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가게 하는 것은 '이론적 확신의 힘'이다. 물체의 중간을 잡으면 양쪽에서 흔들어 대므로 당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확신을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실마리를 잡으면 그 뒤가 없다. 벽을 등지면 그 뒤가 없다. 정상에서는 더 갈 곳이 없다. 그럴 때 흔들리지 않는다. 비로소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것은 단순화의 힘, 원칙의 힘, 기본의 힘이다. 생각하려면 단서를 잡아야 한다. 단端은 끝단이다. 맨 끝에 무엇이 있나? 정상에 사건의 복제 메커니즘이 있다. 거기서 시작된다. 근원에 자궁이 있다. 그리고 아기는 태어난다. 사건의 자궁을 찾으면 다 찾은 것이다. 본 것과 아는 것에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의심할 필요가 없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는 정상에서 지식의 실마리를 잡아야 한다. 보통은 원자를 단서로 삼는다. 실패다. 원자는 가리키는 것이지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원자는 중간 전달자이지 최초 결정자가 아니다. 원자는 자궁이 아니라 아기다. 원자는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복제된 것이다. 우리가 목도하는 것은 현장의 변화다. 변화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최초 결정자는 내부에 변화를 숨긴 유체의 모습으로 존재한다. 원자는 불변이므로 변화의 발단이 될 수 없다. 변화가 변화를 복제한다. 변화는 유체다. 우주 안에서 생겨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 때문이다. 모든 변화는 있는 것의 자리바꿈이다. 그러므로 변화만이 변화를 만들 수 있다. 변화는 지목할 수 없다. 변화는 인간이 지목하여 가리킬 수 있는 강체의 모습일 수 없다. 1. 강체 = 불변한다. 2. 유체 = 변화한다. 3.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변화는 변화로 설명되므로 변화는 유체다. 인간은 대칭을 찾으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대칭은 마주보고 있다. 대칭은 방향이 반대라서 헷갈린다. 엉킨 실을 풀어도 실마리를 잡고 한 방향으로 계속 풀어가야 한다. 대칭되어 앞뒤로 왔다갔다 하면 곤란하다. 애써 풀어놓은 실이 도로 엉켜버린다. 풀린 만큼 감기고, 감긴 만큼 풀려서 미궁에 빠져버린다. 대칭이 모든 실패의 원인이다. 원인과 결과는 대칭이다. 인간은 원인과 결과의 대칭을 찾으면 아귀가 맞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틀렸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 결정이 있다. 원인과 결과는 대칭이나 결정은 비대칭이다. 대칭에 비대칭을 태우고 가는 것이다. 대칭이 운반하는 수레라면 비대칭은 그 수레에 태워지는 승객이다. 비대칭이 인류가 찾아야 할 진짜다. 끝단에 서서 실마리를 잡고 한 방향으로 계속 풀어가는 비대칭의 사고를 익혀야 한다. 자궁에서 아기가 나올 뿐 아기가 자궁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다. 원인에서 결과로 갔다가 다시 원인으로 되돌아온다고 착각하므로 인간의 사유가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 것이다. 순환의 오류를 극복하게 하는 에너지의 비가역성을 알아야 한다. 힘의 비대칭성 갈 수는 있는데 올 수는 없다는 것이 힘의 일방향성이다. 에너지는 유체다. 유체는 계를 이루고 균일화되어 하나가 된다. 에너지는 파동의 간섭에 의해 닫힌계 내부가 균일화되므로 두 방향을 가질 수 없다. 에너지의 비대칭성이 모든 변화의 궁극적 단서다. 에너지는 뒤가 없다. 대칭성이 없다. 에너지는 한 방향으로 가므로 문제를 풀어가는 실마리가 된다. 나무의 가지 끝이 흔들린다. 시계추처럼 흔들리며 왼쪽과 오른쪽을 오간다. 오른쪽으로 간 힘에 의해 왼쪽으로 돌아오고, 왼쪽으로 간 힘에 의해 오른쪽으로 돌아온다. 틀렸다. 줄기는 가지를 흔들지만 가지는 줄기를 흔들지 않는다. 우리는 에너지의 경로를 보는 눈이 없어서 유체의 균일성을 보지 못하고 힘의 일방향성을 모른다. 힘은 언제나 1로 존재한다. 힘이 일방향성, 비대칭성을 가지는 이유는 대칭이 깨져서 2가 1로 합쳐지는 성질을 힘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공간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시간의 속도가 빨라지는게 힘이다. 공간에서 시간으로 바뀌면 되돌아갈 공간이 없다. 두 방향의 공간이 마주보고 교착된 것이 입자의 대칭이라면 그 입자의 대칭이 깨지면서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몰아주는게 힘이다. 인류는 힘을 모른다. 운동으로 힘을 설명하는 오류를 저지른다. 결과로 원인을 설명하는 순환의 오류다. 인류는 여기서 막혔다. 힘은 입자로 설명해야 한다. 힘의 자궁이 입자다. 힘은 -><- 꼴로 이루어진 두 방향의 교착을 --> 꼴의 한 방향으로 바꾼다. 힘의 의미는 조절에 있다. 두 바퀴가 하나의 핸들에 의해 통제되듯이 대칭은 비대칭에 의해 조절이 된다. 우주 안에서 가장 확실한 지식은 에너지의 비가역성이다. 갈 수는 있는데 올 수는 없다. 설명은 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 양쪽으로 가면 순환의 오류다. 결과로 원인을 설명하고, 원인으로 결과를 설명하면 두 방향이다. 빛으로 어둠을 설명하고 어둠으로 빛을 설명하면 두 방향이다. 틀렸다. 선으로 악을 설명하고 악으로 선을 설명하는 돌려막기는 곤란하다. 원인과 결과를 통일하는 결정이 있고, 밝음과 어둠을 통일하는 광자가 있고, 선과 악을 통일하는 사회성이 있고, 진보와 보수를 통일하는 문명이 있다. 항상 하나가 더 있다. 대칭의 수레에 비대칭성을 태우고 간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쳐다본다면 곤란하다. 태우고 오는 버스가 아니라 타고 내리는 승객을 봐야 한다. 대칭을 타고 가는 코어가 진짜다. 사건의 플랫폼 하나의 에너지 방향성을 찾으려면 원인과 결과, 머리와 꼬리, 활과 화살을 동시에 올려놓을 테이블이 필요하다. 칼로 생선을 자르려면 도마가 필요하다. 의사결정에는 플랫폼이 필요하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의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테이블 위에 펼쳐놓으면 원인과 결과를 관통하는 의사결정이 보인다. 어떤 대칭된 둘이 공유하는 제 3의 것을 찾았을 때 자연의 일방향성을 깨닫는다. 한 방향으로 계속 가게 하는 힘을 깨닫는다. 자동차의 엔진과 바퀴를 연결하는 파워트레인을 발견한다. 그 둘이 공유하는 것은 유체의 모습을 하고 있다. 유체는 2인데 1인 것이다. 닫힌계 내부에 압력이 걸리면 의사결정구조는 유체가 된다. 물은 수압이 걸리고, 공기는 기압이 걸리고, 열은 열압이 걸리고. 에너지는 파동압이 걸려서 1이 된다. 풍선은 공기를 뱉어낼 뿐 빨아들이지 않는다. 압력은 한 방향으로 작동한다. 계가 내부를 유체로 만든 후에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그것은 1이므로 뒤가 없다. 북극의 북쪽이 없는 것과 같다. 힘은 되돌아가는 일이 없다. 사회는 집단의 권력압에 의해 작동하고, 남녀관계는 가정의 사랑압에 의해 작동한다. 언제나 계에 압력이 걸려 2가 1로 행세한다. 생물의 진화 역시 생태적 지위에 진화압이 걸려서 한 방향으로 전진한다. 사회는 집단 무의식이 있고 자연은 생태압이 있다. 그러므로 진화가 후진하는 일은 없다. 퇴화도 진화에 포함된다. 왼손과 오른손을 컨트롤하려면 가운데 몸통이 있어야 한다. 대칭이 있으려면 둘이 공유하는 비대칭이 필요하다. 비대칭이 없으면 둘이 따로 놀아서 분리된다. 몸통이 없으면 두 다리가 분리된다. 대칭은 짝수고 비대칭은 홀수다. 모든 움직이는 것에 2와 1이 있다. 이런 것은 감각적으로 아는 것이다.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양손으로 용수철을 누르다가 한 손을 떼면 용수철은 한 방향으로 날아간다. 우리가 입자 혹은 원자라고 믿는 것은 용수철을 양손으로 누른 것이다. 거기서 한 손을 떼면 힘이고 스프링이 날아가는 것이 운동이다. 이때 양쪽으로 반반씩 날아가지 않고 한쪽으로 백 퍼센트 날아간다. 모든 것의 원인이 되는 힘의 일방향성이다. 우주의 비밀은 여기에 있다. 질에 의해 압박된 입자 내부 모순에 의해 의사결정이 일어난다. 작용 반작용 대칭에서 하나가 이기면 스프링은 날아가고 고무줄총은 발사된다. 연결하는 질, 공유하는 입자, 이기는 힘, 전달되는 운동, 멈추는 량이 우주 안의 모든 것이 공유하는 사건의 복제 메커니즘이다. 세상은 이루어졌다.
질은 연결하고, 입자는 공유하고, 힘은 이기고, 운동은 전달하고, 량은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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