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주의는 무지의 소산이며 현대인의 어리석은 정신적 질병이자 일종의 문명병이다. 바닥에 있을 때는 허무가 없다. 갓난아기는 허무가 없다. 위로 올라갈수록 어색해진다.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별거 아닌데 괜히 쫄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정상에는 무엇이 있지? 인간이 허무를 느끼는 이유는 인간에게 그런 감정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쾌락을 느끼면 쾌락주의가 되고 허무를 느끼면 허무주의가 된다. 그런데 누가 느끼랬느냐고? 누구 맘대로 느껴버려? 느끼지 말라.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은 어떤 공적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왜 느끼는가? 느끼고 싶어서 느끼는 것이다. 그게 하지 말라는 자기소개다. 나는 제법 느끼는 사람이다 하고 선전하고 과시한다. 그것은 상대를 자극하여 반응을 구하려는 동물의 본능이다. 강아지가 짖어대는 것이나 고양이가 하악질을 하는 것과 메커니즘이 같다. 아이디어가 없다. 밑에 있을 때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 정상에 올랐을 때는 미션을 개척해야 한다. 그게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그들은 오로지 남을 이겨 먹으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남이 자기 머리꼭지에 있는 것을 못 참는 성격이라서 다 제끼고 올라왔는데. 정상에 올라서 한다는 소리가 근데 내가 여기에 왜 올라왔지? 허무주의는 그런 푸념이다. 얼빠진 자의 고백이다. 허무주의는 신, 구원, 진리로 대표되는 인간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절대적 가치 및 권위와 의미와 맥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태도다. 함정이 있다. 개인에게는 없어도 집단에는 의미가 있다. 허무주의는 개인과 집단을 구분하지 않는다. 허무주의는 축구선수가 공을 차지 않겠다는 것이며 가수가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꼬맹이가 밥투정하는 것과 같은 거다. 그런 녀석은 밥을 먹을 때까지 굶겨야 한다. 물론 다리가 부러지면 공을 차지 않을 수 있고 목이 나가면 노래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보통은 다리가 부러지면 더 이상 축구선수가 아니게 된다. 목이 나가면 더 이상 가수가 아니게 된다. 아니면 닥쳐. 축구선수가 아니고 가수가 아니면 애초에 발언권이 없다. 축구선수가 공을 차고 가수가 노래하는게 아니라 팀이 하는 것이다. 축구선수든 유행가 가수든 시스템의 부속품이다. 아기에게 허무가 없는 것은 독립적 인격이 아니고 가족의 부속품이기 때문이다. 축구선수가 허무를 느끼는 이유는 자기가 왕이라고 착각해서다. 허무주의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판적 허무주의다. 불교가 그러하다. 잘못된 가치, 잘못된 권위, 가짜 진리, 거짓 신을 비판하는 것이다. 쾌락을 숭배하거나 영생을 추구하거나 명성을 탐하고 돈에 집착하는 잘못에 대하여 그것을 부정하는 허무주의는 괜찮다. 여기서 비판적 허무주의는 의미를 긍정한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비판적 허무주의는 허무주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진짜 허무주의는 의미를 전면 부정한다. 맥락을 부정한다. 대신 자기소개를 한다. 의미는 원래 집단에 있고 개인에게 없다. 고장 난 라디오와 같다. 방송국과 단절된 라디오는 당연히 의미가 없다. 쇠귀에 경 읽기는 의미가 없다. 그들은 나는 방송국 없는 라디오라고 자기소개한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소이기 때문에 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바보는 발언권이 없다. '닥쳐!'로 제압하자. 허무주의는 애초에 형용모순이다.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미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도 의미가 없다. 진짜 허무주의자는 허무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 부정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조용히 떠나주는게 맞다. 허무주의는 상대를 자극해서 반응을 끌어내려는 소인배의 권력의지다. 자신의 권력을 달성할 실력은 없고 남의 권력을 방해할 수는 있다는 생각이다. 그 역시 권력행동이다. 일체의 권력추구는 허무주의에 반한다. 타인의 권력에 대한 방해행동도 허무에 반한다. 구조론으로 보면 인생은 의미가 있다. 진리가 있다. 세상은 변화다. 변화는 움직인다. 움직이면 충돌한다. 충돌을 피하는 것은 질서다. 질서에 의지하는 것이 진리다. 의미는 사건의 연결이다. 사건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유물론자는 허무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물질로 보는 대전제가 깨지는 것이다. 구조론으로 보면 세상은 물질의 집합이 아니라 의미의 연결이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세상이 없다는 말이고 그것은 자기부정이다.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존재하지 않는 사람의 의견은 들을 필요가 없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 대한 어떤 유튜버의 평은 이 영화가 허무주의를 논하고 있다는 건데 허무주의는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불교적 허무주의, 다른 하나는 다다이즘과 같은 MZ세대의 키치적인 허무주의다. 그냥 깽판이다. 진보에 대한 냉소. 문명에 대한 부정. 파시즘과 통하는 것. 그것은 그냥 미친 것이다. 방송국과 연결이 끊어진 라디오의 불만. 축구선수가 갑자기 공은 차서 뭣하냐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디지게 맞는다.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거짓 진리에 대한 부정은 당연히 필요한 행동이다. 이런 소동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집단이 평가받았다. 의미는 집단에 있었다. 지금은 개인이 평가받는다. 개인이 의미를 추구한다. 당연히 의미는 없다. 원래 의미라는 것은 집단에 돌아가는 것이다. 개인에 없는게 당연한 거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사회성을 부정하는 것은 발기가 안 되는 사람이 꼬추는 있어서 뭣하냐고 푸념을 늘어놓는 것이다. 눈이 없는 사람이 안경은 써서 무엇하냐고 푸념하는 격이다. 소리를 못 듣는 사람이 음악이 왜 존재하냐. 필요 없다고 외치는 격이다. 헛소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