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는 과학이 인류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다. 호롱불이 전깃불로 바뀌는 것을 봤다. 매일 과학의 위대함에 감탄했다. 오직 과학만 멋있고 나머지는 모두 시시했다. 과학이 내 존재의 이유가 되어주기에 충분할 것으로 여겼다. 미신을 타파하고, 종교를 쳐부수고, 세상의 모든 거짓과 싸워야 한다고 믿었다.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고 입씨름할 이유가 없다. 세계의 모든 과학자를 한자리에 모아서 상온 핵융합 성공시키면 되잖아. 인류가 힘을 모아 에너지난 해결, 식량난 해결, 모든 문제 해결. 좋잖아! 정치도 과학으로, 경제도 과학으로, 생활도 과학으로, 문화도 과학으로, 모든 것을 과학으로. 못할 이유가 없다. 그만 흥분해 버렸던 것이다. 과학지상주의 생각은 4학년 때 깨졌다. 내가 수학과 과학에 소질이 없다는 사실을 알아버렸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그것은 언어다. 언어를 지배하는 것은 사유다. 과학의 자동차는 발전했는데 사유의 운전기술이 따라가지를 못한다. 생각을 어떻게 하는지 말해주는 사람이 없다. 생각의 과학이 없다. 그것을 질문하는 사람도 없다.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인류가 여전히 삽질하는 이유는? 그 과학이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이 99 퍼센트 해결해도 백 퍼센트가 아니면 호환되지 않는다. 인류는 얍삽하게도 과학이 만들어준 열매를 따먹으려고만 할 뿐 과학적 사고로 갈아타지는 않는다. 여전히 과학은 과학 안에 갇혀 있다. 과학이 사회의 다른 많은 분야와 호환되지 않는다. 정치판만 보더라도 원시 시대의 눈알 부라리기 정치, 주먹다짐 정치를 졸업하지 못하고 있다. 진보니 보수니 하고 말은 하지만 그게 동물의 짝짓기 본능과 서열본능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가 과학의 힘을 빌린 증거가 없다. 과학을 만드는 것은 생각이다. 생각의 과학이 없다. 인류는 생각할 줄 모른다. 바둑의 수순은 알아도 생각의 수순은 모른다. 생각에 앞서 볼 줄도 모른다. 안을 볼지 밖을 볼지 모른다. 전체를 볼지 부분을 볼지 모른다. 사건을 볼지 사물을 볼지 모른다. 탄생을 볼지 전달을 볼지 모른다. 일단 눈으로 보는게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 우선순위 1번이 되어야 하는 것은 의사결정이 어떻게 일어나는가다. 이 질문을 하는 사람이 없다. 의사결정은 복제된다. 사유는 원리에서 복제된다. 모든 것의 근원에 자연의 의사결정원리가 있다. 자연은 어떻게 의사결정 하는가?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는 그다음이다.
자연의 복제원리>인간의 관측방법>생각하기>언어로 전달하기>과학하기 일단 보는게 안 되니까 다 안 된다. 전체를 보고, 변화를 보고, 사건을 보고, 의사결정구조를 보고, 시스템을 보고, 메커니즘을 보고, 밸런스를 보고, 대칭을 보고, 코어를 보는 눈을 얻어야 한다. 보는게 되면 생각할 수 있고, 생각하는게 되면 말할 수 있고, 말하는게 되면 과학이 사회의 다른 많은 분야와 호환된다. |