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사나 언론사는 현장 노동자를 인부라고 부른다. 노동자라는 말을 쓰기가 싫은 것이다. 독재정권이 사용해 온 근로자라는 표현은 착한 노동자와 나쁜 노동자로 갈라치기 하려는 나쁜 의도를 숨기고 있다. 부지런한 노동자는 근로자이고 게으런 노동자는 태로자란 말인가? 노동이라는 말에는 신성하다는 의미가 들어 있으므로 인간에 미치지 못하는 비인간들이 사용을 꺼려하는 것이다. 역시 정치적 프레임 싸움이다. 노동, 활동, 생동, 역동, 운동은 좋은 말이다. 인간은 활동하는 동물이다. 노동을 비하하는 것은 사회의 계급을 의식한 행동이다. 뒤로 카스트를 만들고자 하는 기동이다. 좁쌀만 한 표지를 찾아내서 낙인을 찍고 딱지를 붙인다. 한번 찍히면 영원히 매장한다. 이는 경쟁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명문대를 나오고 신분을 높여서 남을 차별하는 방법으로 인생 거저먹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비겁한 자들이다. 육체노동이든 정신노동이든 인간은 사회적 활동을 통해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는 존재이다. 노동에서 벗어난 자는 자기 존재를 정당화하지 못하므로 반사회적 행동을 하게 되어 있다. 그들이 자기 존재의 위태로움을 느끼면 금제와 터부를 만든다. 최근의 캣맘병도 그렇다. 일종의 정신질환이다. SBS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고 싶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증세가 심각하다. ‘뭐를 하지 마라’고 사회를 압박하는 것이다. 음식 포비아나 각종 공포증, 혐오증, 일체의 적대행위가 그렇다. 왜 일베충이 번성하는가? 그들은 사회적 상호작용을 잃은 거다. 고립과 소외를 느끼면 상대를 자극해서 반응을 끌어내야 하며 그러려면 독해져야 한다. 만인이 만인을 적대하고 자기방어에 골몰한다. 노동의 신성함에 대한 찬양의 말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인간은 병들어서 타인을 억압하고 터부를 생산한다. 그들은 심지어 연애를 혐오한다. JMS 폭로영상에도 화를 낸다. 일체의 사회적 활동을 혐오하며 자발적 히키코모리가 된다. 고양이는 박스를 좋아하고 어린이는 복면을 좋아한다. 자신을 숨기려고 한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본능이다. 노동과 활동과 운동의 건강함을 잃으면 인간은 새끼 고양이로 퇴행해 간다. 박스에 숨는 것은 본능이지만 언제까지 숨어 있을 것인가? 배가 고프면 나와야 한다. 사회가 병들고 있다. 노동혐오 사회는 희망이 없다. 일체의 교류와 활동을 긍정해야 한다. 활동하지 않으니 말하지 않고, 말하지 않으니 눈치를 보고, 눈치 보니 뻔뻔한 자가 이득을 본다. 속으로 분노만 쌓인다. 참을 수 없게 되면 보복한다. 게시판에는 뻔뻔한 민폐족에게 소심한 복수를 했다는 이야기가 넘친다. 슬픈 악순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