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읽기
프로필 이미지
[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4061 vote 0 2023.04.03 (10:42:13)

    안경 쓰면 빨갱이였다. 반공영화에는 간첩이 쓰는 안경을 무리가 일제히 밟고 지나가는 장면이 클리셰로 등장한다. 무학인 어머니는 야학에 이틀을 다니고 사흘째 할머니에게 머리채를 잡혀 끌려왔다. 글자 알면 빨갱이였기 때문이다. 글자 아는 사람은 모두 죽었다.


    '글자 좀 안다고 유세 떨고 다니던 놈들은 싹 다 죽었지.' 어른들은 그런 말을 대수롭지 않게 내뱉곤 했다. 노래 부르면 빨갱이였다. 젊은이들이 글자를 가르쳐 주면서 인터내셔널가 따위를 부르게 했던 모양이다. 멋모르고 모여서 노래를 불렀던 사람은 모두 죽었다.


    빨치산들이 밤에 산에서 내려와 마을 사람 이름을 부른다. 다음날 군경이 마을에 나타난다. ‘아무개 있나?’ ‘와?’ ‘땅!’ 밤에 이름을 불린 사람은 모두 죽었다. 그 소리를 듣고 밀고하던 귀가 있었다. 사람들은 다 죽고 그들이 경작하던 땅은 살아남은 사람이 차지했다.


    경주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다. 인민군이 포항을 점령하고 안강으로 내려왔다. 국군은 사령부를 산꼭대기에 설치했다. 읍참마속과 같다. 마속은 어리석게 산꼭대기에 진을 쳤다가 포위되어 죽었다. 인민군 특공대가 산 정상부를 포위하고 타격하자 안강까지 뚫렸다.


    경주까지 5킬로다. 경주고 학도병이 경주역에 집결했다. 경주여고 여학생이 걸어준 꽃다발 목에 걸고 그들은 사방전투에서 죽었다. 영남 알프스가 이어지는 경주 주변 산골에는 일제강점기부터 야산대가 있었다. 산골마을에 소문이 잘못 났다. 부산이 해방되었대. 


    인민군이 곧 들어온대. 김일성장군의 노래를 배워야 해. 이 노래만 부르면 인민군이 살려준대. 일자무식 촌놈들이 아는게 있을 리 없다. 그들은 모두 죽었다. 경주 부근이 이 정도였으면 제주도가 어쨌을지는 짐작이 간다. 상상할 수도 없다. 지옥 속의 지옥이었다.


    빨갱이라는 말은 그냥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 쓰는 말이다. 널 죽일거야. 인간이 스트레스를 받고 궁지에 몰리면 발악한다. 옛날에는 지역주의가 심했다. 이웃 마을도 함부로 못 가는 시절이었다. 북한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터를 닦으려면 뭐라도 저질러야만 했다. 


    전쟁이라도 일어나야 했다. 철수하는 미군을 붙잡아 놓으려면 어그로를 끌어야 했다. 인간은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동물이다. 불을 지를 수는 있는데 끌 수는 없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우고 남은 것이 없을 때 꺼진다. 모두의 가슴은 새까맣게 타서 하얀 재가 되었다. 


    ###


    옛날에는 모든 마을과 집안이 특정 집안이나 마을과 원수지간이었다. 좁은 제주도에서 피난을 가려고 해도 원수진 가문, 원수진 마을로는 갈 수 없다. 육지에서도 복수를 대물림하는 원수진 마을과 가문 간에 살인과 약탈은 예사다. 이때다 하고 원수의 씨를 말렸다.


프로필 이미지 [레벨:21]이상우

2023.04.03 (12:55:58)

전국에서 제주 4.3사건과 유사한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그걸 모르고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 대한민국호의 발목을 잡고 있네요. 살아남은 사람들의 괴로움만 더해갑니다. 

List of Articles
No.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sort
2480 이낙연 후단협의 갑질면접 완장질 4 김동렬 2021-07-05 4072
2479 모든 것의 어머니 김동렬 2023-06-26 4069
2478 주입식 교육의 폐해 2 김동렬 2021-10-11 4065
2477 한국 부동산문제의 특수성 4 김동렬 2020-07-30 4065
2476 최재형 실언, 정경심 판결 김동렬 2021-08-11 4063
» 4.3 그리고 빨갱이 1 김동렬 2023-04-03 4061
2474 전두환 죽고 윤석열 어쩌나? 2 김동렬 2021-11-23 4062
2473 현장에서 이겨야 이긴다 2 김동렬 2021-08-27 4062
2472 의리가 인생의 플러스알파다 김동렬 2021-06-08 4062
2471 인간은 잘 속는 동물이다 1 김동렬 2018-09-20 4062
2470 방사능과 무의식의 경고 1 김동렬 2023-08-24 4059
2469 창의하는 원리 image 김동렬 2023-03-22 4059
2468 윤석열 죽음의 게임 김동렬 2022-08-07 4059
2467 에미 뇌터의 정리 7 김동렬 2019-06-20 4058
2466 이재명과 사마의 4 김동렬 2021-09-22 4055
2465 타블로 죽이기와 한강 의대생 사건 2 김동렬 2021-05-14 4055
2464 우리가 이겨야 끝나는 전쟁이다 3 김동렬 2022-01-27 4053
2463 엔트로피를 써먹자 2 김동렬 2019-07-19 4051
2462 클린스만은 손절하자 김동렬 2024-01-21 4050
2461 간만에 명판결 나왔다 김동렬 2022-08-27 40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