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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9]SimplyRed
read 3519 vote 0 2024.10.27 (18:15:05)

사람이 살아간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말이 더 정확한 문장이라 생각한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다가 결국 죽는 것은 과학, 인류사를 들이댈 필요도 없이 자명한 그 누구도 피해갈 수도, 피해가지도 못할 100%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또 우리는 한번도 죽음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2024년, 지구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 중, 죽음을 경험한 이는 없다. 이 것도 100% 확신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경험해보지도 않은 불확실한 죽음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고,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죽음에 대한 생각은 예외처리해버리기로 한다. 죽지 않을 것처럼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즐겁지도 않은 행사에 참여하고, 해도 좋고 안해도 그만인 일들도 열심히 하며 살아가게 된다. 이 것이 해서는 안될 시간낭비라거나 가치가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분명 그 것은 가치가 있다.
 
단지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중요한 것은 보류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사회의 바깥을 경험해보지도 못한 채, 사회의 압박에 따라 그 싸이클에만 갇혀 인생의 대부분을 소모하고야 만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대부분의 생각과 다르게 우리가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것은 기정사실이니까. 모래시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떨어지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 죽음에 대한 예외처리를 해제할 때, 우리는 보류해왔던 제일 먼저 해결해야 될 것을 명확하게 떠올리게 된다.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 깊은 부분의 결정을 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은 미루고 미룬 이 죽음을 과연 두려워 하는 것일까? 조지 오웰은 「카탈로니아 찬가」에서 스페인의 반혁명 파시스트군이 포를 발사하는 것을 보고서는 자신이 맞을 수도 있고, 자신의 동료들이 맞아 죽을 수도 있지만 발사된 포를 보고 명중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추운 겨울에 경계근무를 서면서 잠도 많이 못자고, 먹을 것도 부족하고, 씻지도 못하는 상황에 그 곳에 있는 누구나 전선에 가고 싶어 좀이 쑤셔했다고 기록했다. 또 새벽에 매우 불편하게 이동하면서 작전을 진행할 때, 빨리 적을 만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도 하고.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주인공 레빈이 이념 및 사고방식은 많이 다르지만 좋아했던 형 니콜라이의 임종을 앞두고, 생각대로 죽음이 찾아오지 않아 꽤나 고생했던 장면을 보여준다. 살면서 누구나 비슷한 경험을 하는 지점이다. 보통의 경우, 인간이 살아가면서 누구나 부모님의 임종을 먼저 경험하니까.
 
이 임종의 장면에서 인간의 생명이 그렇게 쉬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생을 다하지 않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여러 너절한 꼴도 보이면서, 생의 한 순간에 만난 것과 작별을 아쉬워 하기도 하면서, 또 기운을 차리는 듯 싶더니 다시 고비가 찾아오기도 하면서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이별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순간에 놓이면 누구나 임종을 겪는 이가 오래 살았으면 하지만, 반대로 그게 안되는 상황이 명확해 빨리 숨이 멎기를 바라게 된다. 그것만을 기다리게 된다. 임종을 겪는 이도 마찬가지다. 생각대로 숨이 멎지 않는 자신을 다그친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죽음이 확정되면 담담하게 겪어낸다. 마치 출생의 순간과도 비슷하다. 인간은 죽음을 무서워한다기보다는, 헛되이 죽는 것을 두려워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예외처리할 만한 게 아니다. 두려운 일도 아니고, 어차피 경험해보지 못할 일이다.

인간은 무언가 막혀있는 도랑이 있으면 기어코 그 것을 뚫는 존재다. 죽음이 정말로 두려웠다면 세상은 변화하지 않는 디스토피아다. 길이 하나로 좁혀졌고, 뚫고 나아가야 한다면 설령 그 길의 결과가 죽음이라도 인간은 그 길을 간다. 대한민국의 3.1.운동, 4.19혁명, 5.18.광주민주화운동이 그러했다.

인간은 의사결정의 난맥상을 타파하는 존재다.
자연이 그러하고, 인간 또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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