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이재오, 용서가 안된다. 사형을 해서 안되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형제도는 아래 네가지 측면에서 사회가 범죄자에게 굴복한 셈으로 된다.
 
첫째는 사회의 책임이다. 범죄자는 자신의 실패가 사회의 탓이라고 변명한다. 스웨덴이나 노르웨이에서 태어났다면 선량한 시민으로 잘 살고 있을 것인데, 재수없게도 후진 한국에 태어나서 범죄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고 항변한다.
 
이러한 범죄자의 논리에 대항하는 길은 하나 뿐이다. 범죄를 줄이는 것이다.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도 얼마든지 잘 살수 있음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것이 공동체 대한민국의 일차적인 도전목표가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둘째는 정치화의 논리다. 전시상황과 같은 불가항력적 상황에서의 살인은 무죄가 된다. 내가 먼저 적을 쏘지 않으면 적이 나를 쏠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정당방위다.  
 
정치범은 사형시킬 수 없다. 정치상황이 일종의 정당방위가 될수있기 때문이다. 범죄자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 전쟁과 유사한 성격의 것이며, 따라서 자신은 전쟁포로와 같은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사형제도가 이러한 범죄자의 논리를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사회는 범죄자를 적(敵)으로 규정하는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범죄자는 적이므로 죽여도 된다. 마찬가지로 범죄자도 사회를 적으로 규정한다.
 
사회가 먼저 자신에게 적대행동을 했으므로, 자신에게 사회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천만에!
 
범죄자는 적이 아니라 사회부적응자이며 교정대상이다. 범죄는 일종의 질병과 같은 것이며 치료되어야 한다. 사형은 교정의 포기이자 치료의 포기다. 교정의 포기는 적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회부적응자들을 적(敵)으로 우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유영철과 같은 살인마를 적(敵)으로 대접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치료되어야 할 환자일 뿐이다. 현재의 의료기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중증의 환자이기는 하지만. 그는 사형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무시’되어야 한다.
 
세째 살인은 간접자살이다. 타인에 대한 살인은 일종의 정신적인 자살과도 같다. 타인을 살해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의미는 전적으로 부정된다. 사회 앞에서 인격적으로 몰가치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살인이란 무엇인가? 범죄자가 자신의 인격을 살해하면서.. 동시에 자신을 그러한 상황으로 몰고간 사회에 복수하는 방식이다. 속된 말로 ‘너죽고 나죽자’ 이거다. 우리는 그러한 범죄자의 인격적 자살을 도울 필요가 없다.
 
네째 물귀신의 논리다. 사형은 무고한 사람을 살인자로 만든다. 사형수를 저 세상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손에 피를 묻혀야만 하는 것이다.
 
사형을 구형한 검사, 사형을 판결한 판사, 사형의 여론을 조성한 언론, 그리고 형을 집행한 교도관이 모두 간접살인에 가담하게 된다. 특히 살인자에게 무죄추정의 가능성이 있을 때 물귀신의 논리가 극적인 효과를 이끌어낸다.
 
살인자는 끝끝내 자신의 범죄를 인정하지 않는 방법으로.. 그의 사형집행에 관여한 모든 사람의 양심을 자극하는 형태로 심리적인 복수를 꾀하는 것이다.
 
우리는 범죄자의 이러한 의도에 말려들 필요가 없다. 살인자가 끝끝내 살아서 이 사회의 성공을 지켜보게 만드는 방법으로 그들을 심리적으로 패배시켜야 한다.
 
사회의 목표는 사회화에 있다. 원래 인간들은 들판에 흩어져 야만하였다. 그들은 서로 관계를 맺지 않고 있었다. 관계를 맺지 않으므로 ‘대전제’가 성립하지 않아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은 무의미한 형편이었다.
 
인간들이 서로 만나 관계를 맺으므로써 ‘공동선’이라는 대전제가 성립하게 된 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이 이로부터 생겨나고.. 이러한 가치추구의 결과로 문명이 이루어졌다. 문명이 인류를 교화하니 사회가 성립하였다.
 
공동체의 목표는 사회의 공동선이라는 대전제 앞에서 그들을 ‘들판의 적’이 아닌 ‘우리편’으로 만드는 것이다.
 
요는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이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가치있는 일인가? 관계를 맺으므로써 서로에게 이익이라는 상승효과가 얻어지는 것이 곧 옳음이다. 무엇이 그른가? 관계를 깨뜨리므로써 서로에게 손실을 주는 상쇄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곧 그름이다.
 
살인자의 논리가 정당화 되는 경우는 하나 뿐이다. 관계를 단절하는 방법으로 사회를 공동체의 '우리'가 아닌 들판의 적(敵)으로 돌리는 것이다. 사형제도는 그들의 논리를 정당화시키는 즉 우리의 패배가 된다.
 
우리는 살인자를 적이 아닌 사회부적응자로 규정하여야 한다. 그들에 대한 교화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으로 그들을 패배시켜야 한다. 사회가 그들의 적이 아니게 만드는 방법으로 그들이 사회를 공격할 이유를 없애야 한다.
 
무엇이 전략인가? 가장 어려워 보이는.. 그러나 실제로는 별로 어렵지도 않은 문제를 먼저 해결하므로써 다른 많은 문제들이 만만한 문제로 보여지도록 하기. 이것이 전략이다.
 
사형제도의 폐지야 말로 손쉬운 전략적 목표가 될수 있다. 조중동의 반대를 무릎쓰고 법안을 통과시키기만 하면 된다. 이 방법으로 적들에게 심리적 타격을 준 후에라야 다른 문제도 술술 풀리는 것이다. 기선제압의 의미다.
 
귀차니즘을 극복해야 한다. 일이 꼬이는 이유는.. 이 사회 안에 많은 ‘주체적인 개인’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일일이 그들을 설득하는 방법으로 공동체의 성원 다수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까닭이다.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다.  
 
무엇이 파시즘인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극단적인 실용주의, 억울하면 니가 참으라는 강짜의 논리,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해야 한다는 편의주의 논리. 절차를 무시하는 방법으로 주체적인 개인들의 존재이유를 말살하는 그것이 다 파시즘이다.
 
바른길 두고 모로 서울가지 말아야 한다. 억울한 소수가 참지 말아야 한다. 절차가 까다롭더라도 공동체의 성원 다수의 동의를 구해야 한다. ‘주체적인 개인’들의 존재를 시끌벅적하게 드러내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대 왜 사는가? 공동체의 이상을 잃어버린 삶, 가치지향을 잃어버린 삶이라면.. 살아는 있으되 뇌사자의 그것과 다름이 없는 삶이라 할 것이다.
 
심장박동기와 인공호흡에 의존한 정신적 뇌사상태의 향기없는 삶이라면.. 자발적 호흡이 없는 삶이라면.. 울림과 떨림이 없는 황폐한 삶이라면 정녕 그것이 삶일 수 있을까?
 
살아있다면 마땅히 향기를 뿜어보임으로서 ‘생기(生氣)’를 입증해야 한다. 내적인 치열함을 입증해야 한다. 싱그러움과 발랄함을 아낌없이 보이어야 한다. 주체적인 개인들의 떠들썩함을 드러내어야 한다.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이며 우리의 목표는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있다. 오늘 우리의 목표 하나를 확인하고.. 또 이를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해결해 나가는데서 보람을 느낀다면 어찌 이 삶이 즐겁지 않겠는가?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1170 공희준 대 유시민 김동렬 2004-07-21 14647
»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 김동렬 2004-07-19 15000
1168 제헌절유감 김동렬 2004-07-17 15333
1167 박정희의 개 이재오 image 김동렬 2004-07-16 15363
1166 박근혜가 사는 법 김동렬 2004-07-15 13887
1165 서프의 경쟁력은 창의력에 있다 김동렬 2004-07-13 14777
1164 서프라이즈가 가야 하는 길 김동렬 2004-07-09 13286
1163 조선일보, 서프의 비듬을 털어먹다 김동렬 2004-07-08 13768
1162 김정일, 찬스는 지금이다 김동렬 2004-07-07 13435
1161 장길산과 서프라이즈 김동렬 2004-07-05 14298
1160 YS를 감방에 보내야 한다 image 김동렬 2004-07-05 13886
1159 유시민의 까놓고 말하기 김동렬 2004-07-03 14700
1158 서프, 어디로 가는가? 김동렬 2004-07-02 13191
1157 전여옥, 나도 고소하라 김동렬 2004-07-01 13617
1156 개각의 승자는 노무현대통령 김동렬 2004-06-30 14877
1155 우리당을 매우 쳐라? 김동렬 2004-06-30 13801
1154 이라크전 묻고 답하기 김동렬 2004-06-25 13198
1153 서프는 당당하게 나아간다 김동렬 2004-06-24 13697
1152 누가 미쳤는가? 김동렬 2004-06-23 14056
1151 노무현 대통령께 묻는다 김동렬 2004-06-23 15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