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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벨:30]id: 김동렬김동렬
read 3045 vote 0 2023.03.14 (10:15:49)


    인공지능이 앞에서 끌고 양자역학이 뒤를 받치는 시대다. 이 시대와 결이 맞는 생각은 열역학과 게임이론이다. 이들이 가장 앞서 있다. 이들은 개체가 아닌 집단을 다룬다. 구조론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움직이는 집단을 해석한다.


    현대문명은 한계점까지 왔다. 돌파구가 필요하다. 존재의 엔진은 무엇인가? 세상을 움직이는 근원의 동력원은 무엇인가? 무엇이 존재에 성질을 부여하는가? 그것을 그것이게 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답할 때가 된 것이다.


    애덤 스미스는 개인의 이기심을 말하고 존 내시는 집단의 구조를 제시한다. 원자론이 개체에 주목하는데 비해 열역학의 닫힌계 개념은 집단의 성질에 주목한다. 인류의 사유가 개체 중심에서 집단 중심으로 전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 이래 인류의 사유는 개체의 속성에 갇혀 있다. 과학자들이 양자역학의 성과 앞에서 당황하는 이유다. 양자의 이중성을 집단의 성질로 보면 간단히 해결되는데 개체에 매몰된 고정관념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구조론은 세상을 구조로 보는 눈이다. 구조는 짜임새다. 어떤 하나는 짜임새를 가질 수 없다. 짜임새는 둘이 만나는 방법이다. 둘의 관계로 보면 양자의 성질을 머릿속에서 쉽게 시뮬레이션할 수 있다. 보이지 않던 많은 것이 보인다.


    사람들은 열역학과 게임이론의 보편성을 알아보지 못한다. 다양한 이론 중에 그런 것도 있어서 구색을 갖춘다고 생각한다. 구조론은 열역학과 게임이론을 일반화한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진실은 모든 것에 해당되는 보편원리다.


    움직이는 집단에 존재의 동력원이 있다. 존재의 엔진은 밸런스 복원력 곧 동적균형 dynamic balance이다. 움직이는 집단은 내부 충돌을 피하는 경로를 선택한다. 충돌을 피하여 간격을 두고 띄엄띄엄 존재하는 것이 엔트로피 증가다.


    물고기는 피시볼을 이루고, 새는 새 떼를 이룬다. 나그네쥐와 스프링복은 큰 무리를 이루고 일제히 한 방향으로 달려간다. 움직이는 집단이 내부에서 충돌을 피하면 자체적으로 질서가 발생한다. 그 질서의 자발성에 주목해야 한다.


    집단 내부의 자발성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존재의 엔진이 된다. 사건의 최초 원인 제공자가 된다. 역사 이래 인류의 사유는 모두 외부의 작용에 의한 변화였다. 게임이론과 열역학에서 우리는 자발성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죄수의 딜레마는 두 사람이 하나의 사건에 엮인다. 죄수가 선택한다는 것은 움직인다는 것이다. 움직이면 충돌한다. 충돌을 피해야 산다. 둘 다 범행을 부인하고 무죄로 석방되는 것이 최선이지만 그것은 자신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


    자신의 통제하에 있는 카드로 의사결정 하는 것이 자발성이다. 열역학의 통계적 접근은 결과론이다. 존재의 엔진은 원인론이라야 한다. 무질서도의 증가는 결과 측 사정이고 질서도 우위는 원인 측 사정이다. 원인 측에 자발성이 있다.


    게임에 갇힌 죄수는 자기 손에 카드를 쥐고 있다. 최악의 경우보다는 힘의 우위 곧 질서도의 우위다. 죄수는 카드를 행사하여 자신의 우위를 확인하는 결정을 한다. 게임이론은 내시균형에 도달하고 열역학은 열적평형에 도달한다.


    죄수의 선택과 열의 이동이 원리가 같음을 알 수 있다. 열역학에서 엔트로피 증가는 게임이론에서 포지셔닝 우위의 손실이다. 열은 무질서해지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게임 참가자는 포지셔닝의 우위를 잃어먹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우리가 찾아야 하는 존재의 엔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의 최초 격발자다. 그것이 사건의 원인 측을 구성한다. 보다 원인 측을 보는 내시균형이 결과 측만 보는 열역학의 단점을 보완한다. 둘을 합치면 구조론이 된다.


    내시균형을 이해한 사람은 없다시피 하다. 열역학을 이해한 사람도 없다. 거기에 보편성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제로 보편화하여 써먹지 못하는 이유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모든 선택에 죄수의 딜레마가 작용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유불리를 떠나 사람들은 사전에 학습되지 않은 경우 자기 통제하에 있지 않은 카드를 버리고 자기 통제하에 있는 카드를 사용한다. 이 점은 인지부조화로도 설명된다. 인지와 행동이 충돌할 때는 행동을 따른다.


    사회학 위에 심리학, 심리학 위에 생물학, 생물학 위에 화학, 그 위에 물리학이 있다. 응용과학에서 순수과학으로 이동하여 내시균형과 열역학을 통합하면 인간의 행동이 최종적으로는 물리적 조건에 지배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손에 어떤 카드를 쥐여주면 곧 그것을 행사한다. 다른 경로는 모두 막혔기 때문이다. 다른 경로는 질서도의 우위에 있지 않다. 늑대에게 쫓기는 사슴은 직진만 선택한다. 쫓기는 사슴 입장에서 유일하게 선택 가능한 카드다.


    책상머리에서는 옳고 그름을 따지기 좋아하지만 그런 부분은 상호작용 과정에서 용해된다. 현장에서는 눈앞의 지푸라기를 잡는다. 지푸라기에 대해서는 자신이 확실히 우위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카드다.


    열은 뜨거운 것에서 차가운 것으로 이동한다. 뜨거운 것은 차가운 것보다 질서도 우위에 있다. 열은 그냥 갈 수 있는 길로 간다. 다른 코스는 모두 봉쇄되어 있다. 열은 내부에 압력이 걸려 있다. 열은 압력에 의해 떠밀려 가는 것이다.


    인간은 똥이든 된장이든 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는 것을 선택한다. 정치판이 이 모양 이 꼴 된 이유다. 안철수의 모든 선택은 똥이지만 어쩔 수 없다. 다른 선택은 상대를 믿어야 하는 점에서 자신의 통제권을 벗어나 있다.


    인간은 YES와 NO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NO를 선택한다. YES는 선택권 행사가 아니다. 죄수의 딜레마에서 죄수는 동료를 믿고 범행을 부인해야 하지만 그 경우 결정권은 동료에게 있으므로 자신의 선택권 행사가 아니다.


    인간은 그저 할 수 있으니까 그것을 한다. 숨겨진 이유나 특별한 의도는 없다. 고소공포증 환자에게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라고 하면 뛰지 않는다. 안 하는게 아니라 못하는 것이다. 호흡이 가빠지고 근육이 굳는 물리적 장벽을 만난다.


    우리는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왜 하필 내가,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여기서, 왜 하필 이것을 해야 하는 지로 잘게 쪼개 보면 경황이 없는 상황에 몰려 선택지가 없다. 이걸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은 훈련된 사람이다.


    내시균형이 있듯이 김동렬 경로가 있다. 무의식의 압박, 스트레스의 압박, 호르몬의 압박에 의해 물리적으로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경로는 하나뿐이며 다른 경로는 심리적으로 봉쇄되어 있다. 인간은 저쪽이 막혀서 이쪽으로 간다.


    인간의 행동은 대부분 궁지에 몰려 그쪽으로 떠밀리는 것이다. 학습되지 않은 낯선 상황에서 갑자기 의사결정에 내몰리면 우리는 언제나 상대방에게 결정권을 넘겨주지 못하는 죄수의 딜레마 신세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구조론은 모든 것의 이론이다. 우주와 자연과 인간의 모든 것은 구조로 설명되어야 한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문화든, 스포츠든 구조가 그래서 그런 것이다. 궁극적인 단계에서 인간의 행동법칙과 물질의 운동법칙이 다르지 않다.


    인류는 지금까지 구조가 아닌 무엇으로 설명해 왔는가? 설명하지 않았다. 진지하게 묻지도 않고 엄격하게 답하지도 않았다. 개별적으로 접근할 뿐 전체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다. 근원의 동력원에 대해서는 누구도 질문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A가 어떻게 해서 B가 어떻게 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이차적인 진행 과정의 상대적인 원인이지 일차적이고 절대적인 원인이 아니다. A가 움직였다면 이미 사건이 상당히 진행된 것이다. 그것은 사건의 최초 격발이 아니다.


    총성이 울리면 선수들이 일제히 출발선에서 달려 나간다. 멀리서 관찰하는 외계인은 '한 사람이 앞장서서 뛰어가니 우르르 쫓아가는구나.' 하고 착각한다. 외부 관측자는 그 이전에 그들이 출발선에 모여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움직이는 것의 집합에 따른 충돌이 모든 것의 원인이다. 두 사람이 한 공간을 점유하는 모순이 사건을 격발한다. 우주 안의 모든 사건의 모든 원인은 죄수의 딜레마와 구조가 같다. 하나의 결정으로 둘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 구조다.


    닭들이 싸우는 이유는 닭장이 좁은데 따른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구조론의 관점이다. 닭장과 닭들의 관계가 원인이다. 보통은 심술궂은 닭이 먼저 쪼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쪼는 닭을 제거하면 다른 닭이 쪼는 닭이 된다.


    전쟁은 히틀러 한 명의 욕심 때문에 일어나는 것일까? 애덤 스미스가 말한 개인의 이기심과 같이 개체의 속성에 떠넘기는 태도는 비겁하다. 원자론과 같이 개체의 속성을 탓하는 것은 해명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떠넘기는 것이다.


    우리는 세계관을 갈아타야 한다. 개체에서 집단으로 올라서고, 정적균형에서 동적균형으로 올라서야 한다. 하나의 개체를 탓하지 말고 둘 사이 상호작용 구조를 보라. 결과 측의 정적균형을 보지 말고 원인 측의 동적균형을 보라.


    뭐든 잘게 쪼개기만 해도 상당히 답을 찾을 수 있다. 자동차는 분해하면 되고 인체는 해부해 보면 된다. 그러다가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면 방향을 전환하여 다시 조립해야 한다. 조립하는 과정에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인류 문명은 쪼개기 문명이다. 쪼개기의 한계까지 도달했다. 문명차원의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은 움직이는 것이다. 그것이 에너지다. 에너지가 움직이면 충돌하고, 충돌하면 교착되고 사건은 거기서 멈춘다.


    자발성이 사건을 격발하고, 질서도 우위가 경로를 지정하고, 균형이 사건을 종결한다. 움직이는 집단 내부에서 충돌을 피하는 자발성이 엔진이 되고, 상대적인 위치에 따른 질서도 우위가 경로를 지정하고, 균형에서 사건은 멈춘다.


    구조로 설명하지 않은 것은 설명한 것이 아니다. 우주 안의 모든 구조는 하나의 플랫폼을 공유한다. 답은 동적균형에 있다. 움직이는 것은 균형에 도달해서 막힐 때까지 움직인다. 이것이 인간의 사유가 도달할 수 있는 최대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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