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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728 vote 1 2023.10.18 (18:54:47)

    언어는 의미가 있다. 의미는 연결한다. 단어를 연결하고, 문장을 연결하고, 사건을 연결한다. 혼자 연결할 수 없다. 상대가 호응해 줘야 한다. 내가 연결하는 것은 의미다. 상대가 호응해 주는 것은 권력이다. 혼자 연결하는 것은 의미다. 함께 연결하는 것은 권력이다. 


    중심부는 혼자 연결한다. 문익점이 목화씨 숨겨오듯 혼자 해결한다. 세종이 한글 만들듯이 혼자 창의한다. 말단부는 상대와 함께한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해도 신하들이 반대하면 곤란하다. 세종의 권력 덕에 보존되었다. 의미와 권력은 중심부냐 주변부냐의 차이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한다. 잘 안된다. 주변의 협조가 필요해진다. 그러므로 권력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하는 것은 의미다. 권력은 의미를 추구하다 보면 따라오는 것이다. 권력은 의미에 필요한 도구다. 권력을 얻으면 더 쉽게 의미를 얻는다.
   

    수도꼭지를 틀어막으면 수압이 강해진다. 2를 1로 줄이는게 힘이다. 공간을 줄였더니 압력이 강해졌다. 선택지를 줄이면 권력이 강해진다. 나무의 가지 쪽으로 가면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줄기 쪽으로 옮겨가면 선택의 폭이 좁아진다. 나무의 줄기 쪽에 권력이 있다.


    벽을 등지면 걱정이 없다. 두 방향에서 오던 적이 한 방향으로 좁혀졌기 때문이다. 공간을 좁히는 것이 힘이다. 신은 힘이다. 신은 내 역할을 좁힌다. 많은 가능성을 버리고 하나를 남긴다. 여러 가지 우연을 버리고 한 가지 필연을 남긴다. 꼬리를 버리고 머리에 산다.


    신의 부정은 연결부정이자 의미부정이자 권력부정이며 자기부정이다. 집단과 개인의 연결을 부정하고 현재와 미래의 연결을 부정한다. 머리와 꼬리의 연결을 부정한다. 나를 여기까지 이르게 한 것은 등 뒤의 벽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은 나의 눈 앞에 펼쳐져 있다. 


    내가 이곳에 도달한 것은 우연히 이리로 흘러든 것이 아니라 필연의 힘에 등을 떠밀려 온 것임을 알아야 한다. 부단히 선택지를 꺾은 결과다. 나의 권력을 만드는 과정에 더 큰 권력에 의지한 것이다. 내가 벽을 등지고 서듯이 누군가의 벽이 되는 결정을 해야 한다.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우연은 부분이다. 여기서 관점의 문제가 제기된다. 전체가 아니면 부분이다. 의미를 보는 사람은 합쳐서 사건 전체를 보는 사람이고, 우연을 보는 사람은 잘게 쪼개서 작은 부분을 보는 사람이다. 나무의 가지 끝에 선 것이다. 왜 거기로 가지?


    의미냐 허무냐, 필연이냐 우연이냐는 존재의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관점의 문제다. 그것은 무대가 아니라 배역이다. 의미를 보는 사람은 자신을 주인공으로 규정한 사람이며 허무를 보는 사람은 자신을 엑스트라로 규정한 사람이다. 왜냐하면 엑스트라니까.


    필연의 의미 - 인류 중에 한 사람이 한 것은 내가 한 것과 같다. 전체를 본다.

    우연의 허무 - 뭐든 내가 직접 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부분을 본다.


    전체와 부분이 있다. 원인과 결과가 있다. 머리와 꼬리가 있다. 전체를 보고 원인을 보고 머리를 보면 의미가 있는 필연이고 반대로 부분을 보고 결과를 보고 꼬리를 보면 허무한 우연이다. 그런 식이라면 내가 먹어도 혓바닥이 먹은 것이고 뇌는 통보를 받았을 뿐이다.


    금메달을 따도 내 목이 한 번 걸어본 것이고 우승반지를 끼어도 내 손가락이 한 번 끼워본 것이다. 나와 상관없다.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똥이 될 뿐이다. 사랑의 기쁨? 화학적 전기신호일 뿐이다. 인생이 허무하다는 말은 내가 허무한 부분에 집착한다는 자기소개다.


    왜 허무한가? 내가 직접 하는게 아니라 내가 위임한 대표자에 의해 간접으로 하기 때문이다. 내가 파견한 대표자가 느끼는 기쁨이 내게 전달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 감각이 둔하기 때문이다. 결국 허무하다는 말은 자신이 둔감한 사람이라는 자기소개에 불과하다. 


    왜 의미가 아닌 허무에 집착하지? 왜 전체가 아닌 부분에 주목하지? 두렵기 때문이다. 더 많은 손에 카드를 쥐고 싶기 때문이다. 선택을 바꾸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의미를 추구하면 권력을 얻게 되고 권력은 리스크가 따른다. 돌이킬 수 없는 함정에 빠진다.


    자신의 진로를 미리 결정하고 싶지 않다. 운명의 궤도에 갇히기가 두렵다. 일단 유보하고 관망한다. 그것이 허무다. 허무는 존재의 사실이 아니라 인간의 위험회피 전략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미리 정하지 않으려고 하며 천천히 간을 본다.


    찍을 당을 못 정해서 투표하지 않으면 그게 허무다. 허무는 인간의 우유부단함이다. 우주 안에는 허무가 없다. 인간의 포지션에는 허무가 있다. 어차피 망할 당에 투표하는 것은 허무하다. 그러나 망하는 것이 있어야 흥하는 것도 있으므로 전체로 보면 허무가 아니다.


    히틀러가 등신짓을 하지 않았으면 다른 사람이 그 짓을 할 확률이 높다. 하나의 카드를 쥐기 위해서는 많은 버리는 카드가 필요한 법이다. 버리는 카드는 허무하지 않다. 의미는 허무의 기반 위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의미냐 허무냐 머리냐 꼬리냐는 보는 방향이다.


    인간이 성숙한다는 것은 많은 카드를 꺾는 것이다. 취직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얻으면 궤도에 올라탄다. 다른 가능성이 사라진다. 대신 권력을 얻는다. 그것이 의미다. 의미냐 허무냐는 내가 사건의 말단부에 서느냐 도입부에 서느냐다. 주연이냐 혹은 조연이냐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은 말단부에 서고 미래를 내다보고 대비하는 사람은 도입부에 선다. 바둑의 포석 단계는 전략을 고민하지만 끝내기 단계는 그런 것이 없다. 의미가 없다. 포석은 권력이 있다. 내가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연동되어 결정한다. 


    끝내기는 권력이 없다. 마지막에는 공배를 메우게 된다. 어디를 메우든 상관이 없다. 의미는 대표성에 있고 사건의 시작점에 있고 미래를 결정하는데 있다. 나이가 들수록 미래가 없다. 말단부로 떠밀린다. 나무의 가지 끝으로 밀려난다. 갈 곳이 없다. 궁지에 몰린다. 


    그럴수록 작은 나의 미래를 버리고 큰 집단의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 나의 결정에 다른 많은 것들의 운명이 연동된다면 의미가 있고 그게 없다면 의미가 없다. 내가 갈 곳을 정하려면 내가 온 곳을 봐야 한다. 내가 갈 미래는 의미와 권력이고 내가 온 여정은 신이다. 


    신은 힘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가진 힘을 깨닫게 하는 존재다. 인간은 신의 은총 덕분이 아니라 자신이 내뱉은 약속 때문에 강해진다. 신의 권력은 인간의 약속과 그에 따른 권력을 정당화하는 논리다. 중요한 것은 미래를 내다보고 의사결정할 수 있느냐다.


    인간은 선택지를 꺾는 방법으로 강해진다. 어장관리를 하다가 포기하는 방법으로 강해진다.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할 때 내부의 압력이 증대된다. 권력이 증대된다. 권력자는 자기를 포기해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포기해야 할 것을 맞게 포기하는 것뿐이다.


    인간이 얻는 것은 이전에 결정된 것의 수확뿐이다. 내가 지금 수확하는 것이 다른 사람이 이전에 파종한 것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내가 뿌린 씨앗을 후대에 다른 사람이 와서 수확하게 하는 권력을 획득한다. 신은 인간의 의미와 권력의 긍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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