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한 일이다. 대화가 되는 사람이 없다. 허무, 행복, 쾌락, 사랑은 허상이다. 그것은 호르몬의 작용이다. 호르몬이 글자 배운 사람의 논쟁거리가 된다는 말인가? 자위행위와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 내가 화장실에서 더 많은 휴지를 사용했으니 더 성공한 인생이다? 놀랍게도 그런 말을 하는 자가 있다. 그게 사랑타령, 행복타령, 쾌락타령, 허무타령이다. 이게 글자 배운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인가? 사이비 종교에나 홀리는 수준 이하라면 몰라도. 단국대 김도형 교수는 단번에 정명석이 사이비라는 사실을 알아봤다고 말하잖는가? 사이비에 홀리나, 사랑타령 쾌탁타령 허무타령 행복타령에 홀리나, 보이스피싱에 홀리나, 환빠에 홀리나, 지구평면설에 홀리나, 다를 거 없다. 나는 인간이라는 동물에 실망한 지 오래다. 그들의 비위를 맞춰줄 생각이 없다. 사랑은 좋은 것이야. 신토불이가 쵝오라고. 유기농이 최고지. 환빠가 쵝오. 똑같은 머저리 짓이다. 산삼은 그냥 풀인데 현찰 수억 주고 사 먹는 사람 있다. 1900만 원짜리를 2억 7천에 사 먹는 모양이다. 무당에게 속아 수억짜리 굿판을 벌이는 사람도 있다. 보이스 피싱과 정확히 같다. 사이비 종교도 같다. 공통적으로 인간의 심리적인 약점을 공략한다. 폼 잡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유물론자다. 그들은 언어를 비트는 기술을 쓴다. 그들은 신이라는 말을 물질이라는 단어로 대체하지만 본질은 같다. 신은 종교의 발명품이 아니라 인간 유전자에 새겨진 사회적 본능이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인간이 처음 말을 할 때부터 신은 존재했다. 그것을 인도의 30만 다신교로 풀어내든, 유대인의 일신교로 풀어내든, 북한의 개인숭배로 풀어내든, 중국 특색의 사회주의로 풀어내든 같다. 사실 이 문제가 허투루 볼 문제는 아니다. 중요한 거다. 그러나 대부분 호르몬이라는 본질은 제쳐놓고 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편다. 신토불이, 유기농, 환단고기 하면 뭔가 있어 보인다. 음식포비아는 그냥 동물의 본능이다. 원시인의 터부나 현대인의 결벽증이나 뭐가 다른가? 원래 인간에게는 그런 심리장치가 필요하다. 뭔가 하지 마라는 말이 필요하다. 자유는 두려워하고 잔소리는 좋아한다. 종교마다 하지 마라로 경쟁이 붙었다. 기독교 십계 받고 불교 비구니 348계로 응수한다. 집요하게 사생활을 감시하는 종교가 히트한다. 축구는 압박축구가 대세요, 종교는 압박종교가 대세다. 사랑, 허무, 행복, 쾌락은 인간을 집단과 결속하는 호르몬의 장치다. 집단에는 권력이 있다. 결국 인간은 권력이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다. 권력은 기능이다. 실제로는 기능이 있다. 기능은 연결이다. 개인과 집단이 연결되어 있고 인간과 자연이 연결되어 있는 거. 진리는 있다. 진리는 룰이다. 룰은 교착을 피하는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는 거다. 바둑이라면 두 눈을 만들어야 사는게 룰이다. 두 눈을 만들 수 있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걸 카타고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의미는 있다. 의미는 사건의 연결이다. 끊기면 죽는다. 개인에게는 의미가 없다. 행복과 사랑과 허무와 쾌락은 인간을 집단과 연결하는 장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허무주의자들은 그 허무가 개인에게 배당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건 착각이다. 남녀가 만나지 않고 혼자 사랑한다면? 그건 혼자 축구경기를 하는 것과 같다. 혼자 축구해서 40골 넣으면 정명석이다. 행복과 쾌락과 사랑과 허무는 집단 속에 있다. 애초에 그렇게 설계되었다. 신이 있느냐는 말은 우주가 있느냐는 말과 같다. 내가 있느냐는 말과 같다. 내가 없다면 내가 있느냐고 물은 사람은 누구냐? 나도 있고 우주도 있다. 둘은 연결되어 있다. 부분은 전체와 연결되어 있다. 개인주의 시대는 훈련되지 않은 개인이 집단의 대표가 되는 경우를 자주 맞닥뜨리게 된다. 그럴 때 당황한다.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 허무타령을 한다. 과거에 부족 지도자들은 특별히 훈련되었다. 지금은 개나 소나 갑자기 유튜브에서 뜬다. 일베의 작동원리다. 삽질만 거하게 하면 일간 베스트가 된다. 일간 베스트를 해봤자 얻는게 없으니 허무하다. 허무주의는 일베들의 개미지옥이다. 누가 일베 하랬냐고? 진리는 있다.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방향이 있다. 경로가 있다. 결이 있다. 룰이 있다. 조절장치가 있다. 메커니즘이 있다. 시스템이 있다. 동력원이 있다. 회로를 잘 설계해야 한다. 건물은 설계도가 있고 자동차는 파워트레인이 있다. 건물은 난방비가 있고 자동차는 연비가 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구분이 있다. 문명과 야만은 있다. 바보들은 이것을 연결시켜 생각하지 않는다. 허무, 사랑, 쾌락, 행복 다 같은 말인데 마치 다른 말처럼 생각한다. 인간의 조상은 동굴에 살았다. 햇볕이 나면 사냥과 채집을 나가고 비가 오면 동굴에서 기다린다. 햇볕이 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것은 외출하라는 명령이다. 날이 흐리면 기분이 가라앉는다. 동굴로 돌아가라는 명령이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그냥 그런 거다. 행복? 쾌락? 허무? 사랑? 호르몬이 웃는다. 그냥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정해주고 짝짓기 시즌을 알려주는 유전자의 장치다. 한 인간은 하나의 세포와 같다. 세포는 당연히 의미가 없고 그 세포들이 모여야 의미가 있다. 개인은 의미가 없고 집단에 의미가 있다. 물질로 보면 끊어져 있지만 사건으로 보면 연결되어 있다. 개인은 죽음이 있지만 인류는 죽음이 없다. 사피엔스는 죽은 적이 없다. 옛날 사람은 인과응보를 믿었다. 선한 사람은 보상받고 나쁜 사람은 처벌받는다고 믿었다. 그것이 의미라고 생각했다. 연개소문은 쿠데타를 했는데도 왜 천수를 누렸지? 벼락을 맞아죽는게 정답인데? 자식이 대신 벼락을 맞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허무는 그런 거다. 죄를 지어도 처벌을 안 받고 선행을 해도 보상이 없으니까 허무하다? 소박한 생각이다. 자신을 초딩으로 규정한 것이다. 잘하면 보상받고 잘못하면 처벌받는 것은 노예다. 왜 그대들은 자신을 노예라고 생각하는가? 왜 노예가 되는 것이 의미가 있다고 믿는 것인가? 왜 자신이 게임을 설계한 최종보스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아이디어가 없기 때문이다. 운전 못 하는 사람은 좋은 차를 받아도 허무하다. 누가 내게 페라리를 준들 운전면허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야? 허무하다 허무해. 람보르기니도 마세라티도 소용이 없구나. 그런 푸념을 내가 들어줘야 하는가? 삽질은 거기까지. 아는 사람은 진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이념은 어떤 이념이 있는게 아니고 이념 그 자체가 있는 것이다. 진리는 어떤 진리가 있는게 아니고 진리 그 자체 있다. 신은 어떤 신이 있는게 아니고 신 그 자체가 있다.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심할 수 없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 둘은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신이라고 하든 똥이라고 하든 그렇다. 받아들여야 한다. 우주가 있고, 내가 있고, 연결되어 있다면 방향은 명백하고 나는 그리로 가련다. 그뿐이다. 물론 끊어진 지점도 있다. 그리로는 갈 수 없다. 잠시 갈 수는 있는데 계속 갈 수는 없다. 가려면 계속 갈 수 있는 길로 가야 한다. 백래시를 만나지 않는 지속가능한 길이라야 한다. 그것이 진리다. 인간으로 우뚝 서려면 적어도 동물의 본능은 넘어야 한다. 칭찬 듣기를 기대하지 말고, 보상받기를 기대하지 말고, 고통받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그것은 동물로 태어난 그대를 인간으로 개조하는 인격훈련에 불과하다. 이미 인간이 되었다면 스스로 길을 정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아이디어다. 아이디어 없는 사람이 징징댄다. |
진리를 룰이다. => 진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