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이 도무지 생각을 안 한다. 생각은 복제한다. 복제하려면 원본과 복제본을 연결하는 고리가 있어야 한다. 그것을 만든 사람이 석가다. 이것이 일어나면 저것이 일어난다. 연기법이 고리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어도 석가가 생각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플라톤도 생각을 했다. 동굴의 비유다. 빛이 그림자를 만든다. 빛이 원본이고 그림자는 복제본이다. 연결고리가 있다. 지난 2천 년간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화이트 헤드의 말이다. 사실이다. 플라톤 외에는 뇌를 사용하여 생각한 서양인이 없다. 한국철학은 원효 화쟁론의 각주에 불과하다. 주자의 성리학은 불교를 베낀 것이다. 공자의 가르침은 배우는 자세다. 배움의 내용은 없다. 불교를 베껴 유교에 없는 형이상학을 만든게 성리학이다. 율곡과 화담의 일원론에 원효의 화쟁론이 스며있음은 물론이다. 퇴계는 그냥 주자를 번역했을 뿐 뇌를 사용한 증거가 없다. 이것과 저것의 연결고리가 없다. 헤겔의 정반합은 정과 반이 피 터지게 싸운다. 원효의 화쟁은 형제가 싸워봤자 엄마의 품을 벗어나지 못하듯이 정과 반이 싸워봤자 그럴수록 합의 한뿌리임이 확인된다. 원효에게 있고 석가에게 있고 플라톤에게 있는 것은 이것과 저것의 연결고리다. 이것에서 어떻게 저것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자기 방식으로 이것을 말한 사람은 적어도 생각을 한 것이다. 원효, 석가, 플라톤 외에 자신의 뇌를 사용하여 생각을 한 사람은 없다. 생각을 하려면 엔진이 있어야 한다. 검색을 해도 엔진이 필요하고 인공지능도 엔진을 쓴다. 엔진도 없이, 알고리즘도 없이 그냥 떠드는 말은 생각이 아니고 반응이다. 문제가 있으니까 답을 내는 것은 문제의 압박에 반응한 거지 엔진을 사용해 생각한게 아니다. 엔진은 두 가지다. 자력엔진과 타력엔진이다. 자력엔진이 진짜다. 타력엔진은 능동적 복제가 아니라 수동적 반응이다. 힘을 얻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어떤 둘을 연계하여 자체 관성력을 얻는 방법과 상대의 움직임을 방해하여 반작용의 힘을 얻는 방법이다. 힘을 얻는 방법이 다르면 이후 가는 길이 완전히 달라진다. 에너지가 한 번 방향을 정하면 중간에 방향을 바꿀 수 없다.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생각엔진은 원효엔진, 석가엔진, 플라톤엔진 셋뿐이다. 나머지는 엔진 없이 바퀴만 가지고 붙어가는 객차들이다. 석가 연기론 - 이것과 저것이 연결되어 세상은 이루어졌다. 플라톤 이원론 - 이것과 저것이 별도로 살림을 차려 분가했다. 원효 일원론 - 이것과 저것은 한 어미에게서 난 형제다. 중관학파의 부정적 사고와 유식학파의 긍정적 사고를 통일하는 원효의 일심사상은 헤겔 정반합과 비슷하면서 방향이 완전히 반대라는 점이 흥미롭다. 중관(반)+유식(정)=일심(합)이 아니고 반대로 일심일원론에서 중관의 부정주의와 유식의 긍정주의가 갈라진다. 중관의 부정주의 - 헛되고 헛되고 헛되노니 마음을 비워라. 내려놓아라. 유식의 긍정주의 - 일체유심조라 뭐든 마음먹은 대로 되느니라. 마음을 먹어라. 원효의 일심주의 - 마음을 먹든 비우든 마음이 뿌리이니 마음에 달렸다. 사찰 입구에는 불이문이 있다. 2가 아니다. 진리는 1이다. 중관파의 1은 부정이다. 부정해야 공에 이른다. 유식파는 1은 긍정이다. 공은 무한긍정이다. 원효의 1은 긍정과 부정의 합이다. 심은 긍정과 부정을 포괄한다. 그런데 구조론의 답은 선 부정 후 긍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