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훤, 기훤, 신훤, 지훤, 익훤, 공훤 등 이름에 훤자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다른 시대에는 그렇지 않다. 그 시대의 유행일 것이다. 궁예와 장보고 궁복은 뭔가 통하는 데가 있다. 궁예가 차지하고 악착같이 지킨 곳이 나주 지방인데 장보고가 활약한 곳이다. 이름 한 글자가 같은 것도 흥미롭다. 흔한 이름이 아닌데 말이다. 왕건은 아버지 용건, 할아버지 작제건과 같은 이름을 쓴다. 견훤 아버지 아자개는 아들 이름을 셋째부터 다섯째까지 용개, 보개, 소개로 지었다. 부모 자식 간에 돌림자를 쓰는 유행은 김부식에 의해 비판되었다. 중국은 이름이 한 글자라서 이게 문제가 된다. 교양이 없는 시골 신라 사람이 모르고 이상한 유행을 만들었다. 견훤은 신라의 엘리트 병사를 뽑았던 상주 출신이다. 장보고 잔당을 진압하러 호남에 갔다가 그곳에 눌러앉았다. 상주는 신라에 충성하는 특권지역이다. 견훤 아버지 아자개가 끝까지 신라에 충성하는 바람에 견훤이 대업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사실은 견훤이 이미 늙었고 애초에 지방 호족으로 만족했다는게 진실이다. 신라 서면 도통 견훤은 정식으로 왕이 된 적이 없다고 봐야 한다. 왕의 이름으로 당나라나 일본과 외교를 해야 왕이 된다. 내부적으로 왕을 칭하는 것은 그 시대의 유행이다. 우리는 고구려, 신라, 백제의 삼국시대와 견주어 후삼국을 떠들지만 과연 그게 사실인가? 5대10국의 혼란기에 중국과 한반도가 같이 혼란했던 거다. 금석문에는 도통태부 견훤으로 기록되고 있다. 황소의 난 이후 제나라 이정기를 비롯해서 절도사들이 왕을 칭하는 분위기였다. 신라와 고려도 내부적으로 황제를 칭했다. 일본 다이묘도 내부적으로는 왕이다. 우리말 임금이 유교 예법과 안 맞다. 신라는 촌장도 임금이라고 불렀다. 냉수리비 차칠왕등을 보면 알 수 있다. 왕, 갈문왕, 대왕으로 구분한 것이다. 견훤은 황소의 난 이후 개나 소나 왕이라고 떠드는 분위기에 묻어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는 중국과 상당 부분 동조화된다. 신라에 여왕이 있으면 당나라 무측천도 여왕이 된다. 당시 일본에도 여왕이 있었다. 영락제와 수양대군 행보는 닮았다. 서태후와 명성황후는 결이 비슷하다. 태평천국과 동학운동은 닮았다. 윤석열의 김정은 따라하기, 시진핑 흉내내기도 닮았다. 견훤은 그 시대의 유행에 편승한 것이다. 견훤의 행보는 일본의 쇼군과 같다. 다이묘가 막부를 열려면 임금이 있는 교토까지 군대를 몰고 가야 한다. 상락이라고 하는데 견훤이 서라벌을 친 것은 오다 노부나가의 상락과 비슷하다. 견훤은 경순왕을 일본왕처럼 허수아비로 만들어 놓을 생각을 했다. 궁예는 확실히 신라를 쳐서 없애고 고구려의 고토를 회복하고 삼한일통을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궁예는 시스템을 바꾸려고 무리수를 썼다. 귀족들의 반발로 살해되었지만 궁예의 시스템은 왕건이 잘 써먹었다. 역사에 실패한 개혁가는 많다. 실패했지만 유의미한 시도였다. 혁명가 정도전은 살해되었지만 정도전이 만든 시스템은 이방원이 잘 써먹었다. 역사는 그렇게 변증법적으로 발전해 간다. 견훤이 패배한 것은 아버지 아자개가 신라의 상주를 왕건에게 들어다 바쳤기 때문이다. 경주는 구석에 치우쳐 있고 상주는 요충지다. 경주가 없으면 상주도 없다. 상주가 없으면 경주도 없다. 요즘은 대구가 세다지만 옛날에는 대구가 상주의 일부였다고 봐야 한다. 이름이 상주인 것은 그 밑에 하주가 있기 때문인데 하주는 상주에 딸려 있다. 선덕여왕 때 하주의 치소는 경산인데 그게 지금의 대구다. 아자개는 당시 지역 분위기를 따라간 것이다. 견훤도 그 한계를 넘지 못했다.
결론.. 주변 분위기, 그 시대의 유행을 넘을 수 없다. 그것이 한계를 만든다. 그것을 뛰어넘으려고 하는 혁명가는 살해된다. 그러나 그런 시도가 있었기에 역사가 만들어진다. 견훤은 그 한계에 갇혀 있었고 궁예는 그 한계를 넘으려고 했다. 일본과 비슷한 견훤모델도 나쁘지 않다. 다 결과론일 뿐 당시로는 알 수가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