. 한겨레기자도 처음에는 "규정상" 또는 "양심상" 촌지 거부를 서너 차례 했을 수 있겠다.
그러나 사회의 윤리수준이 개인윤리 보다 진화가 덜 되었을 때, 개인은 사회와의 관계에서 지속적인 마찰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게 되고, 이 마찰과 갈등 속에서 개인의 양심은 점차 마모될 수 밖에 없다.(하략)
이것이 몇년 전 이야기가 아니고 불과 며칠전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이런 인간들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렇게 폭로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김기덕감독의 성공시대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입니다. 네명의 건달이 이유도 없이 주유소를 털었습니다. 문제는 주인공이 경찰이 아니라 도둑이라는 점입니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지요? 어떻게든 영화를 끝을 내야 하는데 결말을 어떻게 짓죠?
경찰이 주인공이면 경찰이 도둑을 잡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도둑이 주인공이면? 보통의 경우 주인공들이 죽는 것으로 결말이 납니다. 근데 이래서는 해피엔딩이 안되므로 관객들이 외면합니다.
김상진감독과 콤비를 이룬 박정우작가의 방법은 이렇습니다. 일단 문제를 증폭시킵니다. 중국집 배달원 부대와, 조폭부대와, 경찰부대가 사건에 얽혀듭니다. 수백명이 한 장소에 모여 난투를 벌입니다.
적과 아군의 구분이 애매해 집니다. 그 다음은? 휘발유를 뿌려놓고 라이터를 들이댑니다. 한데 모아놓고 폭파시키는 겁니다. 그리고는 달아나는 거죠. 이미 적과 아군의 구분이 모호해 졌기 때문에 주인공이 도둑이라는 사실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주유소 습격사건', '라이터를 켜라', '광복절 특사', '신라의달밤‘이 모두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박정우작가가 충무로에서 최고로 잘나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된 것은 이 독특한 결말짓기 초식을 터득한 덕분입니다.
아쉬운 것은 박정우작가가 시나리오를 쓴 영화는 대부분 결말이 비슷하다는 거죠.
한 곳에 모아놓고 폭파시켜라
뜬금없이 영화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뭐냐.. 하고 의아해 하는 독자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이지 저는 5년여 전부터 김기덕감독을 지지하는 글을 써왔기 때문에.. 이 마당에 한마디 안하고 넘어가는 것도 이상하다고 봅니다.
영화가 소설이 진화한 것이냐 아니면 미술이 진화한 것이냐입니다. 소설이 진화해서 영화가 되었다고 보는 평론가는 대개 김기덕감독을 비난하고 그림이 진화해서 영화가 되었다고 믿는 평론가들은 김기덕감독을 지지합니다.
저는 그림 쪽에 더 비중을 두는 편입니다. 내러티브의 완결성 보다 비쥬얼의 신선함에 점수를 줍니다.(작품에 대해서는 이 정도만 하지요. 더 이야기 하면 넘 길어져서리)
‘왜 김기덕인가?’ .. 다 이야기 하려면 차라리 책을 한권 쓰는게 낫겠고.. 김감독의 변신이 화제가 되고 있네요. 안입던 양복을 입고, 안벗던 모자를 벗고 나타나는가 하면.. 임권택감독을 깎듯이 대접하고.. 기자회견에서도 반성하고 포용하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김기덕이 변한 것일까요? 아니라고 봅니다. 처음부터 예정된 수순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이 유리한 위치에서.. 편견을 가진 기자들에게 화해제스처를 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알면서 일부러 문제를 키워온 것입니다. 일종의 전략이죠. 이길 자신이 있다면 판돈은 많을수록 좋은것이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김감독이 얄팍한 수를 썼다는 말인가’ 하고 오해할 분도 있겠네요. 아닙니다. 그래서 제가 일부러 앞에서 지금도 여전한 기자들의 촌지수수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어떼처럼 물어뜯는 기자와 평론가들.. 왜 김감독이 그들에게 밉보였을까요? 위에서 말한 촌지사건을 참고하면 이해가 될듯 합니다. 그 80여명의 기자들 중에 제대로 된 인간은 단 한명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자들을 미워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기자들 개개인을 증오하는 방법으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습니다. 한 두명의 기자가 촌지를 받았다면 그 기자를 비난해야 하지만 모든 기자가 촌지를 받았다면 이건 다른 차원에서 접근해야 합니다.
김감독이 비상한 방법을 쓴 것이 그 때문입니다. 의도적으로 문제를 증폭시켜 벼랑끝 승부를 펼친거죠. 김감독의 작전이 보기 좋게 성공한 것입니다.
주유소습격사건의 박정우 작가가 조폭과 배달원과 경찰을 모두 한곳에 모아놓고 폭파시키는 방법을 썼듯이.. 김감독도 자신을 비난하는 여성주의자, 기자, 평론가, 그리고 단지 충무로에서 도제수업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식구로 받아들이지 않는 영화인들 까지 한곳에 모아놓고 베니스 영화제 감독상 연속수상의 폭탄을 던져버린 것입니다.
윤봉길 의사가 홍구공원에 던진 도시락 이후의 쾌거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의 전략도 비슷합니다. 조동일보, 수구세력, 한나라당, 자칭원로, 종교집단 까지 한곳에 모아놓고 보안법철폐의 폭탄을 던져버립니다. 이길 수 있는 승부라면? 판돈을 최대한 올리는 것이 좋습니다.
또한 수순이 있습니다. 김기덕감독이 모자를 벗고, 양복을 입고, 임권택감독에게 박수를 유도하고 또 기자들에게 반성의 의사를 밝히며 겸손을 보이는 것도.. 다 감독상을 수상하고 난 다음의 일입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광범위한 중도세력을 포용하는 것도 보안법철폐 이후의 일이 되어야 합니다.
덧글.. 물론 김감독도 많은 단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문제는 1프로의 황금과 99프로의 똥이 섞여 있다면, 99프로의 똥 때문에 1프로의 황금을 포기할 것인가입니다. 김감독도 문제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지지할 이유는 충분하다고 봅니다.
노하우21의 출범을 지켜보며
우리가 분열되고 있다면 우리가 지금 작은 골목길로 가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잘못입니다. 큰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끼리 분열할 이유가 없지요.
그러나 운명의 루비콘강을 건널 때는.. 작은 길로 가는 수 밖에 없습니다. 무엇인가? 우선순위의 판단입니다. 먼저 내부에 단단한 핵을 형성해야 합니다. 외연의 확대보다 개혁주체의 형성이 먼저입니다.
후단협.. 그들은 외연의 확대가 먼저라고 주장했지요. 틀렸습니다.
먼저 내부에 단단한 구심점이 형성되고서야 우리가 중심이 되어 좌파도 끌어안고 중도파도 포용하는 외연의 확대가 가능한 것입니다. 마지막에는? 모두 다 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수순은 바둑의 정석과도 같아서 반드시 지켜야만 합니다.
노하우21의 진행방향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습니다. 장단점을 분석합니다. 배우는 것도 많고 반성하는 것도 많습니다.
'여기서 웅성대지 말고 일군을 일으켜 동쪽으로 쳐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저의 논리입니다. 노하우21의 대문글에 적을 타격하는 글은 적고 우정을 나누는 글이 많다는 것이 서프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더 보폭을 넓혀가야 합니다. 양팔간격으로 더 거리를 벌려주어야 합니다. 노무현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서 우리끼리 웅성거리고만 있다면 결코 천하를 아우를 수 없습니다.
세상을 엎어먹으려면 선비도 있고, 광대도 있고, 장사치도 있고, 산포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주체는 적어도 헝그리 정신이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먹물 서림이 임꺽정보다 더 배웠다고 해서 먹물 서림이 청설골의 주체가 될 수는 절대로 없습니다.
공희준님과 지승호님은 저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우리의 주체가 분명하다면 이는 건강한 다양성의 표출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노무현정권의 본질이 무엇인가? 저는 계급성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다양한 세력을 아울러야 합니다. 그러나 수순이 있고 또한 각자의 역할이 있습니다. 이른바 중산층노빠들은 뒤에서 병풍을 쳐주는 역할을 맡는 것이 옳습니다.
잘난척 하는 먹물 좌파들은 서림이 역할입니다. 주연이 아니라 조연을 해야 합니다. 더 깊은 분노와 더 뜨거운 가슴을 가진, 더 젊고 더 배고픈 세력이 임꺽정이 되고 장길산이 되고 서프라이즈의 중추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판단입니다.
※ 한, 두명의 기자가 촌지를 받는 세상이라면 그 한 두명의 적을 타격하면 됩니다. 그러나 모든 기자가 촌지를 받는 세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우선순위를 판단하고 주체의 형성과 외연의 확대를 정밀하게 구분하는 고도의 전략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보안법철폐! 노무현 대통령의 승부수입니다. 외연의 확대 이전에 내부에 든든한 구심점을 형성하기 위한 고도의 전략입니다. 지금 우리는 소수로 몰려 있지만 보안법철폐로 우리가 승자임을 확인한 후에는.. 광범위한 중도세력까지 아우를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