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투리 이야기
최고의 교육은 그 모형을 타인과 공유하게 함으로써 이심전심 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그럴 때 타인의 능력이 곧 나의 능력으로 된다. 타인과 좋은 팀을 형성함으로써 집단 안에서 포지션을 얻고 능력을 발휘하게 한다. 이는 대인관계가 아니다. 말 한 마디 못해도 팀 안에서 자기 역할을 잘 소화할 수 있다. 가장 좋은 교육은 첫째 소수의 영재 자원을 뽑아 최고의 팀을 구성하게 하는 것이며, 둘째 그 팀이 이룬 성과를 재빨리 다수에게 전파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무리가 가는 방향성을 제시하는 뛰어난 리더가 있어야 한다. 리더를 선출하려면 대칭구조를 만들고 긴장을 불어넣어 저절로 질서가 형성되게 해야 한다. 혼돈스런 무질서의 장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질서를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려면 획일적인 질서를 강제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질서의 장을 연출해놓고 그 무질서를 스스로의 힘으로 해소하게 해야 한다. 좋은 팀의 구성과 그 성과의 전파는 주입식 교육이나 강제로는 결코 달성되지 않는다. 만약 그것이 되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후진국이 낮은 레벨의 목표를 세웠을 때다. 그 방법으로는 꼴찌를 중간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뿐이다. 팀 구성과 성과의 전파는 기승전결의 구조 안에서 각자 자기 포지션을 찾아가게 하는 방법으로 가능하다. 이를 위해서는 다양성의 존중이 절대적이다. 만약 획일화된 교육을 시킬 경우 포지션이 겹쳐서 서로 충돌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두 공격수만 되려고 하거나 혹은 다들 수비수만 맡으려고 하면 팀이 구성되지 않아 성과가 전파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이루어진 성과가 지방으로 전달되지 않고, 지방에서 이루어진 성과가 서울로 전파되지 않는다. 한국의 진보 지식인들이 보수적인 노동자 계급을 설득하지 못하는 이유는 역할을 나누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말로 떠드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소통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포지션으로 하는 것이다. 이는 지식인 집단이 스스로 다양성을 잃고 획일화 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식이 현장의 체험으로부터 유도되지 않고 강단에서 손쉽게 복제되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 가짜 지식이기 때문이다. 보수정당에 투표하는 노동자 계급을 탓할 일이 아니라 지식인 집단이 노동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다양성있는 팀 구성에 실패했음을 자인해야 한다. 한국의 미래는 오직 우리가 좋은 팀을 구성하고 공동체의 구성원 각자에게 포지션을 잘 분배하여 얻은 성과를 얼마나 잘 전파하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육현장에서 교육 에너지는 터무니없이 낭비되고 있다. 터무니없이 지출되는 학비부담과 너무 많은 학습시간에 비해 학습효과는 최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교육이 일정부분 기능하는 것은 무언가를 많이 가르쳐서도 아니고 잘 가르쳐서도 아니다. 한국사회가 본래 타인의 성공을 잘 전파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정보전달 속도, 의사결정 속도가 빠른 사회이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교육의 내용은 신통치 않지만 외적으로 교육의 형식은 상당부분 진보해 있기 때문이다. 이는 교육부가 잘해서가 아니라 유교주의 전통에 따라 사회전체가 유기적으로 잘 통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교육의 측면에서 한국은 세계 어느 나라에 비해서도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다. 기승전결 구조의 기(起)가 잘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승, 전, 결로 전개하면서 망가지고 만다. 그러므로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는다. 비유하면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는데 자동차이 성능이 나빠서 연료가 낭비되고 있는 격이다. 새로운 교육을 해야 한다. 그것은 최소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를 얻는 교육이다. 학생을 고생시키지 않고 성과를 이뤄내는 교육이다. 막연하게 학생의 머리 속에 주입하려 할 것이 아니라 학생집단 안에 좋은 팀을 형성하게 함으로써 한 사람의 성과가 나머지 전원에게 재빨리 전파되게 하는 것이다. 최고의 정보전달 속도, 의사결정 속도를 끌어낼 때 최고의 교육이 되는 것이며 이는 다양성을 존중하여 각자의 포지션을 잘 배분하게 함으로써 가능하다. 다른건 몰라도 발렌타인데이니, 화이트데이니, 블랙데이니, 빼빼로데이니 하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 저절로 일어나 순식간에 전국에 전파되어 모르는 사람이 없다. 그 게임들 안에 각자의 역할이 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인간의 두뇌는 민감하게 반응하여 최고의 효율을 끌어내게 된다. 이러한 정보전달 원리, 의사소통 원리, 의사결정 원리에 맞게 공동체의 구조를 세팅할 때 교육효과는 최고가 된다. 낮은 교육비와 적은 교육시간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성적을 끌어낸다. 한국의 대학진학률이 61퍼센트에 이르렀다. 일본의 46퍼센트보다 높고 독일의 34퍼센트보다 높다. 그들이 대학에 가서 과연 무엇을 배웠을까? 영어나 수학 따위를 배워서 제대로 써먹는 비율은 많아야 10프로에 불과하다. 전공분야의 지식을 써먹는 비율도 매우 낮다. 나머지 절대 다수는? 대개 전공과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이 비싼 등록금 내고 대학을 다녀서 얻은 것은? 그 중에 누구 하나라도 성공하면 그 성공을 자신에게로 가져올 수 있는 포지션이다. 이것이 교육의 진짜 목적이다. 누구 한 사람이 좋은 지혜를 얻어도 사회에 가로막는 장벽이 생겨나 그것이 다수에게 전파되지 않으면 그 교육은 죽은 교육이 된다. 교육의 본질은 공동체 안에서의 의사소통능력, 의사결정능력, 정보전달속도, 의사결정속도에 있으며 이는 머리 속에 무언가를 집어넣음으로써 달성되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 사이에 역할을 나누고 이심전심의 손발을 맞추는 데서 얻어진다. 이는 사교육 학원의 책상머리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운동장에서의 야구놀이에서 더 크게 얻어진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이전에 사회 전체의 질이 우수해야 한다는 점이다.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는 좋은 사회라면 설사 나쁜 교육을 한다해도 상당한 효과가 나게 되어 있다.
교육은 물과 같다. 물은 어떤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그 형체가 결정된다. 한국사회라는 그릇이 좋으냐 나쁘냐에 따라 교육효과는 상당부분 좌우된다. 어차피 인생에서 배울 것의 대부분은 학교에서가 아니라 학교 바깥의 사회에서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 최고의 공동체를 건설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교육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사회는 좋은 사회인가? 그 어느 나라보다 의사결정속도, 정보소통 속도가 빠르다는 점에서 좋은 사회가 될 자질은 우수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 |
전에 그냥 한 번 생각해 본 것인데...
한국 사람들 머리, 혹은 정신에 대해서...
좀 아닌 사람들 말고....
뭔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네요.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반드시 공부한 것과 상관없이...어느 정도는 사유할 줄 안다는 것인데...
이것이 민족성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조상 대대로 전승되어온 어떤 철학과 같은 것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오랜 시간 흘러온 시간들 속에서 종교적인 영향을 받아서 인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고,
그런데 거의 한 세대를 침략당해서 살다보니 그것이 많이 희석되어 버렸다는 느낌도 있었고, 잘 표현되지 않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었는데,
정확히 말하면 증조할아버지 세대에서 할아버지 세대까지는 그냥저냥 이어져 온 무언의 것들이 있었는데,
할아버지대에서 아버지대로 오면서 그것이 많이 희석되어 버렸으나....요즘은 조금씩 그런 것들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 드는데...( 이 기준은 나를 기준으로 하므로..아버지 세대라 함은 현재 거의 60대 후반에서 70에 근접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렇게 따지면 3대에 걸쳐서 서로에 대한 자학이 존재하고 있었고, 그 단절된 시간은 2대에 걸쳐 일어난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고 생각된 적이 있었네요. 그러다보니 한 세대를 시간적으로 잃었을 뿐인데 그 결과는 4대에 걸쳐 어떤 단절이 과속화 되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는데요. 그러므로 증조 할아버지세대의 어떤 무언의 것들이 현재의 나의 세대로 잘 전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할아버지 세대와 아버지 세대는 그 고리를 잠시 잃어버렸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것을 회복하는 과정이 어려웠던 것이고, 그 두세대들이 제대로 전승하지 못한 것들을 일부가 이어 내어야 하는 과정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요. 끊어진 곳에서 다시 어어야 다시 재생되는 것들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었네요.
그리고 사유할줄 안다는 것에 대해 정확히 말한다면, 윗 사람들이 아랫세대들에게 전승해줄 것이 있는 정신적인 그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 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한 것이 아랫세대인 우리에게 뭔가로 남겨져서 와야 되는데 솔직히 우리 윗 세대들에게 그런 것을 별로 느껴보지 못해서 아쉬운 점들 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윗 세대들도 전해주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은 합니다만은..요즘은 그러한 것이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이라고 생각은 됩니다만은...^^;
완전 최고~ 감사.
틈틈이 짬을 내서 열심히 섭취하고 있슴다.
멍청하게 아직도 대학을
공부하는 곳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아니죠.
대학은 원래 노는 곳이며 그냥 논문이나 한 번 써보고 오는 곳입니다.
고졸과 대졸 사이에는 굉장히 큰 벽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아버지가 가르쳐준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이 무학이고
동네 이장이나 새마을 지도자가 가르쳐준 기술로 먹고 사는 사람이 초졸이고
같은 도시 안에 상당한 기술자 만나서 먹고 사는 사람이 중졸이고
같은 나라 안에서 기술자 만나서 먹고 사는 사람이 고졸이고
같은 지구 안에서 기술자 만나서 먹고 사는 사람이 대졸이고
그 최고의 기술을 만드는 사람은 박사급들이죠.
우리나라 농민들이 가난한 이유는 신기술을 절대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입니다.
그냥 몰라서 안 하는게 아니고 안 배우려고 매우 저항합니다.
제가 경험한 것인데 원래 소를 사육할 때는 사료를 줄 때 물을 섞으면 안 되거든요.
그런데 아무리 물 섞지 말라고 아는 사람이 말해줘도
사료에 물 안 섞으면 목이 메어 사료가 넘어가나 하고
물을 타서 소가 설사하게 만들어요.
즉 애초에 신기술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저항하는 겁니다.
이런 마음의 장벽이 있어요.
근데 무학도 아버지가 말하면 말 듣습니다.
초졸은 동네 어른 말은 듣고, 중졸은 도시 안에서 높은 사람 말은 듣고
고졸은 나라 안에서 하는 말은 듣고 대졸은 나라 밖에서도 듣습니다.
후진국이 가난한 이유는 몰라서 그런게 아니고 적극적으로 모르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의사결정의 법칙이고 다 설명하려면 길어지죠.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타인 말을 듣는 이유는 거기에 대항수단이 있을 때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대항수단이 없으면 공자말씀이라도 절대 안 듣는다는 거죠.
초중고졸은 대항수단이 없으므로 상대방에게 종속될까바 맞는 말도 악착같이 안듣습니다.
대항수단이 생기거나 혹은 이너서클에 들거나 해서 같은 동아리로 묶여야 말 듣습니다.
노동자들이 오히려 진보지식인 말을 안듣고 보수꼴통 말을 듣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상대방을 제압할 수단이 없으면 상대방이 부처님 말씀을 해도 외면한다 이게 진리.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가르침을 베풀 때는 상대방이 나를 제압할 수단도 같이 줘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대학교육의 의미는 신기술이 나왔는데 그걸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느냐죠.
그 자세를 배우려고 대학다니는 거지 지식을 배우는게 아닙니다.
수박을 키울 때는 두 덩이만 남기고
나머지는 순을 잘라버려야 제값을 받을 수 있는데
두 덩이만 키우면 5만원에 백화점 납품할 것을
그냥 나는 대로 다 키워서 한 덩이에 천원받고 떨이하는 겁니다.
이거 절대 해결 안 됩니다.
초졸과 중졸 고졸 대졸 사이에는 굉장히 큰 심리적 장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공부를 하든 못하든 일단 대학은 가야하는 그런게 있어요.
반대로 신지식을 받아들일 열린 마음의 자세만 되어 있다면 대학은 필요없는 겁니다.
그렇군요.^^
교육은 대학교육이든 삶의 스타일을 전수받든...동기부여라고 생각됩니다.
시작에서 어떤 동기부여를 줄 수 있는가? 혹은 방향찾기에서 삶의 스타일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가?
어렸을 적 지금보다 순진할 때에 왜 사람들이 진실에 귀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외면하거나 무심하게 살까 하고 무척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경험적으로 그런 경향을 인식하고 있을 뿐 정확한 매커니즘은 아직도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김동렬님의 글을 보니 사람은 가치판단만으로도 마음이 움직이고 행동이 바뀌는 소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특히 대중은 그보다도 마음의 소통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확실히 인간은 지적인 존재이지만, 그 보다도 영적인 존재라는 표현이 속성을 보다 정확히 표현한 듯 싶네요.
21세기 교육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