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923 vote 0 2024.01.07 (15:05:00)

    유튜브 방송준비 텍스트입니다.


    아이디어


    구조론은 인류 최고의 아이디어다. 지금까지 인류의 성과를 49로 만들고 나머지 51을 구조론이 가져 간다. 인류는 지금껏 존재의 절반만 보아온 것이다. 존재의 머리와 꼬리 중에서 꼬리만 보고 떠들어댄 것이다.


    세상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무엇이든 그것은 단위다. 단위는 두 가지가 있다. 내부 결정단위와 외부 전달단위다. 에너지가 안에서 결정한 것을 물질이 외부에 전달한다. 메커니즘은 결정하고 원자는 전달한다.


    파인만은 말했다. 인류가 절멸의 위기에 처해 단 하나의 지식만 후대에 남겨줄 수 있다면 그 하나의 지식은 원자론이어야 한다고. 그러나 원자는 결정자가 아니고 전달자다. 쏘는 활이 아니고 날아가는 화살이다.


    유혹


    우주를 다 가진 사람은 행복하다. 그 행복은 과학자에게만 주어져 있다. 돈을 벌고, 명성을 얻고, 권력을 쥐고, 미인과 사귀면 만족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동물적 본능의 충족에 불과하다. 외부 환경의 자극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정신병자의 행복과 같다. 의미없다. 인간의 욕망은 대개 콤플렉스에 따른 보상심리다. 타인에게 인정받고 무리와 결속하려는 것이다. 불쌍하다. 인간의 자유의지는 외부의 힘을 끌어들이는 능력이다.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목마름은 욕구의 충족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내게로 무언가를 가져오는 방법으로는 영혼의 허기를 달랠 수 없다. 불을 켜야 답답증이 내려간다. 앞길이 밝아져야 한 걸음을 더 전진할 수 있다. 내가 외부로 확장되어야 한다. 진정한 기쁨은 그곳에 있다.


    지구를 모르면 지구를 가질 수 없다. 진리를 모르면 우주를 가질 수 없다. 존재할 수도 없다. 그 존재는 무너진 반쪽짜리 존재다. 자유가 없으면 노예다. 문명이 없으면 짐승이다. 진보가 없으면 퇴물이다. 운전하지 못하는 차는 고장난 차와 다르지 않다.


    어떤 어부는 사람을 낚는 기술을 알려준다는 말에 홀려서 따라갔다고 한다. 우주를 갖는 기술에 낚이는 사람도 하나 쯤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삭막하다. 그 행성은 유혹적이지 않다. 신이 사용하는 기술을 인간이 사용할 때 완전해진다


    과학


    구조론은 에너지의 과학이다. 에너지energy는 안에서 일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밖에서 모른다. 모를 뿐만 아니라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인류의 모든 희극과 비극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


    닫힌계 안에는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있다. 안에는 저울이 있고 밖으로는 지렛대가 작용한다. 에너지가 안에서 결정한 것을 물질이 밖으로 전달하면 우리가 그것을 본다. 우리는 내부를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보려고 하므로 보지 못한다. 하려고 해야 내부의 메커니즘이 보인다. 삽질을 해도 팔과 삽이 연결되어 저울을 이루면 삽을 지렛대로 삼아 흙을 퍼낸다.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의사결정 메커니즘이 작동한다.


    저울은 크고 지렛대는 작다. 전체는 크고 부분은 작다. 어미는 크고 새끼는 작다. 원인은 크고 결과는 작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큰 것이 안에서 먼저 결정하고 작은 것이 나중 밖으로 전달한다.


    우리는 내부 결정자와 외부 전달자의 차이를 모른다. 머리와 꼬리의 대칭에 낚여 에너지의 방향성을 모른다. 차이를 만드는 차원을 모른다. 머리에서 꼬리의 일방향으로 가는 비대칭성을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저울


    구조론은 쉽다. '1+1=2'보다 쉽다. '1+1=2'를 셈하려면 손가락을 꼽아야 한다. 구조론은 그냥 보면 된다. 메커니즘은 머리와 꼬리가 있으며 머리는 꼬리보다 크다. 원인은 결과보다 크다. 전제는 진술보다 크다. 결정하는 것은 전달하는 것보다 크다. 저울은 지렛대보다 크다. 그 차이는 보인다.


    기관차는 객차보다 크다. 낳는 것은 낳아지는 것보다 크다. 어미는 새끼보다 크다. 전체는 부분보다 크다. 팔뚝은 손목보다 굵다. 허벅지는 종아리보다 크다. 입력은 출력보다 크다. 입구는 출구보다 크다. 입이 항문보다 크다. 깔때기가 그렇다. 그라운드가 골대보다 넓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가?


    필드는 넓고 홀컵은 좁다. 트랙은 넓고 결승선은 좁다. 낮에는 넓은 곳에서 일하고 밤에는 좁은 침대에서 잔다. 인생은 넓고 무덤은 좁다. 언제나 큰 데서 작은 데로 간다. 놀랍게도 아무도 이 차이에 주목하지 않았다. 깔때기 입구가 출구보다 좁은 것은 이유가 있다. 저울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의사결정구조 내부에는 그것을 결정하는 저울이 숨어 있고 저울은 대칭이며 짝수로 되어 있다. 모든 전달하는 것은 지렛대로 되어 있으며 그것은 비대칭이며 홀수가 된다. 우주는 짝수가 결정하고 홀수가 전달한다. 원자론은 전달자 홀수를 보고 양자역학은 결정하는 짝수에 주목한다.


    구조는 이해하는게 아니다. 그냥 보는 것이다. 물레방아는 결정하는 물레와 전달하는 방아로 되어 있다. 활은 결정하는 활몸과 전달하는 화살로 되어 있다. 자동차는 결정하는 엔진과 전달하는 바퀴로 되어 있다. 인간은 결정하는 머리와 전달하는 몸통으로 되어 있다. 이것이 보이지 않는가?


    단서


    존재가 아니라 부재가 문제다. 부재를 느껴야 한다. 이 문명은 결함 있는 문명이다. 무언가 중요한 하나가 빠져 있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다. 일곱살 때 그것을 느꼈다. 각인이 되었는지 꿈에 나왔다. 같은 꿈을 반복적으로 꾸면 예지몽처럼 작용한다. 단서를 찾으려고 했다.


    아홉살 때 언어에서 그것을 봤다. 사람들이 언어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전제가 진술보다 크다. 거기에 방향성이 있다. 어떤 둘을 연결하는 존재의 메커니즘이 포착된다. 왜 아무도 그것을 말하지 않지?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다. 인류는 죄다 벌거숭이라는 사실을 내게 들켰다.


    열살 때 자석실험에서 메커니즘을 알았다. 학이 왜 한쪽 다리로 서는가 하는 물음에서 에너지의 방향성을 알았다. 린네의 생물 분류를 배우고 질, 입자, 힘, 운동, 량의 힌트를 얻었다. 제논의 궤변을 배우고 닫힌계 개념을 생각했다. 스물네살 때 존재론과 인식론으로 정리했다.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을 수 없다. 큰 것이 작은 것에 앞선다. 큰 것이 머리고 작은 것이 꼬리다. 머리가 꼬리를 결정한다. 그것이 이기는 힘이다. 저울이 지렛대를 이긴다. 그것이 권력이다. 계의 통제가능성이다. 곧 의사결정권이다. 정보의 대칭성과 에너지의 비대칭성이다.


     구조


    구조는 질, 입자, 힘, 운동, 량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저울과 지렛대다. 저울은 가운데 한 점에 힘을 모은다. 천칭저울과 같다. 저울의 팔은 지렛대다. 이는 대저울과 같다. 구조는 힘을 모았다가 다시 그 힘을 내보낸다. 그 과정에 힘의 진행방향을 결정한다.


    인체의 팔은 팔꿈치를 중심으로 상완과 하완이 저울을 이루었다. 힘은 상완에서 하완으로 가지 그 반대로는 가지 않는다. 사실이지 우주 안의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비대칭이다. 에너지는 언제나 앞에서 뒤로 가고, 위에서 아래로만 가는 일방향성이 있다.


    겉보기로는 대칭으로 보인다. 하완에서 상완으로도 가는 것처럼 보인다. 물체를 들어보자. 물체의 힘이 팔로 전달된다. 10킬로 물체를 들면 10의 힘이 팔에 전달된다. 근육이 움직여 팔에서 손으로 10의 힘을 보낸다. 20의 힘을 보내면 에너지 낭비가 된다.


   5의 힘을 보내면 물체를 놓친다. 10의 물체를 들려면 10에 가까우면서도 살짝 넘쳐야 한다. 딱 10을 보내면 교착된다. 10을 통제하려면 11을 내보내야 한다. 이겨서 물체를 통제해야 한다. 그 남는 여유분이 이기는 힘이다. 그 힘은 엔트로피 증가로 잃는다.


    오류는 존재론과 인식론의 착오다. 존재론은 팔이 손에 내려보내는 힘이고 인식론은 손이 팔에 요청하는 힘이다. 에너지의 방향이 충돌한다. 팔은 힘을 조금씩 줄이며 마이너스로 조절하고 손은 조금씩 힘을 늘리면서 플러스로 요청한다. 헷갈리는 이유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6643 권력자의 심리 김동렬 2024-01-25 5587
6642 석가의 깨달음 김동렬 2024-01-25 4539
6641 이언주의 귀환 김동렬 2024-01-23 5986
6640 시정잡배 윤한 1 김동렬 2024-01-23 5630
6639 윤영조와 한사도 김동렬 2024-01-22 3923
6638 클린스만은 손절하자 김동렬 2024-01-21 5673
6637 입력과 출력 김동렬 2024-01-20 2734
6636 마리 앙투아네트 김건희 김동렬 2024-01-20 4315
6635 한동훈의 까불이 정치 1 김동렬 2024-01-19 5927
6634 긍정적 사고 김동렬 2024-01-17 3892
6633 한동훈의 본질 김동렬 2024-01-15 5346
6632 존재의 핸들 김동렬 2024-01-14 5747
6631 이론적 확신의 힘 김동렬 2024-01-13 5729
6630 오마이 한겨레 경향의 배신 이유 1 김동렬 2024-01-12 5367
6629 최동훈 영화는 영화가 아니다. 김동렬 2024-01-11 5576
6628 읍참건희, 석열 동훈 비밀의 비밀 김동렬 2024-01-10 5130
6627 개식용금지법 통과 잘했다. 2 김동렬 2024-01-09 5255
6626 한동훈 일당의 아동학대 범죄 김동렬 2024-01-09 4505
6625 출산거부의 진실 김동렬 2024-01-08 5359
6624 한동훈의 신고식 김동렬 2024-01-08 5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